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ARTIST
정보수정요청
추종완
Choo Jong wan
회화     |     대한민국
학력
1999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서양화과 졸업 2004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서양화과 대학원 졸업 2011 영남대학교 디자인미술대학 미술디자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4~ 현 영남대학교 디자인미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이력
개인전 2022 great Legacy, cmgg LOUNGE, 서울 Great Legacy, 보나갤러리, 대구 2021 Great Legacy, 공간독립, 대구 2019 갤러리 오늘, 대구 갤러리 움, 영천 2018 봉산문화회관, 대구 2017 봉산문화회관, 대구 2015 봉산문화회관, 대구 2014 "The Diminished Virtue"뉴욕, 미국 2012 봉산문화회관, 대구 2011 분도 갤러리, 대구 2009 “하정웅 청년작가 초대전”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08 소미갤러리, 서울 2008 일상의 탈(脫), 갤러리 예술사랑, 대구 2006 맥향화랑, 대구 2005 올해의 청년작가초대전”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05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05”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04 한기숙갤러리, 대구 2002 Space129, 대구 1998 영남대학교 아트스페이스, 경산 단체전 2019 보통의 거짓말 (석파정 서울미술관, 서울) 2018 7가지 사유의 시선 (인사아트 스페이스, 서울) 행복북구문화재단 기획전시 “VISION” (어울아트센터 갤러리 금호, 대구) 2015 Art Miami New York (뉴욕, 미국) “Fly to me"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2014 Art Hamptons 7th ART FAIR (뉴욕, 미국) 2013 “몸의 현재”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국제아트페어 “아트 광주13” (DJ센터, 광주) “Past and Post” (Utopia 갤러리, 상하이, 중국) 2012 “The Power"전 (한기숙 갤러리, 대구) 2011 "Korea tomorrow" (예술의전당, 서울) 2010 “현실원칙”전 (대안공간 충정각, 서울) “하정웅 청년작가 초대전 빛2010” 10주년 기념전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역대 오늘의 청년작가”전, 20주년 기념전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형식을 넘어선 형식”전 (Form갤러리, 부산) 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 (갤러리 loft-H, COEX, 서울) 2009 Nord ART 2009 KiC ACO GmbH국제전시회 (KiC국제전시관, 뷰델스도르프, 독일) 코리안 아이 "Moon Generation" (사치갤러리, 런던, 영국) "ARTIST FILE 2009, Only One" (소헌갤러리, 대구) 이방인의 빈방-한국 "그늘의 테두리" (Kunstdoc Gallery, 서울) 신세계 센텀시티 오픈 기념전 "지금 우리"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부산) “The Show must go on"(갤러리 이마주,COEX,서울) 2008 Nord ART 2008 KiC ACO GmbH 국제전시회 (KiC국제전시관, 뷰델스도르프, 독일) "Young & Beautiful" (Gallery Somi, 서울) Art in Daegu 2008 «이미지의 반란» (KT&G 별관창고, 대구) 2007 Grosse Kunstausstellung 2007 (Vila kobe, 쿤스트할레 e.V,Halle(Saale),독일) Art in Daegu 2007 분지의 바람 (삼덕맨션 일대, 대구) 대구미술 아우르기-젊은 그들 삶의 표상 (수성아트피아, 대구)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Art Lovers전 (대구MBC 갤러리 M, 대구) 작업실 들여다보기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四人4色전" (맥향화랑, 대구) 새로움의 물결展 (북구문화예술회관 전시실 ,대구) 2006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문화예술회관, 대구) 아트인 시티 2006대구성서공단 공공미술프로젝트 Art in Ansan 2006 서해-Belt 전 (안산문화예술의 전당, 안산) 가야세계문화축전 2006 "Going Public-가야에서 꿈꾸다" (대성동 고분군, 김해) 서울아트페어-특별전 "2006Best Top10 전" (예술의 전당, 서울) 한국국제아트페어 2006 (COEX, 서울) 네비게이트-항해하다 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2005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05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ART COLOGNE 쾰른 아트페어 2005 (쾰른, 독일) 화랑미술제 2005 (예술의 전당, 서울) 한국 국제 아트페어 2005 (COEX, 서울) 제2회 중국 국제 화랑 박람회 (중국국제무역센터, 북경, 중국) 4th 젊은 작가전(대구MBC 갤러리 M, 대구) 현대미술제 (나가사키, 일본) 2004 ARTINORI 재개관전 (ARTINORI, 부산) Art Synthe전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여름전람회 (장애인복지회관, 대구) 동시대미술의 섬(SUM)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2003 CH14-人에 대한 이야기 (문화예술회관, 대구) Space129 ․803 Project Relation (Space129/803, 대구) 몸, 물질, 공간展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 대구아트엑스포 특별전 "New Image Artists" (대구컨벤션센터) 뉴프론티어展 (문화예술회관, 대구) 現代美術 5人展 (Space129, 대구) 2002 ‘시선, 멈춤 그 후’展 (엄태익 갤러리, 부산) 몸에 관한 사색 展 (문화예술회관, 대구) 人間+形 (ARTINORI, 부산) Art Synthe 展 (문화예술회관, 대구) 2001 GUERRILLA 전 (L-Side갤러리, 대구) 1999 1+N 전 (대안공간 섬, 부산)
수상경력
올해의 청년작가상2005 대구문화예술회관 하정웅 청년작가상2009 광주시립미술관 작품소장 국립현대박물관,Seoul Loft-H 갤러리,Seoul SHIN Gallery,Newyork Kort Jens-Uwe,Germany 대구문화예술회관 프라자안과,Daegu 그외 기관다수 개인 소장
*안규식- 현대인의 왜곡된 초상, '脫'을 통한 초극 고대로부터 인간의 육체는 그 무한한 표현가능성 때문에 많은 미술가들의 탐구 대상이 되어왔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각 시대마다 반영된 인체의 특성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체는 어느 특정한 시대를 해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써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 하에 추종완의 작업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위기감, 곧 개인의 존재론적 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추종완은 학부시절부터 자신의 작업에서 인체에 대한 일종의 집착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그 표정을 통해 감정이입을 추구하는 전통적 의미의 인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체는 지나친 왜곡과 기괴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인상은 형상의 파괴적인 형태와 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흑백의 간결한 색 대조에서 비롯된다. 그의 인체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공포와 폭력의 흔적들은 인간의 끔직한 잔학성에 전율을 느끼게 하거나 극심한 내적 고통의 아픔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뭉크의 판화나 베이컨의 고깃덩이로 표현된 인체에서 보듯이 현대미술에 올수록 그러한 표현들이 증가된다는 사실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는 문명의 진보과정이 수반한 성장 통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선 그의 인체는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웅크려 앉은 채 무언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손과 발의 표정은 웅변적이기까지 하지만 그 대화는 불완전한 인체의 형상 때문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마치 포탄에 폭격당한 듯 한 상반신과 생략된 얼굴이 전체의 형상을 기괴하게 만들어서 몸 전체의 메시지보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편 분해된 상반신의 조각들은 종이 혹은 천 조각처럼 공중을 부유하고 있어서 직접적인 기괴함은 덜 느껴진다. 또한 상․하반신의 격리로 인체의 형상은 하나로써 인지할 수 없기에 그러한 잔인함은 더 감쇄되며, 전체적인 풍경속의 형상들이 현실을 초월해 있는 비현실적 대상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는 수단으로서의 입과, 말의 내용을 만드는 뇌, 심장을 이미 상실한 인체,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실존은 부재하고, 사회적 시스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만 남은 비주체적 모습으로서의 현대인, 작가는 이 두 대상을 오버랩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찰리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표현했듯이, 기계부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키려고 자신이 만든 껍질 속으로 숨어드는 나약함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상반신과 하반신의 묘한 대조이다. 폭격당한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상반신은 우리의 혹은 작가 자신의 인격에 덥힌 가식적인 외피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이 상황을 벗어나고픈 작가 자신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반면 구체적으로 묘사된 팔과 다리는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수동적 객체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며 여기엔 잔해의 흔적이 없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몸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각성의 매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양자 간의 이 현격한 이격(離隔)은 원만한 타협에 실패한 그리하여 결국 격심한 정체감의 혼란이나 정신적 고통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감을 잘 예시하고 있다. 그래서 기괴함으로 가득 찬 전체 풍경에는 잔인함이나 공포의 인상보다는 요동치는 내면의 갈등, 혹은 자기비판에 대한 신랄함이 배여난다. *김영동(미술평론가) 추종완의 《탈(脫)》연작 시리즈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인체의 형상들은 관객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는다. 한번 보면 지우기 힘들만큼 자극적인 이미지들이다. 그 강렬한 인상은 필치나 색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상의 의외로 파괴적인 형태에서 비롯된다. 인체는 다른 사물의 형태들에서보다도 특히 왜곡되거나 훼손되면 우리의 정서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있다. 신체 이미지에 새겨진 가혹한 폭력과 학대의 흔적들은 인간의 끔직한 잔학성에 전율을 느끼게 하거나 극심한 내적 고통의 아픔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미술에 올수록 그러한 표현이 증가 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게 작가들은 신체의 이미지를 통해 매우 실존적이고 심리적인 질문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의 취급에로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추종완의 경우 주로 앉아 있거나 웅크린 자세의 남성 누드의 모습을 상반신은 표현되지 않고 심하게 주름진 은폐물로 가려진체로 그려낸다. 종이나 섬유처럼 얇은 겉껍질 또는 덧씌운 보로 대체된 상반신은 마구 짓이겨 구겨진 천으로 덮은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 사실적인 나머지 사지묘사와 연결되어 있는 불합리한 연장 상태를 취하고 있다. 사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막 파열을 겪고 난 뒤 잔해의 모습이라고 할지. 이와 같은 인물상들이 때로는 복수로 군집을 이루기도 하고 실제의 거푸집처럼 제작되어 설치되기도 한다. 다양한 동작의 형상들이 실루엣처럼 평면적인 이미지로 바뀌어 공중에 부유하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고 입체적인 조형물로 제작한 오브제들과 연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변주들로 이어져간다. 짓이겨지듯 구겨진 인체의 상부 묘사는 광포하게 학대당한 참상의 느낌마저 전달한다. 그러나 그 파괴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체의 살(肉)을 직접적으로 훼손시킨 느낌이 아니라 마치 탈피 후의 껍질이거나 조각의 부스러기와 같은 무기질의 느낌이어서 엽기적인 잔인함은 오히려 덜하다. 그것은 사지의 사실적인 묘사와 상부의 심하게 구겨진 주름 형상의 은폐물 부분의 극단적이 대조가 그의 그림에서 인체의 유기적인 전체상을 상상하는데 방해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채색의 흑백 톤도 재현적인 사실감을 어느 정도 가로막고 비현실적 환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탓도 있다. 그래서 신체적 감각에서 일어나는 직접적인 전율을 느끼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떨어져서 목격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일종의 반성을 위한 거리감을 내어준다고 할까. 작가는 우리의 혹은 자신의 인격을 덮고 있는 가식적인 외피를 의식한 듯하다. 그의 인체 형상은 그래서 외부로부터 감각을 지각하는 몸이라기보다는 내부의 의식을 담고 있는 용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페르소나(가면, 외부적 태도), 혹은 융의 용어로 말하면 팽창된 정신의 상징인 것이다. 그 외각 속에는 또 다른 자아, 의식의 숨겨진 측면인 그림자(Shadow)가 들어있다. 그 양자간에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인격은 결국 격심한 정체감의 혼란이나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마침내 파열되고야 말 것 같은 가식과 허위의식의 군상들이 괴기스럽고 공포스런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바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 삶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잔인함이나 공포의 인상보다는 격렬한 내면의 갈등, 신랄한 자기비판의 감정을 느낀다. 어떻게 그 단단한 외각을 벗어던지는 찬란한 탈(脫)이 가능한지 묻는다. *조 은 정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껍데기를 벗고서 - 추종완은 껍질만 남은 몸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제시한다. “몸”이란 장소에서 벗어나 시공을 넘나드는 감정은 자유로움보다는 방황과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의 이성과 정신에 중점을 두는 것에서 몸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지만 작가는 정신과 몸 중 그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더 두지 않는다. 그는 가벼운 정신 뿐 아니라 정신이 떠나 껍질만 남은 몸도 외면한다, 그러나 몸을 벗어난 감정은 램프의 요정이 램프에서 벗어난 뒤 다시 돌아가기 싫어하듯 세상을 떠돌고, 의지가 없는 조형물에 불과한 속빈 외피는 인간의 정신성을 비웃듯 갖가지 포즈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 옥 렬 (독립큐레이터) 추종완의 작업은 인간의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 몸은 나의 전부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몸의 어떤 면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말한다. 몸은 늘 철학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제 몸은 소외를 벗어나 중심에 놓임으로서 소통의 주체로 다시 태어났다. 이렇게 태어난 몸은 현대미술의 실험실이자 전쟁터가 되고 있다. 때론 인간적 모습이나 정신적 이상을 담아 내는 그릇으로 혹은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잡종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시대의 실험실이 되고 있다. 추종완이 생각하는 몸에 대한 단상은 몸의 긍정을 강조하기 위해 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실한 인간성 회복을 역설한다. 이는 그가 몸과 정신의 관계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성의 회복은 곧 몸의 회복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대인의 가식과 위선의 이중성을 비판하기 위해 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비닐을 뒤집어 쓴 혹은 일회용처럼 버려지는 얼굴 군상에서 최근작인 <脫>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오브제는 버려져야 할 몸이 아닌, 채워져야 할 몸의 역설을 담는다. 이러한 역설은 몸의 양면성에서 기인한다. 몸은 삶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기에 더욱 그렇다. 머리가 없는(머리뿐 아니라, 몸도 비어있는) 몸의 군상에서 허상으로 가득한 인간의 모습을 해체하는 것은 그의 존재론적 시각이 깔려있음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실존적 삶의 가능성은 몸을 주체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종완이 드러내는 몸의 반성에서는 인간다운 몸을 향한 인간성의 회복에 있지 않을까. *김용민 (독립큐레이터) 추종완_ 고독한 존재 고독한 존재는 어둠 속에서 난다. 팔과 다리만 남은 채 모든 것이 검은 날개가 되어 흩어지려 한다. 실체를 버리고 의미를 놓았다. 세상의 끝에 선 한 남자가 목격되고 바로 그 쓰러진 몸에 전율을 느꼈다. 감정은 흑암에 사로잡혀 머리를 날려 보냈고 지시할 곳 없이 그 자리에 털썩 살덩어리의 무거움을 놓았다. 입이 없어 말을 하지 못한다. 눈이 없어 볼 수가 없다. 머리가 없어 사고할 수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누가 나며 누가 남인지 바람 없는 자리에 훨훨 나는 살에 붙어 아우성 거린다. 그래도 그 남자는 갈색 눈을 가진 소박한 사람이었다. 삶과 자신의 작업에 솔직하고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며 몰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팔에 핏줄이 설 때, 열 마디의 말보다 더 강한 절규가 눈앞에 다가온다. 정녕 그것이 숙명이라 할지라도 작업의 무거움에서 가벼움을 찾아낼 것이다. 흑(black) 속에 내러티브가 둥그러져 있다. 그것을 보기에 구토가 나올 정도로 치밀하며 유연하였다.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형태와 명암이 내러티브를 요구하였다. 매우 신화적이다. 인간이 싸워야할 대상인 ‘인간이 아님’에 또한 ‘인간일 수밖에 없음’에 전율을 느끼며 비극으로 치닫는다. 오로지 여기 세계는 색을 잃어버린 배경이 방 안으로 몰리고 인체가 정물이 되어 난도질 그리고 살아났다. 흑연이 캔버스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압착되어 누적된다. 흑연 속에서 반사되는 빛이 시야에서 숨는다. 어느새 명암은 무게를 갖는 질료가 되어 있었고, 불쑥 튀어 나온 손과 발은 그것(질료로서 명암)이 표현하고자 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구겨진 신문지 더미서 남성과 여성이 응어리져 숨어 있다. 색은 여성의 것이요, 명암은 남성의 것이다. 그럼에도 형태는 모두가 남성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제 껍질을 벋고 보다 견고하게 정리되었다. 말을 타고 있는 남성, 말고삐를 끄는 한 아이, 그 사이를 잇는 붉게 젖은 끈. 양복을 입은 남성의 모습에서 붉게 젖은 넥타이가 등장한다. 또한 하이힐을 신고 망사 스타킹을 입은 남성의 형태가 붉게 젖은 치마를 입고 있다. 어쩌면 여성은 희망을 상징할 수도, 메이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복제되고 증식된 자기 혼자만의 관계가 아니다. 사회에서 파생된 부산물들과 부딪치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진화된 어둠의 조각난 구김들이 생명을 얻어 옷이 되었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손지갑과 같은 제품이 되었다. 시대는 더욱 복잡해졌지만 자신의 모습은 하나로 고착되었다. 그래도 옷을 입기 위하여 몸통이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심장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가장 먼 곳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다. 지금껏 고민해 온 것이 편집되고 콜라주가 되어 가장 적절한 형태를 갖추었다. 당연히 그림자는 없다. 손끝과 발끝, 저 먼 곳으로부터 머리로 엄습하여 머릿속으로 들어가 무대 위로 오른다는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디서 사는지 모른 어린아이의 손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는 말의 시선이 어색함 가운데 긴장되고 있다. 포탄에 맞아 얼굴이 터져버린 우리의 주인공이 저기 말 위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보고 있다. *하정화(미학,미술비평가) 자신 혹은 타인을 비추는 끔찍한 거울 오늘날 현대 미술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행위들은 국적불명의 혼종적 상상력을 펼치며, 자폐성, 과격성, 기괴함, 유별나고 툭툭 튀어 나오는 강박과 분열의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초현실적 환상적 이미지들로 때때로 상호소통이 불편하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추종완은 불편한 타자의 머나먼 상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실재를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전환하는 작업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간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상징하는 것은 그늘진 것, 중심이 아닌 주변, 둘레에 있는 것, 자기도 모르게 서로 얽히고 얽혀서 만들어낸 우리 영혼의 푸른 그늘이다. 우리 근현대의 비극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세계주의를 단순히 탐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아와 전통들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추종완의 작업들은 그간 우리가 외면하고 미루어 왔던 자아와의 투명한 대면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매개하는 잔인한 미디어이다. 그는 타자의 시선에 비친 발가벗은 자아의 끔찍한 이미지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문명인의 행위양식이란 미명하에 상실되는 원초적 순수성에 있다. 그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하나 같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은 빛나는 순수성을 잃어버린 대신 일그러진 채로 자족하는 현대인들, 경쟁자의 시선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간결하고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마치 거울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자신을 타자로 인식하는 충격적인 유체이탈의 체험이다. 그의 작업은 더 이상 순정한 판타지를 꿈 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족적 세계를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끔찍한 거울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추종완의 작업이 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으로 화면을 옮겨 간 것은 우리 삶의 절박성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다름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바로 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서 인간의 순수성의 가치가 쇠퇴하고 있는 상황을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게다가 정신적인 가치 보다 물질적인 가치가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와 세계주의가 가속화 되는 현실적 상황은 계속 이어질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은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보다 사실적으로 현대인의 자아 상실의 문제를 공유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그의 작업들은 일견 위기에 직면한 우리 삶의 진실을 시종일관 우울하게 하게 그려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아와의 투명한 대면을 요구하는 낙천적 매개물들이다. 퇴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 우리 속에 숨겨진 1%의 순수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윤규홍 (예술사회학) 추종완의 탈 脫 서양화가 추종완은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미술평단에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그는 이제 현대 미술의 중심이 된 영국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언급되고 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에 관해서 지금까지 여러 비평이 줄을 잇고 있다. 내가 본 평론은 모두 아홉 개지만(이 가운데에는 내가 썼던 글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고충환, 김영동, 김옥렬, 김용민, 안규식, 조은정, 하정화의 글, 그 밖에도 글쓴이 불명까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추종완의 작업에 이처럼 많은 평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만큼 전시경력이 누적되었다는 점, 둘째는 작업 방식과 주제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그의 회화나 입체 작업은 전체적으로 검은 색이 지배한다. 숯검정이라는 표현은 여기에 적당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다. 인물이라고 하는게 맞을까? 속이 텅 빈 흔적에 불과한데, 어찌 되었든. 그 인물들에 관한 여러 비평은 대부분 부정적인 언술로 채워져 있다. 그 단어나 표현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비극, 껍질만 남은 몸, 파괴적인 형태, 자아상실, 얼굴이 생략됨, 외피, 공포와 폭력, 끔찍한 거울, 폭격을 맞은 듯, 일그러짐, 훼손된 상반신과 멀쩡한 하반신의 대조, 정신과 육체의 괴리, 가식과 위선, 페르소나, 자기비판. 이렇다면 분명해진다. 추종완은 이러한 일련의 ‘나쁨’ 을 현존 속에 불러들이면서 인간성의 회복을 바랄 것이다. 순수함, 진실됨, 착함, 아름다움, 자기완성, 즉 전선미로 구축된 이상은 작품 너머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작가가 잔인한 폭력 묘사로 쾌락을 얻는 취미를 가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만약 그런 성향을 가졌다면 다 직접적이거나 사실적인 묘사를 했겠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재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으로 유려하게 마무리된다. 사실 이것은 적당히 윤리적이며, 영리한 선택이다. 숱한 전자 게임들 속에서 유저의 총을 맞고 부서지는 적들의 몸은 주검을 남기지 않고 이내 재가 되어 사라진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덧씌우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런 게임들과 다르게, 추종완의 미술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은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게임에서 희생당하는 목표물들은 악당, 적군, 외계 생명체 같은 타자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우리들, 자아일 수 있다. 이 자아는 애당초 헛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격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서로 다른 세계관의 창시자들은 후대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비판 이론으로 계승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일치되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에 허위 욕구(false needs)에 사로잡히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그림 속에서 얼굴이 사라져서 생겨난 익명성 혹은 무차별성은 사람들이 커다란 사회 속에서 자기의 희미한 정체성을 그들이 소비하는 물건의 값어치로 대리 보충하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명예도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는 마르쿠제의 근대성 비판은 한 술 더 떠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의해 모든 대상이 원래 쓰임새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호로만 작용하는 탈근대성 비판으로 과격해진다. 근대성이 재가 되어 덧없이 탈脫해버리지만 그 포스트 모던한 존재가 그렇다고 무無는 아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여러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여전히 사회적 존재이며, 추종완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형상이 남아있는 재현적 대상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반성적 태도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 화가 본인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따라서 현실이 강제하는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일기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일기는 다른 사람들이 읽을 것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둔 이중성을 가진다. 자신에게 몰두하면서 동시에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일기와 같이 그림그리기라는 행위가 전시로 이어져 남에게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미술의 숙명이다. 여기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 주제와 부딪혀 모순을 낳는다. 겉과 속이 일치할 수 없는 일기쓰기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통한 진실성의 지향?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점은 있다. 변증법으로의 탈주면 가능하다. 작가는 내면과 외관의 합일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상태를 꿈꾸며, 자신의 미술을 통해 그러한 꿈조차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현실에서 같이 벗어나자고 끝없이 부추긴다.
더 보기
작품
전시

Emergence

캔버스에 혼합매체

72 x 50 cm , 2017

Emergence

캔버스에 혼합매체

187 x 227 cm , 2017

Emergence

캔버스에 혼합매체

187 x 227 cm , 2017

Emergence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 x 159 cm , 2017

Emergence

캔버스에 혼합매체

291 x 182 cm , 2017

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

130 x 162cm , 2011

탈(脫)

혼합 매체

135 x 110cm , 2008

캔버스에 아크릴, 목탄, 연필

130.3 x 162.2cm , 2003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91x65.1cm , 2021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91x65.1cm , 2021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91x65.1cm , 2021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x33.3cm , 2021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x33.3cm , 2021

Great Legacy_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x33.3cm , 2021

Great Lagacy

Straw, Epoxy resin on canvas

90.9x65.1cm , 2022

Great Lagacy

Straw, Epoxy resin on canvas

34.8x27.3cm , 2022

Great Lagacy

Straw, Epoxy resin on canvas

34.8x27.3cm , 2022

Great Lagacy

Straw, Epoxy resin on canvas

34.8x27.3cm , 2022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

Great Lagacy_Plastic bag

Plastic bag, Epoxy resin on canvas

53 x 33.3cm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