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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이승훈 : 만들어라 MAKE
기간| 2021.09.02 - 2021.09.29
시간| 화–토 10:00 – 18:00 *수 10:00 - 21:00
장소| OCI 미술관/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휴관| 일, 월,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4-044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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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출처= OCI미술관)
  • 			유령 같은 시간의 잔상을 재생시키기
    
    OLED, QLED 등 스스로 발광하는 디지털 평면 디스플레이의 눈부신 진화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감을 선사한다. 우중충한 현실보다 더 이상적인 현실상을 반짝이는 스크린 위에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좀 더 선명하고, 좀 더 찬란하고, 좀 더 매끄러운 움직임이 구현되는 가상의 스크린 위로 ‘기술나라의 푸른꽃’은 그렇게 손에 바로 잡힐 듯하다.
     
    동시대 미술에서도 생생한 현실감과 자연스러움을 장착한 디지털 아트의 기술적 역량은 갈수록 그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작품의 지향점이나 기술적 매체는 각각 다르지만 몰입감 있는 환영적 세계, 나아가 증강 현실을 열어주는 많은 작업들이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실을 잠시 구멍 내는 희열이야말로 예술에게 대중이 가장 기대하는 역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4차 혁명’ 이후 등장한 또 다른 깃발처럼 휘날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현실이라는 물리적 ‘유니버스’를 초과한 세계를 살아내고 있다. 우리는(대개 도시에 거주한다고 치자.) 온통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확인하는 스마트폰 액정부터 TV, 컴퓨터 모니터, 그리고 광고 전광판들… 버스 안이나, 거리나, 집 안 어디에서도 디지털 디스플레이로부터 도망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 스크린들에는 언제나 내 곁의 사물들보다 더 찬란하고 완벽한 형상들이 넘쳐난다. 오히려 우리는 이 완벽하지 않은 현실의 사물과 인물을 완벽해보이게 만드는 애플리케이션과 장치들로 보정하고 매끈하게 만들어 온라인에 디스플레이한다.
     
    이승훈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업은 그러한 광학적 디스플레이를 일종의 통로로 삼되, 현실적인 감각의 증강과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 우리가 미술사에서 알고 있는 초현실주의가 현실을 초월하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의 재현이나 환상과는 정반대이듯이, 이승훈의 디스플레이는 현실보다 더 매끈한 디지털 환영을 오히려 삐걱거리고 울퉁불퉁한 매질로 변형시킨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순간 메렛 오펜하임의 가 떠올랐다. 모피로 만들어진 찻잔과 티스푼은 따스하고 매끄러운 유기질의 감촉을 떠올리려는 찰나, 그 환기된 정서를 불쾌하고 난감하게 뒤집어버린다. 이승훈의 작업은 ‘오브제’가 아니고 디지털 평면 회화지만, 오펜하임의 찻잔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감각을 거스르는 반항적 텍스처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그의 애니메이션 회화는 디지털 디스플레이에서 으레 기대하는 매끈하고 환영적인 이미지, 현실보다 더욱 실감나는, ‘자연스러움’을 자랑하며 ‘살아나는animated’ 이미지를 배반한다. 메렛 오펜하임의 찻잔은 일종의 농담이면서 무의식 속에 각인된 그 무엇이 뒤집혀 나오는 언캐니한 사물이며 현실 이미지의 배후를 열어보이는 촉매제다. 이승훈의 작업에서 분절되고 이상하게 확대되고, 반복적으로 삐걱거리는 인물, 사물, 동물, 식물들의 형상 또한 희미한 (불)쾌를 불러일으킨다. 거기엔 은밀한 농담의 뉘앙스 또한 깃들어 있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는 “디지털 평면에서 일종의 시간의 원근법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그림에서 원근법이 철저히 깨져있다는 점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또 애니메이션이지만 서사 구조가 없을 뿐 아니라 루프되는 짧은 장면에서조차 세부적으로 생산되는 의미, 혹은 이야기가 거의 없다. 본디 투시 원근법은 서사의 한 장면을 구현하는 데 탁월한 재현 기법이다. 대략 콰트로첸토 시기부터 시작된 원근법적 회화들은 흐르는 이야기가 일시 정지한 한 장면으로서, 우리는 그 한 장면으로부터 캐릭터, 이야기, 역사, 신화라는 장대한 총체를 환기한다. 하지만 또 해체적이고 탈원근법적인 그림은 현대 회화가 지닌 패러다임이라 이 그림이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재생된다 한들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유독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특히 여성의 형상들)이 너무 줌인되어 있거나, 비율이나 그리드가 맞지 않고 다소 음침한 왜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업들은 분명 애니메이션이지만 동작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인물의 피부든 옷의 광택이든 식물, 사물의 표면이든 경련 같은 미세한 움직임, 혹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단순한 움직임이 주를 이룬다. 그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형상들은 ‘살아났다animated’기보다 오히려 부동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작동하는 모션은 비현실적이고 망상적이어서 그 부동성을 훑어 관찰하는 빛의 시선에 가깝다(때문에 나는 빅토리아 시대 사후 사진Post-mortem photography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디지털 펜과 포토샵을 사용해 세필 기법으로 형상을 그린다. 이미지를 확대한 상태에서 이뤄진 장시간의 작업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형상과 색채의 변화가 누적된 시간들을 드러낸다. 이를 재생시키는 일은, 말하자면 붓질의 시간적 축적을 재생시키는 셈이다. 보통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재생되는 모션그래픽 회화는 일종의 픽처레스크한 환영성이나 생생한 자연을 모사한다. 나아가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동양화적 기법이든, 극사실적인 장면이든, 유명 명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드는 키치든. 하지만, 이승훈은 이 노선들을 조금씩 비껴가 다소 무의식적이고 일상적인, 무엇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의미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공들여 재생시킨다. 그렇다면 이것은 형식 실험인가?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애니메이션의 세 가지 테크닉을 중첩시키고 충돌시킨다고 설명한다. 프레임 바이 프레임, 컷아웃 기법, 그리고 3D 렌더링 애니메이션을 한 화면에서 동기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험이 노리는 바는 정확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 툴이나 애플리케이션의 목적, 설계와는 충돌하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아직 기술상의 한계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작업은 부자연스럽고, 삐거덕거리는 요소를, 즉 비동기화되는 계기를 노출하게 된다. 그리고 반복적인 삐거덕거림은 자연스러운 현실에 매복한 언캐니한 실재를 어김없이 불러온다. (2021) 작업에서 어정쩡하게 동떨어져있는 그림들의 비동기적인 모션은 기이한 단절과 연속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의 오용에 가깝다.
     
    이승훈은 결국 그럴싸한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들뢰즈를 빌어 “재현적인 터치와 움직임도 아니고 어떤 추상적 효과의 장이 되어서도 안 되는, 어떤 분명한 형상figure-물건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작가노트에 써놓았다. 결국 그가 노리는 지점은 비재현적인 움직임이고, 그것은 움직이되 그 움직임을 통해 오히려 멈춤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된다. 나아가 그 부동성 속에 잠복한 유동적인 형상을 발견한다는 저 테제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꿈틀거리는 것은 가는 펜자국들이다. 때문에 인체는 전혀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고, 사물들의 움직임은 불안하다. 특히, 피부나 털과 같은 표현에 있어서 작가는 강박적이리만치 매끈한 명암을 만들어내지 않는데, 그래서 피부는 비균질적이다 못해 푸석한 거죽이나 털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면을 만들어내지 않는 상태에서 부여된 모션은 유기적으로 보일 리 없다. 오히려 그러한 움직임들은 스톱모션처럼 자잘한 단절들을 노출하며 형상 자체를 잔상들의 순환적인 흐름으로 바꿔놓는다. 형상은 윤곽으로도, 면으로도, 입체로도 고정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흔들린다. 이 단절적이면서 유동적인 잔상들의 반복은 유령 같은 감각과 닮아 있다. 어깃장 같은 이야기들, 나도 타인도 아닌 꿈의 이중감각, 소외와 미디어의 스펙터클 사이에 놓인 그 무엇의 감각. 그러나 이 감각 배후에 놓인 것이 블랙 유머인지, 지독한 회의인지, 연민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진실(미술평론)
    
    
    (출처 = OCI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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