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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김일지展_아스라이
기간| 2019.07.02 - 2019.07.29
시간| 11:00 - 18:00 / 입장마감 17:30
장소| 아트스페이스루/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110 PARK 110빌딩
휴관| 일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90-3888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일지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Aeurai
    2019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30.3×80.3cm

  • 다시한번
    2018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45×45cm

  • Aseurat
    2019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62.2×260.6cm

  • 무제
    2019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62.2×130.3cm
  • 			1. 보기에 아슬아슬할 만큼 높거나 까마득할 정도로 멀게 / 2. 기억에 분명하게 나지 않고 가물가물하게 / 3.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지 아니하고 희미하게 
    
    높이나 길이와 같은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높거나 멀게, 물질을 넘어선 정신의 기능이 분명치 아니하게, 물체의 진동에서 오는 자극이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상태를 일컫는 한글의 '아스라이'는 애매성을 수식하는 부사이다. '어찌씨'라고도 일컬어지는 부사는 사물이나 상태를 '어떻게'라는 방식으로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도록 수식한다. 하지만 '아스라이'는 부사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그것이 표방하는 구체성과 명확성을 흐트러뜨린다. 본 전시에서는 애매성의 '어떻게'를 살펴보고, 지우기를 극대화한 그리기의 가능성을 '이응' 안에서 실험하겠다.  
    김일지
    
    원(Circle)에 집착하는 이유 
    
     김일지 작가는 확실히 원(Circle)에 집착한다. 영국 유학시절 본격적으로 작업의 소재가 굳어지던 시절, 아니 지역예술가인 은사님을 통해 아크릴화의 표현기법을 배우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아니 부모님이 매일같이(日) 앎(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준 순간부터 원은 그녀를 지배했다. 확실히 그녀는 원처럼 산다. 매일같이 구상과 실험의 반복을 통해 작업물을 생산해 내는 것은 물론 오세아니아, 유럽, 미주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까지 쉬지 않고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직물과 단추를 이용한 입체작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비슷한 시기 다른 매체의 작품으로 전시를 병행할 정도다.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찾고 실험하는데, 내면의 에너지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원의 형태를 갖춘 바퀴, 공, 공전축은 동력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유효하다. 작가에게 내재된 끝없는 동력이 삶을 회전시킨다.
    
    원을 삶의 형태라 느낀 덕분인지, 회화 작업 또한 원의 형상이 주를 이룬다. 작품에는 거친 붓질로 그려진 추상의 배경 위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원들이 보인다. 하지만 원들은 배경 위에 '그려졌다'기 보다 '떨어져 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제작과정을 보면 바닥에 눕힌 캔버스 위로 먼저 원하는 배경을 그린다. 그 위에 마스킹 플루이드((Masking Fluid)를 원 모양의 도장처럼 찍는다. 병, 컵, 물감통, 화장품통의 아랫부분, 심지어 즉석밥 용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원형면을 활용한다. 시간이 지나고 마스킹 플루이드를 떼어내면 그 아래에 있던 레이어가 드러난다. 덧그린 것이 아닌 덜어낸 원으로 인해 다층적인 레이어가 뒤엉킨다. 그 과정에서 미디엄이 마르는 동안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기도, 이전 작품을 마감하기도 한다. 종결되고 시작되는 시점이 분명치 않게 작업은 계속된다. 원은 일종의 반복적 수련과 탐구의 흔적이다.
    
    원에 집착한다고 해서 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아름답게 형상화지는 않는다. 오히려 추상표현주의처럼 불규칙적이며 화면 밖으로 무한히 확장가능하다. (작가는 과거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미국유학을 시도했다) 조금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형상성에 대한 탐구가 아닌 작가의 무의식속에 부유하는 원들의 시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들은 마치 사람의 체내를 떠도는 적혈구처럼 작가의 의식을 이루는 세포들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리처드 플래너건(Richard Flanagan)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2013)에 원의 대한 상징성을 상세히 표현한 장면이 있다. 내용에 따르면 일본 시인들은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시를 짓는 모습을 공개하는 전통이 있다.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우연한 기회로 일본 임종시를 묶은 책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한 작품에 사로잡힌다. 18세기의 하이쿠 시인인 '시스이'는 임종을 앞두고 붓을 들어 시를 쓴 직후 숨을 거둔다. 그의 추종자들은 충격 속에서 그가 쓴(그린) 시를 확인한다. 그 시는 아래와 같았다.
    
    저자는 이 시(그림)에 대해 '갇힌 허공, 끝이 없는 불가시의, 길이가 없는 너비, 커다란 바퀴, 영원한 회귀, 원은 선의 안티테제, (저승으로 가는)뱃삯으로 망자의 입에 물려주는 은화'로 형용하면서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의 잠재의식을 구르듯이 지나갔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소설의 초반과 후반부에 수미상관 등장한다.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과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서사를 주인공의 시선으로 통찰했다. 원은 주인공의 잠재의식 속에서 삶 전체를 관통하는 깨달음의 기호로 작용했던 것이다.
    
    원의 상징성을 이야기하자면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불교의 교리중 하나인 윤회(輪迴)는 중생이 열반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경우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여 생사를 거듭함을 의미한다. 불교의 밀교에서는 단(壇)을 만들고 그 위에 불상과 보살상을 모신 후 수행의식을 하거나 공양을 드렸는데, 그 원형의 단이 바로 만다라(曼茶羅)다.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만다라는 윤원구족(輪圓具足) 즉, 둥근(圓) 수레바퀴(輪)를 이루듯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고, 모자람이 없음을 뜻한다. 원의 형상에 부처와 보살 그리고 온갖 덕을 망라한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서, 문학 작품에서 상징하는 원은 대게 삶과 죽음, 인간과 우주의 진리를 아우른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시간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관계는 원의 고리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김일지의 작업이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모두 내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의미는 작가의 생활 패턴과 작업의 소재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원의 형상으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원에 집착하는 이유다.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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