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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황규민 : 황씨화보
기간| 2022.07.01 - 2022.07.30
시간| 10:00 - 18:00
장소| OCI 미술관/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휴관| 일, 월,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4-044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황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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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황씨화보

 
 
귀를 귀울여도 매번 알아듣지 못할 말로 바뀌는 것이 있었다. 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다 보니 그것과의 거리가 아득해진다. 귀양살이 같던 날들은 스스로의 궤적을 살피게 했고, 내가 나에게서 내놓을 것이 마련되자 대립 면들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었다.
 
황규민은 동양화단 전체를 흐르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과거에 누적된 기술을 익히는 것, 평범한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수행하는 것, 마치 대를 잇는 대단한 행위처럼 자칫 비범해지는 것이 그것이었다.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과거 답습의 현장에서 참고대상은 단순히 과거의 것이면 되는 걸까.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슬며시 곤두섰고 내세울 수 있는 대안을 자신의 작업 안에서 찾기로 했다.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 소위 클래식이라 불리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닌 지금도 유효한 과거의 것이어야 한다. 《황씨화보》는 『개자원화보』를 비롯한 과거 화보들의 형식을 빌어 작가 본인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반추하기에 유효한 위치에 놓인다. 사상과 매체에 기반한 담론이 아닌 서화의 형태를 정면으로 마주해 형상이 있는 대안을 내놓는다.

 

이영지(OCI미술관 큐레이터)

 

 

 

스스로를 깨우는 사원

 

 

히말라야 산정에 부는 얼음 피크 소리는 신의 음성이라 불린다. 그 음성은 산정 높이 오르는 사람들의 귓가에는 들려도 무슨 뜻을 전달하려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작가는 이 비의미의 음성을 종교가 포획하여 마법적 언어로 기획한 짧은 주문에 주목한다.
– 김남수, 「돌의 언어에서 흘러나오는 공명의 파워: 문자­추상에서 그림­추상까지」, 2019
 
#1. “돌은 대자연의 ‘돌의 세계’가 있고, 동물은 세계의 풍요 속에서 이미 ‘인간’을 알고 있으며, 인간이야말로 이제 알아차려야 한다!”
곧바로 느낌을 받고 마음이 그 느낌을 따라 움직이는 작가/작품은 얼마나 될까? 아니, 받아들임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임 받아있는 그 무엇이라면? 황규민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다가 불현 듯 이 작가/작품의 어떤 뜻이, 뜻의 실마리가 내 안에 ‘이미’ 들임 받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꿍꿍(想像)이 솟았다. 흰 사슴뿔 하나가 이마에 번개로 돋아서 빛이 터졌다. 아니나 다를까. 2019년 8월, 서교예술실험센터(서교)에 펼쳐놓은 개인전 주제는 였고, 안무비평가 김남수는 “돌에게서 인간은 불변을 배운다. 돌은 자신의 불변을 모든 변하는 것을 초월한 위치에 놓는다.”고 말한 독일 철학자 하인리히 롬바흐의 말을 빗댄 뒤, 히말라야의 ‘돌’ 그림 속을 파고들어 ‘말하는 돌’(윤병렬)의 뜻말을 밝히고, ‘알아차리는 대자연’으로 황규민의 작업을 알렸다. 참고로 “Muh Emdap Inam Mo”은 티벳 불교의 주문을 뒤집은 것인데 ‘옴 마니 반메 훔’(산스크리트어로는 옹 마니 빳ㄷ메 훙)이다. 우물거울로 휘돌아가는 집집 우주의 소리울림이다. 그림들과 공간과 그림 속 소리울림이 한통으로 휘돌아가는 전시라니!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20년 4월, 그는 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불과 8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주제어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돌’은 히말라야의 그 돌이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이번에 그가 집어 든 돌은 검은 벼루다. 알려진 바로는 추사가 “칠십년 마천십연 독진천호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라고 말한 데서 떠올렸다고 하는데, 그 말은 “칠십년 동안 벼루 10개를 밑창 뚫고, 붓 천 개가 몽당붓이 됐다.”는 뜻이다. 2019년의 에서 돌은 소리울림이 한 꼴 차림으로 바탈(性:天命)의 뒷하늘(後天)을 여는 예감으로 가득했다면, 의 돌은 그저 하나의 사물이요, 낡아서 극복해야 할 ‘동양화단’의 어떤 제도적 상징일 따름이었다. 돌의 우주 신화적 육성(肉聲)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뚫린)벼루’ 하나가 놓였다. 올해 OCI미술관의 전시도 이 벼룻돌의 연장전이다. 한동안 말문이 막힌 채 머릿속이 캄캄했다. 돌과 돌이 이어지지 않았다. 자주 눈을 깜빡이며 꿍꿍
(想像)을 끙끙 앓았다.
 
#2. “뒤집어진 거울상의 주문이 흘러나오는 공명 장치의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유한성의 근대와 무관하게 흘러가도 예술의 동시대 현상이 될 수 있다는 것”
2년 전의 를 잊기로 한다. 우리는 수차례 만났고 만나서 말을 풀었다. 그가 왜 를 기획했는지를 깊게 파고들기 보다는, 나는 속으로 2019년의 돌과 2020년의 돌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위아래로 쌓아도 보고 옆으로 붙여도 보고 그러다가 떼어서 놓은 뒤 하나씩 깨 보았다. 작업실에서 말을 나누다가 돌들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꿍꿍에서 깨졌을 때와 비슷했다. 부서지고 깨지는 그 자리가 시원하게 비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 깨진 것들이 티끌로 흩어졌다. 롬바흐의 불변하는 돌은 산산이 깨져 버렸고 심지어 거룩한 돌도 없었다. 그가 돌에 사로잡혔듯이 평론의 줄기도 그것에 달라붙어 자랐으니 글 뿌리가 파고들지 못했다. 돌을 내려놓은 자리에 동양화의 제도 교육론 비판을 펼쳤으니 평론은 그 비판론을 따를 뿐이었다. 돌이 깨지고 흩어지니 그 텅 빈 자리에 욈(呪文)이 서고 그림이 서고 글자가 섰다. 소리울림이다. 다시, 옴 마니 반메 훔이다. 그나 나나, 불과 2년 사이에 솟아 오른 생각의 뿔이 무엇을 숨겨 본뜻을 깨는지(隱喩), 두 돌은 왜 서로 갈마들어 깨는지(直喩), 그 속뜻을 주고받아 가리켜 깨는지(換喩)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무엇보다 평론이 작품이라는, 그러니까 현실에 드러난 그림에 홀려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했으니 답답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를 기획한 ‘기획전’이기도 하다. 그는 무엇보다 그림과 글자를 배치하는 공간연출에 힘을 쏟았다. 이 기획전의 연출을 위해 그는 그가 그린 그림들을 낱낱이 해체했다. 물론 2019년과 2020년의 그림들도! 자, 여기에 이 전시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있다. 가 펼쳐지는 공간은 하나의 사원이다. 서교의 공간연출이 욈과 그림과 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체험되어지는 방식의 전시였다면, 이번 기획전은 저절로 체험을 일으켜 욈과 그림과 글자를 관객이 뒤바꿔가며 재구성하고 재구축하는 ‘사건형’ 전시다. 관객이 전시에 개입해서 그림과 글자로 자신의 주문/경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면서,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화들짝 놀람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사건의 전시라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의도의 출발은 서교에 있을 것이다. 서교의 공간이 아니라 서교에서의 주제를 다시 불러냈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Muh Emdap Inam Mo”를 우물에서 다시 되비치도록 회돌이 시킨 꼴이랄까! 그는 이 사원의 구성을 위해서 집요하게 그림과 글자의 구조를 따져 물었다. 그것들은 단지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사원을 찾는 관객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자는 모두의 꿍꿍을 이어서 펼치는 거대한 그물코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하나의 꿍꿍 그물코는 그들의 거룩한 욈이어야 하고, 또 오롯이 그들만의 경전이 되어야 하니까. 그는 이 전시에서 그야말로 주문이 흘러나오는 공명 장치의 전시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3. “만물에게는 저마다 자아의 신화가 있고, 그 신화는 언젠가 이루어지지. 그게 바로 진리야.”
돌은 알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거룩한 얼(聖靈)이며 우주의 숨이다. 알을 깨고 날아오른 아프락사스처럼 돌도 스스로 깨지고 부서져야 새로운 세계를 연다. 옛 부터 현자의 돌은 연금술사들이 끙끙 앓는 화두였다. 그 돌은 올바르게 하는 돌이요, 금이 되는 돌이요, 깨달아 솟는 돌이요, 마음 비워 속알 키우는 돌이다. 그래서 그들은 알음 앓이로 그 돌을 묻고 또 물었다. 앎의 슬기를 키우는 나날이 깊었단 얘기다. 유라시아의 서쪽에서는 그 ‘없는 돌’을 새로 만들기 위해 미쳤고, 동쪽은 ‘있는 돌’에 글월을 새겨서 거룩한 돌로 바꾸었다. 연금술로 황금을 만들어 낼지라도 그 돌은 현자의 돌이 아니다. 그러나 솟구쳐 깨달은 이의 말씀을 새겨 넣은 돌은 거룩하다. 황규민은 네팔에서 사람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돌과 마주했다. 사람들은 그 돌을 만나면 왼쪽으로 돌며 빌었고, 아침에는 손으로 쓰다듬으며 “옹 마니 빳ㄷ메 훙”을 외웠다. 하루가 술술 풀리는 욈이다. 그러니 돌들은 돌이 아니라 말씀이었고 주문이었고 경전이었다. 거기에 부처의 숨결이 있었다. 말씀을 ‘말숨’으로 쉬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돌은 위대한 신비였다. 돌이 곧 말씀이므로. 돌은 없고 오직 말씀만 있으므로. 말씀이 하루하루 숨돌(氣運)로 솟아서 그들을 올바르게 했으므로. 해월(海月)은 세 받듦을 말했다. 하늘을 받들고(敬天) 사람을 받들고(敬人) 몬(物/地)을 받들라고(敬物). 하늘과 사람과 몬은 따로따로가 아니다. 돌(物)과 말씀(天)과 사람(人)이 하나다. 추사(秋史)의 벼룻돌은 밑창이 뚫리면서 그림을 쏟아냈고 글월을 쏟아냈다. 밑창이 뚫릴 만큼의 먹물은 도대체 얼마큼의 그림이고 글월일까! 돌은 그저 집집 우주의 시간에서 순간의 기억장치(USB)에 불과하고 벼룻돌은 그저 먹물이 솟는 샘에 불과할 터. 그런데 그 검은 물의 그림과 글월은 천년을 간다. 돌이 흩어진 자리에 말씀이 솟고 말숨이 솟는 까닭이다. 는 그림이 솟고 말씀이 솟고 말숨이 솟은 자리다. 돌이 깨진 자리다. 2020년에 먹을 가루로 갈아버린 설치는 이 전시에서 수많은 ‘화보그림’으로 뒤바뀐다. 그것은 상징이다. 그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베스트셀러였던 『개자원화보』를 빗대고 또 화론서와 비평서를 빗대지만, 화보그림의 거치대로 제작한 하늘(天), 물(水), 불(火), 비(雨), 돌(石), 흙(土), 풀(艸), 나무(木), 사람(人), 글·그림(書·畵)의 글자는 오래전의 옛 글자를 본떠서 만든 것들인데 돌이 흩어진 자리에 선 말숨의 글자들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들은 소리울림으로 우주를 당긴다. 그리고 그 위에 화보그림을 설치함으로서 그림과 글자가 하나로 엮여 울리도록 했다. 그가 배치의 기준으로 삼은 ‘이야기 담기’든, ‘테두리로 그리기’든, 아니면 ‘그림으로 그리기’든 관객의 참여는 어쩔 수 없이 공간을 흔들 것이고, 처음의 배치는 조금씩 뒤흔들리면서 다른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다. 사원은 또 한 권의 거대한 책이어서 그 입구에 새겨 놓은 빛(色)과 힘(力)을 얻어야 깨닫고 깨달아 그 속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자후로 크게 꾸짖는 소리에 놀라게 될 것이다. 할(喝)!
 
 

김종길 (미술평론가가)

(출처 = oci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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