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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김우진 : 사각형 안에 사각형 안에 사각형 안에...
기간| 2021.12.30 - 2022.01.16
시간| 10:00 - 18:00 (휴관 없음)
장소|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충남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174
휴관|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41-414-4464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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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각각의 사회 속에 숨어있는 프레임,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일상 속의 장치들, 그리고 그 장치들이 개인들에게 은밀하게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풀어간다. 작업은 특정 사회를 바라보는 관찰자인 개인이 찾은 작은 질문에서 시작하여, 드러나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게 은밀하게 작동하는 일상 속 장치들을 찾아내고, 이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참/거짓’, ‘좋은 것/나쁜 것’이라고 여겨진 것들에 균열을 꾀하고, 질문을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다양한 형태의 프레임에 (예를 들자면 아시아인, 한국인, 21세기, 중산층이라 여기는 가족의 일원 등) 속한 한 개인인 ‘내’가 다른 개인들과 만나며 그들이 가지는 특정 시선, 시각, 혹은 다른 어떤 경계와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충돌에서 질문들은 시작된다. 이는 특정 프레임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나’의 마비된 시선/인식을 발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업을 이끄는 방법으로, 특정 지역에 일시적 거주자로 머물며 공간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찰자의 시점에서 질문을 도출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맥락 안에서 추적하고, 다시 이와 관련된 개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을 거쳐 시각적 작업을 도출한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갤러리에 있는 것 처럼 행동하시오’라는 지시어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주목한 < The Moment >, 2012년에 제작년도와 맞춰 생각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선에서 벗어난 개인들의 일반적인 정보를 통해 타인에 대한 우리에 편향된 인식을 이야기하고자 한 < ___ In The Wonderland >, 그리고 마치 위에 무엇이 있는 듯 잡으려는 사람들의 모습 < Knocking on Heaven’s Door >를 통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프레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더불어, 한국, 일본, 대만의 국가주도 집단체조에 대해 기계적으로 참여한 개인들에게 2번씩 시켜서 얻은 개인들의 몸이 기억하는 움직임 (< Brave New Exercise : Memorized Movements >) 통해 보이지 않는 프레임과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우리 안의 장치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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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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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當然)의 그림자 
실상 대부분의 예술 작품이 무감각했던 풍경의 한 단면을 인지하게 만들지만(하고자 하지만) 김우진 작가는 그 지점에 꽤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관객이 다가서면 기다렸다는 듯 잔뜩 안았던 질문을 와르르 쏟아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늘 우리가 당연한 듯 소비하고 받아들이는 구조를 재고하려는 의지가 있다. 관객인 당신은 그가 던진 질문들에 아마 당황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마주했을 때 편견과 배제를 우선했던 당신, 사회가 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 이면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했던 당신, 시간과 시대의 변화를 핑계로 과거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당신. 그런 당신이 사회적 약속과 규칙의 그림자라는 현상학적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그림자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작가는 또 질문을 남긴다. 이 글은 작가가 제시한 몇 개의 질문들을 살피며 이어가보고자 한다.

분절된 자취 사이
< 건널 수 있을까? Ko toku piki? Can I pass? >(2014)를 먼저 이야기해보자. 피부색, 언어, 문화 차이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차별과 혐오의 출발점이다. 이로 인해 서로를 배제하고 인정을 주저하는 관객의 그림자는 < 건널 수 있을까? Ko toku piki? Can I pass? >의 각 스크린의 경계에서 잘린다. 납작한 화면 사이 동강나버린 자신의 어색한 그림자를 통해 작가는 스크린 앞의 수동적인 관객 대신 일상에 만연한 편견을 인지하는 주체를 호명한다.
< 건널 수 있을까? Ko toku piki? Can I pass? >에서 자신의 잘린 그림자를 보았던 당신과 당신의 몸은 < Brave New Exercise >로 이동한다. 작가는 한국, 일본, 그리고 대만에서 시행되었던, 이름은 다르지만 그 구성은 비슷한 ‘체조’를 언급한다. 한국에서는 국민체조, 일본에서는 라디오 체조라고 알려진 그것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모토 아래 학교 체육 수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나 역시 처음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반주에 맞춰 이내 반응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80년대 생인 나는 초등학생부터 10년 넘게 국민체조, 새천년 체조를 배웠고 외웠다. 이 체조를 얼마나 잘 외웠느냐는 곧 성적에 반영되었는데 일정한 속도로 모두 같은 행동을 하는 그 장면을 질서와 통일이라며 뿌듯해했던 선생님의 표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규율의 무거움을 배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체조는 일제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집단체조는 1930년대 초의 ‘라디오체조’에서 1937년의 ‘황국신민체조’, 1940년의 ‘대일본국민체조’로 이어진다. 그 출발점인 라디오체조는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의 신체를 서구의 기준에 맞추어 생존경쟁을 돌파하려는 근대적 염원이었고, 식민지에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뿌리박으려는 허울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체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정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학교는 체조와 교련 등 교과를 통해 신체능력을 육성·규율화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깊이 배인 기억에 따라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는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의 결과임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작 체조일 뿐인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왜 그걸 해야 했지?”라는 금지되고 지워진 질문의 뒷면이 노출된다.
< Welcome to the World of Brave New Excercise >(2015)의 한 장면이 그랬다. 작가가 만난 한국, 일본, 대만의 참여자들이 음악에 맞춰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체조를 해본다. 이윽고 몇 십 명이 체조하는 장면이 한 화면에 펼쳐지는 순간 마치 오차 없는 매스게임을 볼 때의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한다. ‘하나처럼 보인다’라는 말 뒤에는 합치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소비한 시간과 과정이 은닉되어 있다. 독일, 한국, 일본 등에서 촬영한 체조 사진을 드로잉 한 작품 안에서의‘우리’도 일사불란하게 공동의 기억을 나누는 듯 보이지만 어디에도 개인은 없으며 그저 체조하는 덩어리들만이 잔재한다. 커피로 흘리듯 그려진 그 ‘덩어리’들은 종이에 깊게 배어 있다. 사진으로 박제되었지만 결국 현재에도 이어질 그 장면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향과 흔적으로 남은 덩어리들은 나의 신체인가 그림자인가.

망각의 방향
획일화된 사상을 적재하려는 시도는 체조로 번안되어 일상에 잠입한다. 체조를 체현한 몸은 그 훈련의 산물이다. 그렇게 체제의 순편한 이행을 위해 통합된 획일화는 개인의 신체와 사고를 아주 느리게 잠식한다. 인간사회가 형성한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라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말처럼, 특정 집단은 우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교묘하게 설정하고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해왔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축적해온 경험과 사고가 결코 자연스럽게 형성된 건 아니었음을 작가는 역설한다.
이렇게 < Brave New Exercise >를 통해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나의 세계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냈다면 < 완벽한 결말의 서막 >(2019)은 당신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자신이 본 구조의‘그림자’들을 꺼내놓는다. 여기서 주인공은 언어 즉 한국의 제주어, 홍콩의 광둥어, 대만의 객가어다. 어린 시절부터 이 언어를 사용했던 인터뷰이들은 각자의 언어가 사라지는 이유를 묻자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는 동일한 대답을 내놓는다. 표준어와 방언이라는 이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에 수업시간에 사용했다가 혼이 났다며 농담처럼 흘리는 인터뷰이의 대사는 지역과 지역을 구분하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용이 금지되거나 차단되기에 사라지는 건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일테다. 작가의 시선은 이제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이면을 향했다면 거기에 가려진 존재들을 살피고 그들의 불투명한 미래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들을 발화하기 위해 점멸의 방식을 보여주기를 택한다.
< 햇볕과 밤의 중간지대 >(2020)에서 해녀들은 제주어로 된 노래를 부르다 차례로 천천히 사라진다. < 유령들 >(2020)에서 네거티브로 표현된 인물들이 경기도 포천의 노동요 ‘방아타령’을 노래한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마치 오류가 발생한 기계처럼 불쾌한 소리와 함께 퓨즈가 끊기듯 사라진다. 작가는 이를 통해 곧 사라질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들을 은유하지만 그들이 소멸한 후 마주하게 되는 건 그저 검은 막 혹은 스크린이다. 그들의 잔상도 금방 그 검은 화면에서 건져진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는 장면보다 완전히 사라진 후 맞닥뜨린 고요한 공백을 더 기억한다. 그 앞을 떠난 후 나와 당신은 해녀와 창을 부르는 인물들의 자취를 지속적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을 특권화 하는 문화와 꿈을 통한 망각이 자본주의의 현실임을 설명했던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현대사회체제가 전통의 보존 대신 변화를 통해 역사적 경험을 과거로 추방한다고 설명한다. 해녀도, 포천의 노동요도 언젠가 박물관에 얹힌 ‘그땐 그랬지’ 식의 향유와 추억으로만 소환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 햇볕과 밤의 중간지대 >와 < 유령들 >을 통해 그들을 중간과 유령으로 지칭함으로써 망각될 존재의 위태로움을 드러내고 잔상 너머 어둠 속에서 당신에게 질문을 또 던진다. 남은 어둠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 어둠을 어떻게 밀어낼 것인가. 어쩌면 누군가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기에 소멸하는 존재들이 발생하는 건‘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주어진 시스템에 맞춰 사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냐며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역으로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한 그것은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으며 도리어 끊임없이 짚고 요량해야 할 일임을 반문한다. 혁신과 변화의 신조 아래 소멸하지 않기 위해 점멸의 빛을 송출하는 존재들을 더듬고 끊임없이 발화하는 일, 질문하는 일, 그 그림자를 없애기보다 그를 되묻는 일을 작가는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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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출처=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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