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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최상철 개인전 Choi, Sang Chul
기간| 2021.10.28 - 2021.12.11
시간| 10:30 - 18:00
장소| 아트스페이스3/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7-33/지하1층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0-5322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최상철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01_Mumool 21-8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2021 (출처= 아트스페이스3)

  • 02_Mumool 21-7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2021 (출처= 아트스페이스3)

  • 04_Mumool 21-9
    Acrylic on canvas 227.3x181.8cm 2021 (출처= 아트스페이스3)

  • 14_Mumool 20-9
    Acrylic on canvas 455.0x379.0cm 2021 (출처= 아트스페이스3)
  •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숨결
    
    “진정한 시는 말하면서 닫아 버리는 말, 말의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인이 공간을 키우고 리듬에 맞춰 사라지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숨 쉬는 내밀성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내면의 순수한 화상(火傷)”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2011, 그린비, 207쪽)
    
    
    “토로록 틱 티딕 톡, 톡.” 각진 곳 하나 없는 매끈한 작은 돌멩이 한 개가 화면 위에서 튕겨 구르기를 반복한다. 고요한 작업실을 채우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언제쯤 돌 구르기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최상철은 손안에 들어오는 제각각인 크기의 자갈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검정 아크릴 물감에 적신 후, 캔버스 위에서 이처럼 굴리기를 반복한다. 굴리기를 위하여 캔버스 측면에 손잡이 역할을 겸한 틀이 덧대어진다. 돌 구르기가 멈추는 때는 자신의 몸에 묻은 물감이 완전히 사라질 때이다. 이 과정을 그만의 미학적 형식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예술을 빌미로 한 놀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비정형적인 작업 과정을 거쳐 화면 안에는 그만의 시간과 공간이 피어난다. 돌이 굴러가는 시간만큼의 흔적과 그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인 얼룩의 변증법은 작가가 작업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비유해보자면, 자연의 시간,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절대적인 시간 안에서 구르는 돌은 상대적인 시공간을 창조한다. 한 작품당 한 개의 돌을 사용하여 천 번의 구르기가 끝나면 작업도 완성된다. 천 번이라는 숫자가 특별히 마음을 건들지만, 그 역시 인위적인 사유의 한계가 만들어낸 상징일 뿐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천 번이란 횟수는 작업을 멈추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숫자가 아닐까. 요컨대 작가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미에서 벗어나는 게 어쩌면 작업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터. 우연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미학적 충돌이 발생하는 순간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묻은 돌을 놓는 순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캔버스를 움직여서 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운동성을 받으려면 작가의 몸에 비례하여 화면의 크기가 결정된다. 최상철은 주어진 회화의 형식을 자신의 몸에 맞춰 재편한다. 중요한 건 바로 모든 작업이 그의 몸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근대미술의 실험은 캔버스의 크기와 물성도 회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자 담론으로 확장시켰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몸과 회화의 관계를 다룬 사례는 흔치 않다. 오히려 작가의 자아를 부풀려 작업의 규모를 키운 경우는 빈번했던 편이다. 워낙에 탈형식적 측면이 강하기에 캔버스와 신체의 관계는 비교적 덜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 미술이 공간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한 것처럼 그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관측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 다시 그의 작업 방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렇게 캔버스의 크기가 결정되면 곧 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그는 우연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진 법칙으로 언어적 설명이나 의미를 벗어난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즉 최상철의 회화는 무엇을 말하지도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의미를 내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가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이러한 미학적 질문은 근대 이후 예술이 당면했던 문제였고,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고민이기도 하다. 예술을 표현하는 언어를 포기하려는 결심은 단지 언어를 버린다는 결정론적 행위가 아니라 과연 언어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자는 반성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 파울 클레는 놀이를 통하여 그림의 원형을 되찾았고, 존 케이지는 음악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소리의 가치를 제시했으며, 아그네스 마틴의 선 긋기는 깊이에의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평면 안에서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관계로 세계를 사유했다. 이러한 예술의 실험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술이 세계의 모방에서 벗어나 존재라는 본질을 탐구하라는 요청이었다.
    
    20세기 중반 추상 모더니즘은 근대 세계의 붕괴와 접합 사이에서 출현했다.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 역시 냉전 시대의 이념 안에서 동서양의 정신과 물질, 양식과 이념의 혼합물로 형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숭고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양식이 되고 말았다. 한편 최상철은 화단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선택한 묵음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림이 되기보다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어떤 가시적 해석이나 형상에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작업 방식을 거듭 고안한다. 그의 작업 방식을 두고 구도자적 혹은 수행적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은 낡은 의미를 재생산할 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수식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깨달음을 찾기 위한 구도자적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사유의 바깥을 향하고 있다. 사유의 바깥이란 언어의 바깥이자 언어로 묘사될 수 있는 세계를 벗어나려는 실천이다. 즉 그에게 회화는 시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형식이 아닌 사유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사유를 위하여 그리기의 형식을 벗어낸 채로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미메시스가 재연될 수 있는 고리를 봉쇄해버린다. 들뢰즈(G. Deleuze)의 개념을 빌리자면 완전한 탈주선(flying line)을 그리는 중이라 부를 수 있겠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존에서 놀이로, 노동에서 예술로 변한다고 보았다.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생존을 위해 돌로 필요한 도구를 발명했다.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생존의 도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도구로 전환된다. 생존이 우선되는 시대를 벗어나자 생각하는 인간은 이미지를 통하여 주술적 의미를 담은 그림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 평온해진 인간의 활동은 곧장 노동으로만 연결되지는 않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예술 활동이 더해졌다. 생존에 유용한 활동만 있던 터에 놀이라는 활동이 더해진 것이다.”(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워크룸프레스, 2017, 51쪽) 알다시피 놀이는 쓸모와 무관하게 기쁨을 목적한다. 바타유는 더 나아가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노동과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적인 측면이 사라졌다고 해석한다. 즉 언어에 의하여 대상/사물이 가진 감각적인 면을 없애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바타유는 이처럼 감각적인 것의 상실이 예술의 필요성을 끌어낸다고 보았다. 바타유가 사유한 예술의 존재 이유는, 무엇보다 언어 너머의 세계, 의식을 벗어난 감각적 자율성을 되찾는 시적 세계와 조우한다. 한편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시를 “열린 세계”라 명시했다. 열린 세계는 무엇을 바라는 공간이 아니다. 오로지 가장 내면적인 것을 향한 순수한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존재는 소진되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존재의 본질이란 건 그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세계는 인간을 존재로 보기보다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존재의 바탕은 현실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시적 세계는 말의 자율성을 요청한다. 내밀한 존재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곧 시인의 활동, 예술가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관습과 의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말을 찾아가는 길이 곧 예술을 실천하는 방식이다. 최상철에게 작업은 존재의 순수한 소비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끝으로 그렇다면 완전한 추상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질문해 본다. 최상철의 작업 방식은 순수한 소비, 놀이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는 하나의 미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완벽한 추상은 작업의 목적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 이전에 박영택이 말한 것처럼,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인위적이지 않은 미술의 원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법칙은 때로는 어떤 형상을 연상시키거나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몇 작품(“無物 21-6”, “無物 21-7”, “無物 21-8”)은 자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을 닮거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도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요컨대 최상철의 회화는 작가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된 세계가 아니라 작가와 작업, 행위와 결과가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세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감상과 해석 또한 오로지 보는 이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사라진 익명의 것이 되어 공통의 것이 될 수 있다. 저자성 또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작품을 감각하는 자율성은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1,000번의 궤적
    
    박겸숙(PARK KYUM SOOK, / 아트노이드178 대표)
    
    작가는 작은 울림에 집중한다. 그것은 검은 물감을 묻힌 돌이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 위를 구르며 내는 소리이다. 캔버스 천의 탄성과 돌의 무게가 만들어 낸 미세한 떨림이 파장을 일으킨다. 캔버스를 잡은 작가의 두 손에 울림이 전해진다. 구르는 둥근 돌의 표면은 독특한 궤적을 남기며 캔버스의 테두리로 향한다. 캔버스에 둘러쳐진 나무판자에 돌이 부딪힌다. 툭, 툭, 둔탁한 소리가 난다. 캔버스 밖을 향해 탈주하려던 돌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캔버스 안쪽으로 돌아온다. 점점 움직임이 느려진 돌이 캔버스 위에서 그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천 번. 작가와 조응하던 울림이 잦아든다. 돌은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작품은 완성된다.
    
    1,000번의 궤적
    작가 최상철은 ‘그리지 않음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일종의 역설과도 같은 이 말은 천 번의 궤적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설명이다. 작가는 어떠한 인위적인 더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결과”를 마주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해왔다. 그가 끊임없이 시도해온 결과물이 바로 작품 <무물(無物, Mumool)>이다.
    작가는 화면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지는 어떠한 작위적인 테크닉 일체를 배제하면서, 작품에서 작가의 존재를 지우길 원했다. 그는 손과 붓으로 어떠한 형상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것-‘돌’-의 흔적일 뿐이다. 작가는 돌을 캔버스에 올려놓을 때, 최소한의 개입만을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심지어 그는 작품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내는 순간까지 스스로 주도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엄격하게 배제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사전에 기획한다. 고무 패킹을 던져서 돌이 구르기 시작할 위치와 방향을 정하거나, 양 끝에 ‘좌(左)’, ‘우(右)’라고 쓰인 작은 스틱을 던져서 돌이 캔버스의 어느 쪽에서 구르기 시작할지를 결정한다.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은 정해져 있다. 유일하게 작가가 결정한 것이지만, 그 조차도 임의적이다. 천 번째에 끝낸다. 이 1,000이라는 숫자에는 종교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수많은 전거(典據)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어떤 개념에 의존하거나, 의도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십 년간, 작가 최상철은 조형적 논리를 세우는 주체로서의 권위나 작가에게 부여되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자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그리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재현하고 의도를 표현하는 ‘모방과 장식’에 대한 일체의 관습들이 작품에서 제거되었다. 더 잘 그리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들어설 자리도 줄여가고자 했다. 이처럼 그에게 회화는 더 이상 어떤 재현이나, 표현이라는 수단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가치를 담아내는 수단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회화의 존재 이유를 그 근원으로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최초의 그림으로의 귀환 : 무물(無物)
    회화는 “꾸미지 않은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와 의미로 고정되기 이전의 상태, 언어와 형상으로 포착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형태를 갖추기 이전이기에 우리 눈앞에 드러날 수 없는 무분별적 세계와 맞닿은 곳에서 회화는 발원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무언가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드러나지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때 ‘드러나지 않음’은 ‘없음(Nothing, 無)’이 아니라, 함께 있으나 ‘아직-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즉 ‘없음-존재(無物)’인 것이다.
    작가가 작품의 제목으로 명명한 <무물>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돈인 상태”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잠재성으로 가득 찬 시공간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그것은 주객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로, 원초적 감각들이 존재하는 세계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것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은 경이롭다. 시원(始原)에서의 회화(예술)는 자신의 질서에 따라,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화한다. 최초의 그림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작가는 그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바닥에 무심히 그었던 선(線)과 같은 흔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최초의 그림은 그림을 잘 그리려는 욕망이나 심지어 그림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는 최초의 그림을 그리던 세상을 다시 만나길 열망한다. 지금 우리는 그 최초의 그림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연의 충일함과 평온함에 이끌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남겨진 궤적들이 조화롭게 자리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예감하며, 그는 그리기 ‘이전의 흔적’들을 받아들인다.
    
    입구
    작가 최상철이 지향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려 할수록 멀어진다. 그렇기에 작가는 더더욱 자신의 개입을 덜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덜어내고 비우고자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그는 이것 마저도 욕구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지 자문한다. 그는 이렇게 최선을 다해 주체를 부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며,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끈질기게 모색해왔다. 자신이 새로운 방법에 익숙해져서 무뎌지지 않도록, 그는 쉼없이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게 그는 ‘아직 어떠한 형태로도 고정되지 않은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는 작가 최상철의 곁에 서서, 그가 바라보는 ‘그 무엇’을 함께 본다. 그는 절대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그것들을 펼쳐내지 않는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울림들을 느끼며, 그는 그 흔적들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나직한 울림이 시작된 그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우리는 작가 최상철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기꺼이 이 모든 것과 조응하며 도달한 그 문 앞에 함께 서 있다. 끝.
    
    
    (출처=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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