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XHIBITION
生·물
기간| 2019.10.02 - 2019.10.15
시간| 11:00 - 18:00
장소| 나무아트/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4층
휴관|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22-776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잃어버린낙원
    2013~9 캔버스에 유채 110×140cm

  • 겨울 물놀이
    2012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 Washing
    2010 캔버스에 유채 162.3×130.3cm

  • 그물을짜는시간
    2016 캔버스에 유채 91×116.5cm
  • 			최경선의『生·물』- 양생과 기화의 치유記 
    1. 녹록치 않다. 산다는 것은. 현재는 과거가 과거는 그보다 더 오래된 과거가, 그리고 현재는 미래에, 또 미래는 과거인 현재의 자장에 의해 비정형적인 삶의 형태를 만든다. 특정한 셈법이나 기억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면적 모습들.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삶에 다양한 방정식을 대입하나, 수학처럼 정해진 답이 도출될 리는 없다. 여러 유형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채, 통합하지 못한 파편들로 미완의 일상성은 유지된다. 감정·생각·의지·지향·욕망·가치가 혼재된 상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을지라도, 삶은 결코 만만치 않은 통증과 갈증으로 불확정적이다. 
    
    삶은, 생명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또 삶을 지향하는 의지와 인내로 인해서 위대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이 지상에 온 건 아니지만, 삶의 과정에서 에고(Ego)로부터 수퍼에고(Super ego)에 이르는 '이타(利他)'의 성숙하고 숭고한 단계에 다다를 수 있어서다. 피투성(被投性)이나 불연속성과 같은 실존적 조건과, 사회적 구조와 조건들에 의해 타율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 또는 물리적이고도 생물학적으로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치는 생활환경 속에서도 "살아내고" 또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살아야만, 아니 살아내야만 이타라는 궁극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어서다. 
    
    작업행위도 그렇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인 타자와의 위화와 화해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과 미적 표출에 이르는 것. 그 결과를 나누면서 인식의 열린 지평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 작업이라는 심장의 울림, 그 즐거운 고통의 굴레에 평생 갇힐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를 증명해야 하는 '형상회화'는 작가의 개별서사로부터 확장되는 주제를 이끌어내야 하는 형식으로 인해 더 그렇다. 대상성을 넘어서는 수사와 상징으로, 고양된 미적 형식과 지향적 메시지를 어떻게 도출해내는가에 따라 그 가치와 소통의 질은 달라진다. 
     
    그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시각언어의 내밀한 상징성에 따른 타자와의 해석의 오차는 오히려 작가를 작업으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작업과정에서도 화두만 끊임없이 만지작거릴 뿐 좀처럼 결론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난이도 높은 과정이야말로, 살아내야만 이타에 이르는 삶처럼 작업행위의 근원적인 동력일 것이다.
    
    그 와중에 작업의 현재 지점을 확인하는 형식은, 발언의 깊이와 공감의 너비를 확장할 수 있는 주요한 미적 단서다. 태도가 주제를, 주제가 서사를, 서사가 형식을 선택하고, 다시 형식이 주제인 메시지를, 그리고 그 주제와 형식이 동시에 작가와 관객의 마음을 넘나드는 공감의 언어가 되기에 그렇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수공미디어인 회화가, 숱한 현대적 하이테크놀로지가 창궐하는 21세기에도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미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상징 언어의 민감함이 좀 더 깊숙하게 타자에게 각인될 수 있어서다. 형상회화는 작가의 내면, 작업의 형식, 타자와의 소통과정 모두 그런 구조에 가장 기민하게 적응하면서 메시지를 송·수신한다. 때로는 선명한 발언으로, 또 때로는 은밀한 비유나 속삭임으로. 소리치거나, 말하거나, 독백이거나, 방백이거나… 
    
    2. 이번 『최경선-生·물』은 베이징에 거주한 2006년부터 2012년까지의 작품과 2013년 귀국이후부터 2019년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이란 소재가 견인한 회화작품으로 구성된다. 물의 의미론적 현실과 조우한 그때, 올림픽을 전후한 당시 베이징은, 최경선이 작품주제와 형식을 착상하고 발견한 시공간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다. 물의 부재/실재라는 현상을 일상에서 존재론적으로 체험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작품으로 옮긴 현장이자, 당시 작가 내면이나 베이징의 분위기와 시대상이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서사적·공간적 배경이 되어서 그렇기도 하고. 
     
    1부 「양생(養生)」은 「워터링Watering」이란 명제의 2007-2008년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다. 작가는 관찰자 시점에서 인공으로 물을 공급하는 성인 어른을 그렸다. 2007년 베이징에서 최경선이 실제로 보고 관찰했던 소재다. 당시 30대 중반인 자신의 실존을 투사한 내용도 된다. 2부는「기화(氣化)」라는 타이틀로 2012년 「빈 집」연작에 초점을 맞췄다. 변두리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서, 유년기 자신의 결핍을 보고 그들에게 공감(empathy)하는 대자적 시선이다. 3부「치유(治癒)」는 2013년 귀국이후의 작업인 「비오톱biotope의 저녁」이란 일련의 작업들로, 작가가 희구하고 지향하는 세계를 형상화했다. 풍부한 습지에서 운디네(Undine)처럼 빛나는 아이들의 풍요로운 생명성에 위로를 받는 내용이다. 모두 물이 소재이고, 그 물은 최경선의 작업주제에 이르는 핵심 기제다. 
    물은 생명의 시원에 관한 원형적(Archetype) 기호(記號, Symbol)다. 대지와 함께 여성성의 대표적 표지이기도 하다. 최경선에게 있어서는 주제를 향하는 상징적 코드다. 베이징 도심(양생)과 외곽(기화), 그리고 안락한 서식지(치유)에서의 경험적 서사들의 변주와 전복을 통해, 독자적 언술과 시각적인 형상성을 도출해내는 키포인트이기도 하고. 물이 어떻게 표현되고 작용되었든 간에 화면의 형상들은 최경선이 직접 체험한 일상사로부터의 귀납적 진술이며, 거기에 최경선의 직관과 사유가 더해져서 회화적 상징으로 연역된 것이다. 따라서 물은, 최경선의 현재 세계에 대한 관찰-내면(혹은 기억)-서사적 진술-표현이 통일된 영감의 에너지원(原)이고, 그녀 스스로를 정화하는 작업의 단서도 된다. 
    
    양생(養生)-성찰의 시작 
    
    양생의 주축은 「Watering」연작이다. 세상의 소금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의 고립을 관찰하는 작가가, 그 대상에 이입되는 현상을 그렸다. 베이징 체류 초기, 긴 도보산책 중에 경험했던 일일게다. 
    
    화면엔 잿빛 대낮의 건축현장에서 홀로 물을 뿌리는 사내가 등장한다. 양생을 하는 인부다. 양생.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면서 더 단단하게 굳도록 만드는 건축과정이다. 양생이 부실하면 시멘트가 빨리 갈라지거나 부스러진다. 견고한 고체화를 위해 물을 공급 한다는 건 뭔가 이율배반적이지만, 물로 인해서 시멘트가 더 강하게 응고되는 건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 양생은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질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 평소 양생이나 섭생을 게을리 하면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림"이라고 한방에서는 정의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물이 양생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러니까 물을 주는 양생은, 사물은 단단하게 만들고 사람이나 생물은 힘차게 생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현상이란 뜻이다. 헌신과 희생을 담보로 한 부모의 사랑이 먼저 떠오른다.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자에게 "가 없이" 주는 행위는 그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뜻도 되겠다.  「Watering」 연작에서 물은 그런 양생의 알레고리이자 형상성의 상징질료다. 사내가 물을 뿌리고, 바닥엔 그 물이 질펀하게 고이거나 흐른다. 또 물은 구멍을 통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을 뿌리는 행위가 끝없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드넓은 건축현장과 대비되는 작은 주인공을 보면 이 노동이 마치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지루하고도 지난한 반복행위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불을 훔쳐온 프로메테우스의 고난의 서사도 겹쳐진다. 그러나 현재 이 그림의 주인공은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는 일용직 인부일 뿐이지 신화속의 영웅이 아니다. 왜소해져버린 우리시대 신화를 대체한 현실의 프로메테우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희생의 숭고함과 궁핍한 가장(家長)의 양면적 캐릭터다. 
    
    그 가장은 가끔씩 시멘트 바닥 사이로 난 핑크색 거대한 구멍(Hall)에도 물을 뿌린다. 허탈한 행위다. 물은 아래층으로 낙하한다. 넓은 표면에 광범위하게 수평을 이루던 물이 수직으로 날카롭게 떨어질 때, 양생으로부터 절망으로 변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지켜보는 최경선의 의식을 두드리고 깨우는 현상으로 역전된다. 화면내의 모델이 화면바깥 작가에게 반성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당연히 충격이 동반된다.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김수영의 폭포처럼 물의 액티브한 파열의 맛은 회화적 쾌감과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증폭시킨다. 
     
    이 시기 최경선 작업의 매력은 양생하는 사람을 응시하는 자신의 관찰자적 시선과 함께, 이런 붓질에 의한 "나태(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는 듯한 회화적 표현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을 편히 두지 않은 채 깨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분열적인 노동을 하는 그 인부와, 그림을 그리는 자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존재론적 화두를 잡고서 말이다. 고독하게 물 뿌리는 회색의 사람은 작업실에서 그리기에 몰두한 작가 자신이 투사된 인물이며, 그의 '희생/절망'의 양면성은 작업이 타자들에게 양생의 기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하는 작가자신의 상황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양생을 소재로 한 이 시기의 작업은, 아직 베이징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본인의 작가적 입장과 일상적 삶의 간극에 대한 자기성찰과 반성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기화氣化-공감의 에너지 땅거미 지는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은 「풀 자라는 집」과 「For Your Best House」와 같은 역설적인 카피의 간판이나, 「Return Sweet Home」 같은 변두리 「빈집 앞」, 「검은 길」에 접한 폐가, 폐 공장, 「겨울 집」, 철문 닫힌 유원지 근처 을씨년스런 잡초밭에서 삼삼오오 배회한다. 'Watering' 연작에서의 주인공의 퇴근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저녁나절이다. 기다림은 길고 아버지는 아직 귀가하지 않는다. 윤택한 가정은 언감생심, 부랑의 우울이 짙은 어둡고 칙칙하고 메마른 헤맴. 쓸쓸한 무채색조의 신산한 읊조림. 건조하고 창백하다.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라는 모 가수의 절창처럼, 그곳은 「길이 사라지려고 할 때」 다다른 아이들이 맞닥뜨린 막다른 장소다. 혹, 돌아갈 집이 있더라도 아직은 빈 집이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빈집은 "가엾은 내 사랑" 이 갇힌, 기형도 시인과 최경선의 유년의 기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서 작가는 그런 아이들에게 감정이입하고 공감하는 자신을 본다. 보호는커녕 방치된 그 아이들의 도저한 현실은 쓸쓸하다 못해 차라리 그로데스크한 연극처럼 두려움과 결핍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꿈같은 쉬르적 분위기가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성을 정밀하게 주조해낸다. 구상이 아닌 형상회화가 증폭할 수 있는 설정과 표현성으로. 
     
    이 기화 시리즈에서는 흘러내리는 듯 빽붓의 큰 필치로 화면전체를 가로지른, 말라버린 액체의 흔적이 까슬까슬하다. 저채도 안료의 얕은 두께감과 옅은 습성(濕性)의 말라버린 흔적만 남은 이곳은, 지금은 양생을 할 수 없는, 물이 고갈된 상황임을 암시한다. 물이 있더라도 「검은 물」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이변이거나, 외등이 켜진 「하얀 문」 앞일지언정 발목까지 물에 잠긴 아이들은 굳게 잠긴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암울함. 그리고 안타까움. 이곳이 아이들에겐 기껏 「Lost Paradise」에 지나지 않는 생명 부재, 불임의 땅, 디스토피아임은 자명하다. 
    
    그런 아이들의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확장한 게 「겨울 물놀이」다. 당시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으로, 청소년이 엄마를 살해한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했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예쁜 푸른색과 녹색의 물 바깥 지대의, 오염된 검은 물에서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물놀이하는 장면. 극한에 몰린 아이의 심리적 위기감에 자신의 안타까운 감성을 덧입히고 이입해서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화면은 어떤 따뜻함도 배제한 채 거리두기의 진술로만 구성되었다. 그 사건에 눈물을 더하기보다는, 냉랭하게 드러냄으로, 그림을 보는 어른관객들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듯이. 그래선지, 저 드라이한 화면이 최루성 분위기보다 더 슬프고도 무겁게 다가온다, 내겐. 
    
    부재는 욕망의 이음동의어다. 그러니까 이 건조한 빈집 연작에서의 물과 온기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물을 주고 싶은 최경선의 바램이 역설적으로 도드라진 현장성의 재현이다. 아이들과 동화하려는 의지와 함께 내면으로부터 이타에의 공감이 발생한 것이기도 하고. 타국에서 방치된 많은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이방인의 좌절감이 공감의 에너지로 기화하는 건, 결국 그의 그림에 반영된 내면의 정서와 문제의식에서다. 수분을 증발시키는 에너지처럼, 아이들과의 공감은 그림 바깥 현실에서는 가시적일 수 없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의 회화적 커멘터리가 베이징에 정착한 2012년 경 작업의 요체로 보인다. 
    「빈집」연작은 평론가 유희경이 비유한바 그 이미지가 '음화(陰畵 Negative picture)'에 가깝다. 사진을 인화하기 전 현상된 필름의 음양이 반전된 몽환적 이미지. 물론 최경선의 그림은 명암이 뒤바뀐 음화는 아니다. 절제된 무채색조로 인해 꿈속처럼 그 리얼리티는 낯섦(Strange)을 동반한다. 유화물감과 테레핀의 농도배합과 그 변주에 따른 다양한 수성의 느낌, 그리고 그런 물의 이미지를 포착하되 작가의 빠른 붓질과 질료를 구사하는 능숙한 몸의 반응이 두루 열려서 재현을 넘어서는 표현이 그 낯섦을 더 부추긴다. 정적인 폐허의 풍경으로 흡수되듯이 처리된 인물들의 사라질 듯한 화면처리는, 메마른 질료감으로 인해 더 유연한 동세로 이어진다. 아득하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로 마음이 따라간다. 
    
    거기에서 나는 올림픽을 전후한 베이징 변두리의 남루함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대리 체험한다. 동시에 그 화면과의 대면에서 발생하는 너무나 리얼하게 서걱이는 촉각적 경험으로 인해, 나의 실제 기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30년 전 서울올림픽에 때맞춘 재개발 붐, 변두리 주변부에서 남루한 보금자리조차 잃고 공권력에 의해 추방된 도시빈민들의 강제된 소외 말이다. 그래서 최경선의 저 낯선 '음화'는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리얼리티로 내게 전유된다. 시각과 촉감이 인식으로 진화하는 기억의 촉지감(觸知感)으로. 
    
    습생(濕生)-치유의 길 
     
    2013년 베이징에서 귀국한 최경선은 몇 년간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본인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제작한 건 주로 소품이었다. 북경의 드넓은 작업실에서의 대작에 비하면, 좁은 자택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다소 불편한 공간적 조건도 그 이유였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기에 제작한 「비오톱(Biotope)의 저녁」 연작은 이전의 배경공간에 비해 한결 풍요로운 물의 능동성을 반영한다. 비오톱은 생명(bio)+땅(topos)의 합성어다. 생명을 고양시키는 장소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그런 녹색의 우거진 숲, 풍부한 수량의 늪지와 같은 서식지에서의 습생은 평화롭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이들은 요정처럼 빛나고 생명은 원시림의 식물성으로 싱싱하다. 아팠던 자신의 몸과 정신, 그리고 타자들의 아픔도 함께 치유되기를 간구하는 시선이다. '양생'에서의 가장이, '기화'에서의 기다리던 아이들과 함께, 물과 나무들과 함께하는 풍요로운 서식처 비오톱에서 '습생'의 치유를 하는 스토리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런 작가의 희구에 의해 구성된 아이들의 맑은 생명성엔, 동시에 아픈 슬픔도 녹아있다. 이 시기 세월호를 겪으며 절망했던 작가의 모성은 아이들을 더 빛나는 요정으로 이미지화 했다. 그 아이들을 통해서 상처의 고통과 순수를 함께 아우르며 모두의 회복을 희망하는 경건함은 「물고기 1, 2, 3」이나 「수레국화」에서 싱싱한 생명성의 군더더기 없는 체현과 미적 성취를 이룬다. 
    
    앞서 말했던 바, 「Watering」이 작가가 성인의 실존적 세계를 '관찰'하는 시선이라면, 「빈 집」은 변두리를 부랑하는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이입'되는 공감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오톱」에 이르면 아이/어른, 자아/타자, 타자/타자 간 개체의 차이를 넘어서서 함께 누리는 이상적인 생명성에 대한 작가의 희구로, 또 「치유」에의 의지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물의 치유 이미지는, 그러나 앞서 이미 베이징 시기의 작품에서도 있었다. 도심의 짜증을 날려버릴 듯 화면 중앙으로 난데없이 쏟아지며 돌올된 물 폭풍 장면. 서사를 생략한 비현실적 상상이었다. 「Washing」이란 2010년도 작품. 당시 작가의 내면이 얼마나 시원한 물을 갈구했는지, 그리고 작업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위무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바로 이 감각적 쾌감의 해방감은 귀국한 이후 「비오톱」시리즈의 능동적 생명성으로 연결된다. 현실에 바탕한 형상도, 작가의 기원이 변형된 상상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주제로 소급되었다. 치유를 주제로 한 「비오톱」시리즈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비오톱」연작의 전후로 진행된 작가의 긴 작업궤적과 호흡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구체적 서사를 생략한 이런 상상은, 현실성을 결여한 채 자신이 처한 억압이나 굴레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적 판타지의 도해 내지는 관념의 도상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화의 리얼리티는, 발언하고자 하는 주제의 필연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적인 기원과 바람이라는 환영을 그렸을지라도, 그 바탕인 현실적 서사·인간적 사유·작가적 표현의 진지한 추구는, 이렇게 제시된 내용의 개연성을 필연성으로, 또 현실성으로 재 맥락화시켜 준다. 이 작품에서 형상성이 일견 관념적이면서도 그런 관념의 틀을 넘어서는 실재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실에서 조우한 서사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지향하는 세계를 향한 감성으로 변주하고, 마침내는 몸의 행위와 질료의 반응으로 회화적 필연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에 대한 적합한 서술이 지난 2017년 그의 개인전 서문에 요약되어있다. 
     
    "최경선은 순례자의 눈을 지닌 화가다. 길 위의 순례자는 항상 낮은 곳에서 진실을 찾으며 주변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의미를 성찰하여 진리로 나아가는 이정표로 삼는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그것을 둘러싼 시공간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시켜, 그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적 의미를 감각의 영역에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김문정, '순례적 공간의 더께와 빛' 중에서) 
     
    순례자의 눈을 지닌 화가이자 사람, 공감한다. 최경선의 회화는 그 순례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내면은 순례의 과정에서 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자 공감의 보고서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형상회화로 연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낮은 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관계의 의미를 찾는 순례자란 비유는, 그래서 작가 최경선에게 적절하다. 
    
    3. 최경선의 그림에 드리운 타자들과의 체험적 일상서사가 심리적인 형상으로 전치되는 과정은 주체와 타자의 성격을 버무린 어법으로부터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분명한 캐릭터로 묘사되지 않고, 익명으로 분위기와 상황에 녹아든다. 물을 뿌리는 성인 남자, 변두리를 헤매는 아이들, 기타의 인물들 모두 일상에서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나, 동시에 그들에게 투사된 작가자신이다. 작가와 타자, 서로 다른 성격의 중첩으로 인해 화면의 인물은 익명으로 그 성격이 모호해진 것이다. 이목구비와 표정의 생략, 반복된 단순한 복장의 유사성으로 인해 몰개성적이기도 하다. 제스처와 동작만이 남은 그 인체에 자아를 투사하는 작가의 행위는, 결국 타자에 공감한 주체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혹은 타자의 특정한 행위에 대한 의식적인 동질감의 드러냄이기도 하고. 
    
    최경선의 화면에서 감성은 타자에 대한 '연민'을, 인식은 그를 통한 '연대감'을 이끌어 낸다. 그 연민과 연대감을 통해서 작가는 타자와 공감하게 되고, 비로소 자기 내부에 응축된 기억이나 무의식적 상처와 같은 삶의 편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응시는 의지와 인식을 단서로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의식적 시선이나 주체를 비운 채 바라보는 관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타자와의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 응시를 통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응대와 환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보듬고 트라우마도 치유하게 된다. 스스로 성숙해지고, 스스로를 살아내게끔 이끄는 것으로 작업을 통해 축적된 힘이 현실에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생명활동이다. 더불어 그런 작품과 함께한 또 다른 타자에게 그런 힘은 전유된다. 진실된 과정이 이끌어내는 능동성. 미술은 그런 것이다. 작가의 표현이란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이란 사회적 가치도 동시에 지향한다. 
    작품의 소통이란 그런 건가 보다. 긴 시간 그 도저했던 그의 작업궤적이 내겐 미적 쾌감으로 전유되어 남았으니, 작품을 통한 그와 나는 공감의 동지다. 내가 그의 작품에 공감하듯, 최경선도 그의 그림에 소재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공감했다. 타자에 대한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작업을 통한 정서가 내게(또 다른 관객에게) 이입되고 공유되는 것, 그게 바로 미술이 아니겠는가. 각자가 자유로운 사람들이 그런 공존의 감성공동체, 인식공동체를 만드는 게 미술의 역할 아닐까. 
    
    4. 회화적 상징은 대상의 재현 체계에 기반 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회화에선 일정부분은 그런 부호나 심볼과 같은 요소가 상호 서술적 연계로 그 내용을 드러냈지만, 현대회화에선 텍스트와 해석학의 관계처럼 기표와 기의는 다른 위치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파수를 맞추거나 비끼어가며 작동한다. 형상회화는 이런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수용하고 또 탈주한다. 고정되지 않은 체계라는 것. 작가가 설정한 요소들을 선택해서 조형화함으로써 지시언어적 구조로부터도, 연극성이나 사물성이라는 강박으로부터도, 시공간적 조건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다만 서사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어법으로 형상적 주제와 메시지를 발신해야하는 형식은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이다.  
    
    작가는 평소에 자신의 작업내용이나 형식을 생각하거나, 그 내용에 맞는 소재들을 찾거나,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 추구하는 주제와, 거기에 합당한 단서인 자신의 감정과, 이념과, 지향성과, 체질과, 형상문법, 매체개념, 동시대성 등을 버무려서 어떻게 자기형식으로 연결할지 모색을 한다. 그런 과정의 출발점인 서사는 작업의 화두를 풀어내는 시작점이다. 그 다음으로 그리기라는 물리적이고도 현상적인 몸의 체현이 있다. 실질적 제작과정이다. 형상회화도 여타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종이나 캔버스와 같은 바탕(Plate)에 가하는 작가의 몸짓을 수용하는 예민한 촉감이 필요하다. 붓질의 느낌과 맛, 바탕에 스미거나 붙는 질료, 그 접점에서의 표현적·미적 쾌감이 작업의 운행을 더욱더 예민하게 만드니까. 이때 집중은 깊고, 그것은 삼매의 경지처럼 작가의 몸과 마음과 질료를 물아일여(物我一如)의 몰입상태로 이끈다. 
    이런 흐름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긴장도를 유지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라도, 상황·시기·환경 등에 따라서 그림의 분위기나 표현은 변한다. 그림을 통해서 당시 작가가 처한 상황이나 생각의 역추적이 가능한 이유다. 그만큼 회화는 작가의 몸과 마음이 물질인 안료와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서사로부터 표현에 이르는 여러 형식조건들을 아우르면서도, 메시지를 드러내야만 하는 형상회화는 더욱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전체과정을 아우르고 장악해야 한다. 이야기나 서술이 아닌 묵언의 형상성으로 상징화하는 지향성의 세계. 거기에서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발생하고 또 타자에게 그 진심이 전달되는 것이다. 
    최경선의 형상언어가 독자적인 스타일로 진행되어온 지난 시간은, 그런 메시지의 발신/수신의 토대인 공감과 연대가 진화해온 궤적이었다. 그는 뚝심과 집중력으로 이런 과정을 일관되게 이끌어냈다. 탄탄한 표현력에,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과 작업내용을 관통해서 성찰하는 힘까지 지녔음은, 작가로서 분명한 장점이다. 그러나 더 큰 장점은, 회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론적 지향점을 인식하고, 그 세계를 말하려는 형상적 태도다. 그의 그림에 진지한 힘이 실려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더불어 자신을 진솔하게 실어내면서도 그 중량에 함몰되지 않고, 작업내용과 거리두기도 할 수 있는 모던한 태도 또한 그의 내공이다. 작업에 관한 한 그는 백면서생처럼 여리게 보이나, 사실은 힘을 빼고 공력을 시전 할 수 있는 고수에 다름 아니다. 
    
    김진하			
    ※ 아트맵에 등록된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팸플릿 신청
    *신청 내역은 마이페이지 - 팸플릿 신청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6부 이상 신청시 상단의 고객센터로 문의 바랍니다.
    확인
    공유하기
    Naver Facebook Kakao story URL 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