안녕하세요!
EXHIBITION
안녕 휴먼?
기간| 2019.06.13 - 2019.07.13
시간| 11:00 - 18:00
장소| 아트스페이스풀/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
휴관|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396-4805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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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안녕 휴먼?> 전시전경


  • <안녕 휴먼?> 전시전경


  • <안녕 휴먼?> 전시전경


  • <안녕 휴먼?> 전시전경

  • 			펼쳐서(展) 보여주기(示), 그리고 우회하기
     
    김선옥 (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이 글은 통상적인 ‘서문’(preface)이다. 전시를 보기 전에 읽었으면 하는, 문자 그대로 ‘서문’. 전시 서문이 왜 굳이 자기 소개로 시작하는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이 글은 전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안내문도, 전시를 해석하는 비평문도, 혹은 이미 전시를 본 후에 작성한 리뷰도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가이드 정도이거나 당신의 동선과 동작을 예측하는 어설픈 가정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전시장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이 글로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김대환이 보여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역설과 반어로 가득한 그의 세계는 절대적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곳의 모든 표상은 거의 ‘속임수’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다음과 같다. “부디 의심하시오.”
     
    김대환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환유에 가깝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계속해서 다른 식으로 확장되고 연결되면서 여기에서 발생하는 의미가 단 하나로만 규정되지 않도록 작가는 간접적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따라서, 작가가 안내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가 때로는 다소 느릴 수도 있다. 다만, 만약에 그가 정한 선로를 당신이 이탈하지 않는다면, 그 길의 목적지를 명확하게 알아내려 하는 것보다 오히려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에 중간 지점에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힌트들을 찾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따라서, 이 여정은 수수께끼의 정확한 해답을 한 번에 찾는 것보다는 스무고개의 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에 가깝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기
    1. 전시장에는 사물들이 부유한다. 이곳에서는 견고하지 않은 의미들이 생산되고, 그것들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이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당신은 어쩌면 막연하게 불안할 것이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커지면서 동시에 작아진다.’ 당신도 김대환의 작품에서 그런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느 옛날 철학자가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를 가지라”고.
     
    1-1. 풀의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창문이 낯설다. 여러 사물을 합성해 놓은 듯한 푸른빛의 거대한 이미지가 마치 출렁대며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2D 평면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풍경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조악해 보이는 저해상도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떠다니는 사물들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중첩된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만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여기에 숨겨진 대상들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하나씩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나 옵아트(Op Art)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힌트 하나를 주자면, 이 이미지를 전시장을 나오기 전까지 꼭 기억하길 바란다.
     
    창문 가운데 작은 프레임이 있고, 그 중심에 카메라가 켜진 스마트폰 하나가 있다. 당신은 우선 맨눈으로 프레임 너머 무엇이 있는지 열심히 관찰할 것이고, 호기심/의심 가득한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살펴보며 그 너머를 향해 두 번째 응시를 시도할 것이다. 당신의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는 (운이 좋다면) 휴먼 스케일의 대상이 존재할 것이고, 움직이는 대상은 동일한데 ‘이상하게도’ 위치에 따라 스케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곧이어, 당신은 6인치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응시의 자리가 권력의 자리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도. 혼란스럽다. 그러게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는가? “부디 의심하시오.”
     
    1-2. 이제 앨리스처럼 토끼 굴로 들어갈 차례이다. 당신은 전시 제목 《안녕 휴먼?》과 더불어 전시장 앞에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서, 이번 전시가 ‘인공 지능’(AI) 혹은 ‘환영’(illusion)에 대한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수평과 수직이 거의 맞지 않는 풀의 바닥과 벽을 ‘이상한’ 사각형의 구조물이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다. 관객참여형 전시라고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다. 이미 무슨 전시인지 다 보기도 전에 ‘알 것 같아서’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어쨌든 구기동의 변두리까지 힘들게 찾아왔으니 우선 들어가 본다. 천장의 높이와 바닥의 경사가 모두 다른, 온통 새하얀 벽면의 내부가 ‘이상하다’. 공간에 맞춰 온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방 안쪽을 향해 가는 당신이 애처롭다. 그러나, 기존의 전시장 바닥과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바닥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목은 아파 오고 몸을 잔뜩 웅크린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서 여기를 얼른 탈출하고 싶어졌지만, 불현듯 당신을 보고 있을 저 창 너머의 누군가의 시선이 생각난다. 그런데, 몇 분만에 응시의 대상이 바뀌었다. 조금 전 전시장 밖에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 당신이 보는 세계가 시각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여기 내부로 들어온 순간 당신 자신이 보이는 대상으로 관계가 전복되면서 조금 전까지 당신이 봤던 세계, 그 유령 같은 풍경의 존재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다)
    *혹시 당신이 호기심/의심이 많은 관람객이라면, 이 구조물을 나가자마자 외부를 빙 둘러볼 것이다. 전시란, 몸을 움직여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이상한 나라에 갔던 앨리스는 6개월 후 거울 반대편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어디든 가기 위해서는 본인이 가려는 방향과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당신은 이제 이 구조물을 나가기 전 잠시 머뭇거릴 것이다. 작은 삼각형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반짝거리는 거울과 타일 바닥이 화장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은밀한 공간에 놓여 있는 ‘이상한’ 사물이 하나 눈에 띈다. ‘휴먼’ 스케일(scale)에 어긋나는 크기의 조형물은 실체를 알 듯 모를 듯 보이지만, 당신이 추측하는 그 생명체가 맞다. 그리고, 거울에 반사된 당신의 ‘이상한’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까 봐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꾸깃꾸깃하게 구긴,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 ‘스케일’이 달라진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인식 과정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몸이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모험과 유사하다.[1]실제 스케일이 달라진 채로 거울에 반사된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다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거울 속 대상은 단지 반사된 형상이 아니며,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가치가 달라질 수 없는 존재다. 표상의 세계에서 거울 밖의 당신과 거울 속 당신은 그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앨리스는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당신도 이제 꿈에서 깨고 현실로 돌아올 순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하게도’ 당대에는 전혀 이상할 것 없었던 현실(부조리했던 18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은 거대한 ‘체험관’을 나오며, 또 다른 착시효과를 예상하면서 바로 옆 방의 나무 바닥에 발을 들일 것이다. 그리고, 당황할 것이다.평면과 입체가 뒤섞인, 오히려 전시의 전통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는 전시장에서 당신은 오히려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눈과 발의 방향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방의 입구부터 ‘이상하게’ 배치된 작품들을 시작으로, 도대체 작품을 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동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으며 작품들은 마치 기능을 멈춘 채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김대환의 이전 작업을 본 적이 있다면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할 것이다) 조각의 덩어리는 해체되어 이제는 좌대 위에 놓인 채로 기능하지 않고, 질료들은 속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형상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공간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만약 당신이 성실한 관람객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고 현대미술에 대한 넓은 아량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작품들의 표면을 살펴보면서 각 매체가 드러내는 특징을 빠르게 간파하려 하겠지만, 이러한 독해 방식으로는 안타깝지만 ‘오해’만 늘어날 뿐이다.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길 바란다. 가령, 그림이 향하고 있는 시선의 위치라던지, 작품이 이 공간에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달라진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특정 위치와 특정 시각에서만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김대환이 구축한 상황은 전시에서 작품을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눈과 발을 가로막는 작가의 일시적인 ‘교란 작전’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마침내 다다르는 그곳에 살짝 걸터앉아 보이는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풍경은 결국 다르게 보일 것이다. 6월과 7월의 여름은 볕이 좋은 계절이다.
     
    1-1-1. 바닥이 조금 낮은 곳을 열린 문을 통해 기웃거린다. 안에도 작품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막상 전시도 거의 다 본 마당에 대충 보고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낮은 공간으로 내려가기에는 망설여져서 문턱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는데 공간에 들어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무엇인가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것 같다. 귀찮지만 결국 몸을 움직여 삐걱대는 계단을 내려간다. 작품인지도 모를 트렁크 위에 ‘이상한’ 드로잉이 하나 걸려 있다. 초상화인가 싶은 것이 가족을 그린 것 같은데 배경이 하늘이다. 혹시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을 보면서 연상되는 모양을 상상한 경험이 있는가?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 창문에서 봤던 ‘이상한’ 그림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가 생산되는 과정은 인식의 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
     
    ‘이상하지 않은’ 나라로 돌아오기
    0. 김대환은 어느 날 내게 짧은 유튜브(Youtube)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닥에 있는 옵아트(Op Art) 그림을 보고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림 속 기하학 패턴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인식한 것일까? 영상 속 고양이는 패턴과 싸우듯 종이를 물고, 뜯고, 씹어 먹기까지 하였다. 그림의 움직임은 결국 고양이의 반응이 발생하도록 한 셈이며, 이것은 착시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양이는 새로운 대상을 봤고, 이것을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결국에는 움직임을 수행했다. 이미지를 인식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에 대한 반응도 작동하기 시작한다.
     
    《안녕 휴먼?》은 오늘날 미술이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맞춰 수동적이 된 상황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제 전시는 작품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고 무결하게 ‘보이기’만을 위한 스펙터클 쇼가 되었다. 그리고, 전시 관람은 전시를 보고 인식하는 행위가 아닌, 봐야 하는 의무감을 동기로 움직이는 의례적인 행사가 되었다. 김대환은 이러한 전시에 대한 고질적이고 상투적인 몸짓을 거부한다. 이것은 장소에 의해 재규정되는 작품을 전시 구조 안에서 새롭게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시각적 생산물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전시에서 우리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전시를 통해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미술의 언어로 환원되는 모든 이미지를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작가의 ‘손’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장소로 작동하는 것, 그것이 ‘전시’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펼쳐(展)’ ‘보여주는(示)’ 존재로 남아야 할 이유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휴먼 스케일을 초월한 본질적인 것을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세상은 지금 그대로일 것이며, 어떤 행위 하나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향수에 잠겨 다른 우주를 몽상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보다, 아예 그 외양을 부숴 버리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좀더 정확히 말해 인간 정신의-전혀 다른 모험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우리 내부의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벗어 던지는 일에 몰두하게 될, 그런 우주를 몽상하는 것이다.[2]
    김대환은 전시가 일종의 “진짜 맛집”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령, 인정된 가치를 찾기 위한 체험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경험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가 존재하는 곳 말이다. 김대환이 찾고 있는 환상의 세계는 그런 “전시 맛집”이 아닐까? 그곳은 작가의 진짜 ‘손맛’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한 최적의 장소일 것이고, 작가와 관람객 모두 서로의 시공간을 기꺼이 공유할 가치가 있는 사려 깊은 초대의 자리로 존재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끝에는 작가의 편지가 한 통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이 전시장을 떠날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내가 지금까지 끄적거린 글과 다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어쩌면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에 내가 찾은 답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이것은 동시에 한 작가의 ‘개인전’에 임하는 기획자(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세계에 과연 완벽하게 다다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 차이의 두려움을 핑계로 머뭇거리지는 않기로 했다. 그 다름이 혹여나 그의 세계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이번 전시의 불완전한 조각을 어쩌면 그 차이로 인해 완성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디 당신도 망설이지 말고 직접 바닥에 발을 디디고 눈으로 발견하길 바란다. 당신이 몰랐던, 혹은 이미 알고 있던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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