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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한지형 : Fatty Folders
기간| 2022.05.28 - 2022.06.25
시간| 화-토 11:00 -19:00 일 13:00 - 18:00
장소| 드로잉룸/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7길 68-4/2층
휴관| 일, 월,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94-3134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한지형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한지형 A day in the life of Person X
    2022 Acrylic on canvas 100x80cm
    (이미지출처 = 드로잉룸)

  • 한지형 Marinated Lazy sun
    2022 Acrylic on canvas 145.5x112cm
    (이미지출처 = 드로잉룸)

  • 한지형 As I imagine him -I
    2022 Acrylic on canvas 130.3x89.4cm
    (이미지출처 = 드로잉룸)

  • 한지형 Preparing Yourself for the Afterlife
    2022 Acrylic on canvas 145.5x112cm
    (이미지출처 = 드로잉룸)
  • 			「공허 이후의 세계」
    
    권시우
    
    ​
    
    “왜 그렇게 많은 새로운 추상화가 똑같아 보이는가?”
    
    -제리 살츠(Jerry Saltz), 2014
    
    
    
    한때, 그러니까 2010년대 초 중반에 부상했던 좀비 형식주의는, 흔히 과거의 시/청각적인 이미지가 ‘지금 여기’에 회집한 결과로 개괄된다.
    
    그 당시의 ‘지금 여기’는 공허와 대응될 만하다. 즉 사용자로서의 우리가 컨텐츠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소진했다는 감각, 혹은 그럼으로써 더 이상 ‘새로움’을 창출할 수 없다는 총체적인 비관주의가 우리를 엄습했다. 그러한 비관은 결국 과거를 주시하게끔 만들었다. 과거는 공허를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수장고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좀비 형식주의가 반드시 과거라는 수장고에 내재된 온갖 ‘이미지’를 포식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과거로부터 비롯한 ‘이미지’는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공허에 부합하게끔 재/구성됐고, 그 과정에서 종내 형식으로 대변되는 나름의 질서를 획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허에 부합하는 ‘이미지’의 질서란무엇인가? 이는 다소 모순된 질문이다. 공허,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질서는 무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비롯한 ‘이미지’는 공허에 개입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한 질서를 자체적으로 형성해야한다. 즉 단순한 노스텔지어든, 특정한 과거(들)의 형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참조이든, 그 당시에 공허를 나름대로 식민화하기 위한 전략은 무성했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머지,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공허를 합의할 만한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과거는 니콜라 부리오가 주장한 것처럼 다수의 사용자에 의해 포스트프로덕션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의 지형도를 형성한 대신, 그것으로부터선별된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교차함으로써, 종내 시공간적인분열을 초래했다.
    
    그것이 바로 공허의 형식이다. 공허는 오히려 과거를 식민화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금세 잊혀졌다. 혹은 ‘이미지’가 무작위로 교차하는 양상의 계보를 추적하기   위한 시도가 유보되면서, 과거는 리믹스라는 명목 하에 거의 난도질 당한 상태로 방치됐다. 더 이상 공허에 의해 추동되는유의미한 성좌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과거를 포함한 모든 것은 출처 불명의 데이터들로 환원된 채, 그저 리믹스의 관성에 따라 뒤섞인 허접 추상(Crapstraction)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허접 추상은  좀비 형식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에 도래한 시대적 풍경이나 다름없다.
    
    한지형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전개된다. 특히나 몇몇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기하학적인 구도는 허접 추상의 국면을 차갑게 동결시킨 결과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허접 추상 속으로 희석될 만한 데이터 잔해들을 나름대로 엄격하게 구획함으로써, 마침내 관객이 대상화할수 있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는 회화 차원의 실험이라기보다, 회화라는 매체를 빌어 지금의 추상화된 세계를 재/맥락화하려는시도의 일환이다. 그렇다. 작가에게 있어서 회화는 이미 식민화된과거로부터 계승된 공허의 전리품이 아니라, 허접 추상 이후에 도래할 미래를 ‘지금 여기’에 회집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처럼 회화가 수단이 되는 전시에서, 일련의 회화 작업들은 ‘차가운 추상’의 맥락에 안주하지 않은 채, 마침내 “변신”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한때 회화적 프레임 내에서 조형됐던 기하학적인 구도는 ‘이미지’의 저변에서 여전히 유동하고 있는 허접 추상과 선뜻 타협한 채 분열을 자초한다. 
    
    즉,데이터 차원에서 서로 엉겨 붙은 채 거의 곤죽이 된 시간이 ‘이미지’의 내부로 유출되고, 이로써 공간의 영토들은 순식간에 융해되고만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혼란상에 압도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새로운 미래주의적 선언으로 제시한다. 새로운 미래주의는 지금의 추상화된 세계를 디지털 기술이 제공한 각종 도구 상자를 활용해 조율할 수 있는 유기체로 삼는다. 이때의 유기체는 다름아닌 우리가 난도질한 과거와 그것을 어떻게든판촉하기 위한 공허한 슬로건들, 그에 부응하는 소비주의의 책략, 그 이외에 과거를 구심 삼아 전개된 온갖 정치적인 알력의 산물들을 전부 포괄한 채, 스스로를 망각해버린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과거가 없다.
    
    결국 남은 것은 유기체의 형태 혹은 그것에 부합하는 무정형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는 다시금 총체적인 비관주의를 초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정형의 ‘이미지’는(허접 추상의 국면에 함몰된) 포스트-휴먼이 추상화된 세계에 잔존해 있는 모든 비/물리적인 관계들을 불식시킴으로써, 근대적 주체성을 희석시키고, 그로 인해 주체를 객체로, 객체를 주체로 편입시키며, 젠더 이분법을 초월하고, 각기 다른 의식과 관념들의 공유지를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작가가 굳이 ‘지금 여기’에 회집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이제 무엇으로든“변신”할 수 있다. 본 전시에서 관객은 그러한 “변신”의 양상을 가늠하면서, 순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알레고리를 해결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미래주의는 과거의 공백을 주시하지도, 미래를 섣부르게 재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것이 선언한 유기체로서의 세계를 ‘이미지’로 실현할 뿐이다.
    
    (출처 = 드로잉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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