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22.05.07 - 2022.0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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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11:00-18:00 |
장소| | KP Gallery/서울 *사진전문갤러리 |
주소| | 서울 용산구 후암동 435-1/KP Gallery |
휴관| | 일요일, 월요일, 공휴일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2-706-6751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제니스 정, 박경태, LENA,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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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수정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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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2022년 5월 7일부터 28일까지 기획전 ‘관해파리들의 유영(Ways of Saying: SIPHONOPHORA)’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 제니스 정, 박경태, LENA 그리고 김예지는 세상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작업들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시각 예술이 이미지로 ‘세상을 사유(思惟)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KP 갤러리는 베르그송의 『사유와 운동』에서 가져온 이미지에 대한 개념 이해를 바탕으로, 사유란 ‘연속적인 시간 안에서 실재하는 자아를 그 내부에서 직관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자신들이 바라보는 세계, 자신들이 겪어 온 세계를 이미지로 구축해낸 네 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한다.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제니스 정은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내고, 박경태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동시대의 문제점을 접합시켜 인간에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김예지는 다채롭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2차원 평면이라는 공간 안에 3차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LENA는 권력이 지배하는 몸의 역사를 사진과 영상을 통해 사회에 구속되는 개인의 삶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을 수행해온 네 명의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과 세상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고 그들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 기획의 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기반으로 감성에서 촉발된 상상력이 기억으로 이어지고, 그 기억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 사유라 말한다. 기획전 ‘관해파리들의 유영(Ways of Saying: SIPHONOPHORA)’은 작가들이 겪어온 사회에 대한 기억과 생각들을 ‘시각적인 사유’로 해체하고 ‘전시라는 사건(event)’으로 치환해낸 작업들을 소개한다. 제니스 정(b.1977)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패브릭과 아크릴물감을 조합하여 형상화한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약자에 대한 폭력 기사를 접하면서 작가는 ‘내부 공간’이 주는 양면성을 추상적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박경태(b.1978)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기억이라는 테마를 ‘므두셀라 증후군'과 연계 짓는다.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과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이 교차되며 아름답지만 슬픈 이미지로 전환되고, 그 안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을 말한다. LENA(b.1980)는 모노드라마와 텍스트, 사진 이미지를 결합하여 여성의 몸과 사회 구조를 논한다. 고전 회화에서 드러나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현대 의학의 도구들을 사진으로 포착하며 대비시키고, 국가가 제어해 온 출산과 한국 전통의 남아선호사상을 보여주는 기자석을 이미지를 통해 사회 권력이나 관습이 개인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김예지(b.1989)는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2차원 평면이 3차원에 존재하는 방식, 3차원이 2차원 안에 표현되는 방식들을 탐구한다. 차원을 벗어나며 생겨나는 경계와 틈을 평면 안에 드러냄으로써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리된 두 세계는 평면 안에서 이질감을 빚어내면서 존재하고 그 자체로 빛나는 이미지들을 통해 분열과 통합이 동시에 일어나는 작가의 세계를 보여준다. 관해파리(Siphonophora) 는 여러 개체가 모여 길게 군체(群體)를 이루는 바다 생명체로, 각각의 유기체들이 섭식과 감각, 이동, 생식 등 다른 생리적 역할을 분담하며 살아간다. 하나로 이어진 개체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의존하면서(colonial organism), 따로 또 같이, 하나의 생명체로 길게 이어진 채 바닷속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독자적인 개체이지만, 서로 의지하며 느린 방식으로 생존해 나가는 관해파리처럼, 각자 다른 영역에서 작업을 수행해온 네 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그에 대한 사유를 자신들의 시각과 방식으로 드러내면서 느슨한 연대감으로 세상을 향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말을 걸 것인가. 시각 예술은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미지와 기억, 기억이 만들어내는 사유‘라는 절차를 걸쳐 네 명의 작가가 함께 고민하고 내놓은 결과물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글: LENA ■ 작업노트 제니스 정 넘쳐나는 뉴스 속에 가끔 뜨거운 불덩이 같은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기사가 있다. 수년간 여성을 향한 폭력, 특히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악랄한 사건 사고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지만, 특히 지난 2021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했다. 그 대상은 참으로 다양했다. 2세 여아, 할머니, 20대 여성, 40대 여성… 그리고 가해자는 모두 피해 여성들과 친밀한 관계였다.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보호자가 공포의 대상이 되어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압도당하는 순간,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면서 생기는 위계질서가 그들을 억누르고,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저항해도 소용없음을 느끼고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생각해보면 나 또한 무기력하고 슬퍼진다. 차가운 타일 바닥, 어두운 방, 식탁 옆, 포근한 디자인의 커튼 뒤, 너무나도 익숙해 평범하기까지 한 그들의 집이 쉼을 주지 못하고 그 어느 곳 보다 두려운 장소가 되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그러한 장소는 우리 안에 있으며 어쩌면 오늘 나를 지나쳐 갔을 것이다. 옆집에서 들리는 소음에 무심히 귀를 기울이다 웃음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한다. 그리고 이내 그 사실에 씁쓸해진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업들은 사건을 접했을 때의 나의 감정,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피해자들이 느꼈을 감정들, 일상적인 공간이 가진 양면성들을 패브릭과 물감, 다양한 물질들을 통해 해체하고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애도와 연대가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란다. 박경태 <므두셀라-Methuselah> 연작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에 알레고리(allegory)로서 일부 썩거나 곰팡이가 핀 과일을 대상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므두셀라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노아의 할아버지이다. 성서에 언급된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장수의 상징이자, 과거의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기억 편향의 경향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인간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어떠한 것을 서로 관련시켜 연상을 통해 기억한다. 비록 정확하지 않아도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무의식 속에 저장된 경험들이 어떤 형태로든 떠올라 인간의 자의식을 유지하는데 큰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오랫동안 청과물 도소매업을 하셨다. 그 덕분에 여러 가지 과일을 계절마다 자유롭게 접했던 기억이 있으며, 아직도 생애 첫 바나나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노란색 껍질과 코끝을 자극하던 달콤한 냄새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던 단맛의 바나나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반면, 여름철 장마 시기에 청량리시장은 썩어서 팔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리는 과일들로 악취가 진동했었다. 하지만 기억은 쌓인 눈이 녹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점점 흐려지고 잊힌다. 기억이란 오감(five senses)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저장하고 다시 되살리는 인간의 정신기능이다. 어쩌면 인간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할 때 ‘므두셀라 증후군 – Methuselah syndrome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싶은 심리)’처럼 나쁜 일들은 빨리 지우고,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만 기억하려는 일종의 자기방어적 본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므두셀라-Methuselah> 연작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유한한 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기억에 대해 사유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LENA 이 작업의 구상은 2017년 런던의 한 미술관에서 읽은 자료에서 시작되었다. 여성의 신체와 임신중단에 대한 전시였다. 공개된 기사 중에서 한 이야기가 내 눈길을 끌었다. 미국에 사는 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아내가 암을 선고 받았고, 단계가 심각하여 수술을 급히 받아야 하는데 검사 중에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살고 있는 주(州)에서는 임신중단이 불법이었고, 임신과 함께 아내의 암세포는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내의 국적이 영국이었고, 영국으로 가면 임신중단과 함께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환자 이송에 관한 절차가 복잡했다. 복잡한 절차를 준비하는 와중 아내는 사망을 했다. 기사 말미에 남편이 남긴 말은 이러했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가정(family) 같은 것은 필요 없었어요. 내가 원한 것은 오직 그녀가 살아있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일이다. 현재에도 미국은 주마다 다른 법을 가지고 있고, 어느 주에서는 여전히 임신중단은 불법이며, 트럼프 재임기간 동안 트럼프는 임신중단금지법을 촉구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유명 배우나 ‘셀럽들’은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출산하고, 그 사실을 소셜 미디어에 앞다투어 올렸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게이 커플들도 이에 환호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2016년 9월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 입법 예고에 따르면 모자보건법상 허용범위에서 벗어나는 낙태 시술(임신중단)을 ‘비도덕적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시행한 의사의 자격정지 기간을 12개월로 늘린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우습게도, 대한민국은 ‘적절한 가족계획’과 ‘남아선호사상’에 따라 산아제한을 위해임신중단이 빈번이 일어나는 나라였고, 보건부 주도 아래 정관수술을 위한 의료 버스를 지방으로 파견하는 나라였다. 불과 40년 전의 일이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임신중단은 산모의 결정아래에서, 태아의 주수에 따라 가능한 수술이었다. 출산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자 생각해낸 고육지책이었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운동이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결국 2019년 ‘낙태죄’는 헌법불합치결정(2017헌바127결정)을 받았다.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나는 인간의 신체와, 여성의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 그리고 국가 권력과 개인이 가지는 신체의 자유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가부장제 안에서 ‘정상 가족’에 대한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출산율의 저하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출산율 저하에 대한 해법은 여전히 60년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정자치부는 2016년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인터넷사이트를 구축했다. 17개 시도(市都), 226개의 시군구의 출산율 관련 통계와 지원 혜택을 보여줌으로써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서비스라고 공개했으나, 15세에서 49세까지의 ‘가임기 여성 인구수’ 항목을 집어넣었다. 출산에 대한 문제를 명백히 ‘여성의 임신율 저하’로 돌린 것이다. 여성의 재생산권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출산’이 대한민국 출산지도에 의해 환영 받을 수 있을까? 미혼모에 대한 지원 혜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인구수가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고려인4세 아이들은 왜 성년이 되기 전에 강제로 귀국을 시키는가?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대한민국이 원하는 출산은 ‘정상적인 가정 안에서, 남녀관계의 결합에 따라, 남자의 성(姓)을 따르는 아이’에 국한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은 출산의 도구로 여겨지게 된다. 가부장제 내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 행복은 이 삼각구도 안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비춰진다. 이 행복을 위해서는 당연히 출산의 물리적 도구인 여성의 자궁이 필수이다. 체외수정임신(In vitro fertilization)의 경우에도 자궁은 필수적 도구이다. 이번 작업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가부장제 안에서 비춰지는 여성의 신체와 완전한 가정에 대한 환상에 대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정해진 틀 안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완벽한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제라는 틀 안에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균열을 일으킬 것인가. 김예지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2차원 평면이 3차원에 존재하는 방식과 3차원 세계가 2차원 안에 표현되는 방식들을 탐구한다. 3차원 세계에서 만들어진 의미의 구조는 2차원 세계와 만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경계와 틈을 만들어낸다. 회화를 통해 서로 다른 두개의 차원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두 세계를 분리하는 기능을 한다. 두 세계의 연결이 섣불리 2차원을 3차원에 종속시켜 회화를 의미의 식민지로 만들거나 2차원을 3차원 세계의 언어 구조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두 세계의 틈을 드러내고 두 세계가 동등하게 서로의 의미를 교환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오래된 텔레비전 스크린이나 인쇄된 평면 속의 만화 이미지등 2차원 이미지 문법이 3차원 현실을 왜곡해서 번역하는 방식들에 대해 수집하고 그 감각들을 회화적 붓질로 옮기는 시도부터 2차원 이미지가 캔버스의 모양과 크기를 의식하며 얹어짐으로써 3차원 공간 안에 존재하는 오브제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실험들을 주로 진행해왔다. 어린 시절 미디어에서 주로 접해왔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들, 또는 처음 보지만 특유의 클리셰적 문법으로 인해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정형화된 과거의 이미지들이 주로 이러한 실험들을 위해 수집되었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 있는 이미지들을 지금 눈앞에 있는 시간과 장소에 옮기는 회화의 오래된 역할이 일종의 포탈/웜홀처럼 서로 다른 세계나 차원의 것을 눈앞에 불러오는 일과 닿아 있다고 느끼고 차원 이동의 가능성을 감각의 영역에서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출처 = kp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