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카드가 섞이기 시작한다. 카드는 손 위로 단면을 슬며시 노출하며 다른 카드의 사이사이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휜 카드는 엄지손가락 아래로 떨어지며 무작위로 뒤엉킨 후 정돈되며 펼쳐진다. 상대방이 가진 패가 무엇인지 맞히기 위해 치열한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배헤윰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아마도 추상적인 형상 사이로 언뜻 보이는 모양과 강렬한 색채, 생각보다 구체적인 작품 제목 때문일 것이다. ‹COMBO›전은 2021년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그는 ‹Fyka Foretold…›(2021, SeMA 창고), ‹플롯탈주 PLOTLESS›(2021, 금호미술관)전에 이은 이번 전시에서 커다란 구조로 시작된 추상적 사유의 미시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작가가 그동안 미스터리함으로 무장하여 작품을 바라보는 대상과 작가 사이의 암묵적 소통가능성을 모색했다면,‹COMBO›전에서는 추상의 연쇄 작용으로 발생하는 구조에 관해 탐구해온 그의 여정과 배헤윰만의 회화적 생태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관한 시각을 더욱더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 배헤윰은 회화 내부에서 맺어지는 형태와 색의 관계성에 관해 고찰하고 사유의 진행 과정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의 작품에서 형상을 해석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요컨대 추상 회화라는 형식을 빌려 그의 사유 체계를 엿보고 추론하는 것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과거 캔버스에 ‘운동 이미지’를 해체, 재결합하여 회화 내부의 운동성을 실험했고 이를 강렬한 색의 관계, 언어의 요소 등 추상 행위와 연결했다. 이후 그는 ‘모름’을 상정하고 생각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구조를 전통적인 관념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작가는 회화 안에서 자신의 서사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플롯 개념을 도입해서 본인 작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여 구조화하기도 했다. 교차하는 시간성을 암시하듯 작가는 때로 자신의 작업을 복기하여 도상을 되풀이하기도 하고 “제목에 하이퍼링크를 걸어두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곳곳에 등장하는 검은 점들도 마찬가지다. 전시 제목 ‹COMBO›는 끊김 없이 지속하는 타격감을 떠올리는 데 상용화된 단어다. 배헤윰은 캔버스에서 여러 면과 색이 접합하며 드러나는 모양새와 그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을 이 단어와 유사한 감각이라 비유했다. 즉, 이 전시에서 “COMBO”는 추상회화의 연쇄 작용을 상징한다. ‘없음과 모름’에서 도상이 출현하고 형태와 색의 힘겨루기 중 일부 결합하거나 소멸하여 캔버스 내부에서 균형을 이루었을 때, 남겨진 이미지에서 생성된 의미를 획득하는 쾌감을 한 단어로 축약하여 보여준다. 작가가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일 또한 추상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과정 후에 표제가 결정되기 때문에 결국 그가 주지하는 내용은 타이틀에서 마주하게 된다. 특히 본 전시의 주제를 드러내는 두 작품 중 ‹IN EQUILIBRIUM›(2021)은 회화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요소가 마치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천천히 각자의 위치를 잡아 균형을 이룬 것이고, 앞서 말한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 ‹COMBO›(2021)는 형태가 깨진 후 즉각적으로 의미를 획득한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다. 짙푸른 스트로크가 인상적인 작품 ‹Rolling Dice›(2021) 상단에 있는 분홍색 조각은 이 작품 전체가 구성되기 위한 “방아쇠”가 되었다. 조각이 깨진 후 형태가 쏟아져 내리면서 붓질에 속도가 붙고 새로운 움직임을 형성했다. ‹Shuffling›(2021)은 면이 손에서 섞일 때 운동감을 떠올린 작업이다. 작가는 대면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향해 면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개체를 섞는다. 관객은 화가의 손 위에서 무작위로 섞이는 색면의 패를 엿보게 될 것이다. 글 김수현(휘슬,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