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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
기간| 2018.11.15 - 2019.02.06
시간| 화, 목, 금, 일요일: 오전 10시 ~ 오후 7시 - 수,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9시(야간개장)
장소|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서울
주소| 서울 중구 정동 5-1
휴관| 월요일
관람료| 3,000원
전화번호| 02-2022-060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은호
김진우
김창환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전성규
강진희,강필주,키쿠타마코토,김규진,김봉룡,김영기,김응원,김진갑,무라카미 텐신,박승무,샤를 알베르크,안중식,앨버트 테일러,양기훈,영친왕,오일영,유근형,윤용구,이병직,이와타 가니에,이용우,이한복,조석진,지운영,채용신,황인춘,황철,휴버트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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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채용신 고종어진
    20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 180x104cm

  • 색회금채화조문화병
    19세기 말-20세기 초 60.6 x 15.4 x 15.3 cm

  • 대례의궤大禮儀軌
    1897 종이에 필사 43.8x32cm
  • 			1. 제국의 미술
    
    1897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면서 궁중미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규범성이 강하고, 보수성이 짙은 궁중미술의 특성상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기본적으로는 조선 후기 이래로 전해져오던 전통이 지속됐지만, 황제가 된 고종의 위상에 맞춰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의 용포龍袍와 의장물이 어진과 기록화에 새로이 등장하는 등 달라진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적으로 어렵던 당시의 상황 속에 황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반영됐다. 본래 궁중장식화는 본격적인 ‘그림’이라기보다 궁궐의 치장을 위한 일종의 ‘물건’으로까지 여겨졌기 때문에 그 변화가 극히 드물게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고종 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및 일본 미술 등의 사실적이고도 세밀한 화풍을 수용, 변화를 꾀했다. 이러한 면모는 궁중회화 이상으로 보수성이 강한 당시의 불교 회화에도 나타나는 부분으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오얏꽃 문양이 장식된 신식군복 차림의 호법신護法神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모두 대한제국 궁중미술의 시차 없는 저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2.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대표적인 서구의 신식문물인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1880년대 한국에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로 어진이나 기록화 등 궁중회화의 상당 부분은 회화가 아닌 사진으로 대체해 나갔다. 이는 사진이 특유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갖춘 새로운 장르로서가 아니라 극사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회화를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하는 차원에서 인식, 수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당시의 초상사진이 초상화와의 뚜렷한 관련성 속에 회화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받아들이면서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또 반대로 특유의 사실성이 회화에 자극을 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황후의 초상, 가족 초상 등 그간 유교적 관념 아래 등장할 수 없었던 대상이 사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 등은 달라진 시대상과 근대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
    
    고종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역점을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공예부문의 개량이었다. 전통 공예의 경우 19세기 말 관요官窯가 민요民窯로 전환되면서 그 질이 현격히 떨어지고, 궁중의 서양 식기 선호와 맞물리며 입지까지 좁아진 도자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 쇠퇴일로에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 공예의 복구와 진흥을 위해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으로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됐다. 그렇지만 자금난으로 1911년 운영주체가 바뀌고 명칭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됐다. 이후 대한제국의 상징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며 역기능을 보였지만, 공예를 미술품, 미술공예품으로 처음 부르기 시작하였고, 도안의 개념을 수용하여 실용 기물이 아닌 감상용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선진 기술을 통해 제작된 물품을 자본주의 관점에서 제작, 판매, 소비, 향유하는 근대적 흐름을 파생시킨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 원류인 한성미술품제작소가 대한제국 황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다시금 주목할 만하다. 또한 대한제국 황실과 운현궁에서 사용돼 오던 도자, 나전칠기, 목공예, 자수 등 각종 공예품들은 전통적 양식과 외래 양식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실 고종 이래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지향을 보여주는 물질문화에 다름 아니다. 
    
    
    4.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
    
    고종, 순종시기에는 도화서가 해체됨과 동시에 다양한 외부의 화가들이 궁중회화의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전문가로, 혹은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기 시작했는데,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미술’의 개념이 전해지게 된 사실도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와 같은 익명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궁중회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화원들과 달리 작가의식을 토대로 보다 창작적인 차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들은 1920년경 제작된 창덕궁 벽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궁중회화의 양식에 서양화풍과 일본화풍을 가미한 시각적인 사실성과 장식성이 강화된 그림을 선보이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이것이 이후 화가들의 성격 및 화단 전체의 변화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기에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또한 이들이 궁중회화를 제작하며 보다 실력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명성을 쌓으며 기성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근대 회화에 있어 대한제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그 대표적 인물인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에 의해 설립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와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에서 양성된 화가들은 이후 근대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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