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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최용대 : 내면의 언어
기간| 2022.10.06 - 2022.11.09
시간| 11:00 - 19:00
장소| 갤러리초이/서울
주소|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9-28
휴관| 일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323-490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최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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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전시전경

    (이미지 출처 = 갤러리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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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갤러리초이)
  • 			침묵의 표면 위로 회귀하는 것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1. 대략 2012년도부터 최용대는 <숲>연작을 그려온 것 같다. 나는 그의 그림을 몇 차례 본 기억이 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한 풍경 속에 검은 나무 몇 그루가 직립하고 있는 그림이다. 격렬한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이는 날씨나 기후의 변화가 얹혀지기도 하고 빗질처럼 쓸고 가는 수평의 붓질로 인해 나무의 형체는 해체되거나 지워지려 한다. 의도적으로 온전한 형태를 지우고 은폐하는 동시에 그것을 애매한 이미지로 만드는 한편 정서적인 상황, 서정적인 맥락을 풍부히 제공하는 화면이다. <숲>이라는 제목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로부터 번져 나오는 비가시적인 묘한 기운에 겨냥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부재하고 사실상 물감의 물성이 촉각적으로 전이되는 한편 그것의 유동적인 흐름이 두드러지게 화면을 질주하고 있는 그림이다. 특히 나로서는 검은 나무 기둥들을 흐리게 하고 지우는 블러링(blurring) 처리를 흥미롭게 보았다. 그것은 특정 대상의 의미를 고정되지 않은 채 열리게 만드는 한편 구체적인 대상을 은연중 지우고 시야에서 자꾸 사라지고 멀어지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로 인해 그것은 결코 접촉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가 된다. 물론 그림은 가상이고 환영에 불과하지만 이 블러링 처리로 인해 더욱 묘한 간극이 발생한다. 자신이 그린 것을 의도적으로 허물고 지우고 해체하는 블러링 처리는 또한 사물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거부하게 한다. 이 의도적인 흐리기, 지우기는 의미론적 약속을 적게 하면서 주제를 지우고 말을 줄이고 수사를 최소화하면서 다만 보는 이에게 숲으로 대변되는,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표현 불가능성을 은연중 암시한다. 대신 보는 이의 참여와 상상력을 독려하고 참여시키는 모종의 공백을 제공한다. 그것은 동양화에서 흔히 접하는 운무나 여백의 설정과도 매우 유사한 장치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모든 화면 하단에는 적절한 높이와 폭을 지닌 빈 공간 (구체적인 형상이 부재한, 다만 흰색 물감으로만 채워져 있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화면 상단에 그려진 그림과 대비를 이루는 이 비어있는 공간은 그림의 영역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그림의 경계에서 표현된 것과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대등한 차원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당히 의식적으로 가설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숲의 재현이나 표현이 아니라 표현될 수 없으며 작가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자연/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그림은 숲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낯선 세계, 이상한 세계의 출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것을 가시화하려는 작업이다. 결국 숲이 아니라 마치 숲인 것과 같은 그런 세계다. 그림은 무엇인가의 재현인 동시에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고자 함이다. 알다시피 가시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성의 가시성’이 현대미술의 과제였다. 아니 애초에 미술은 그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과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
     
    
    2. 작가의 근작은 숲 시리즈에서 보여진 감정선을 건드리는 장면연출의 단서조차 죄다 지운 작업이다. 풍경을 연상시키는 수직선들은 사라지고 흑백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기존 색을 대신해 블루, 레드, 옐로우 계통의 몇 가지 단색이 제한되어 사용된다. 테이블 위에 캔버스를 수평으로 눕히고 스퀴즈로 물감을 밀고 나간 자취로 작업을 하거나 스퀴즈와 붓을 함께 하거나 혹은 붓질을 한 후 이를 헝겊으로 닦거나 물티슈 등으로 문질러서 마무리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연상시키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최소의 표현으로 그리는 행위와 흔적 자체만을 남기려 했다고 본다. 그 결과 화면은 여러 시간과 행위의 경로와 과정을 함축하고 기억하고 있는 무언의, 비시각적 영역들이 단일해 보이는 색면 아래 잠복해있거나 화면 위로 지난 사건들이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단순하고 간결한 조형 어법의 추구는 외형적으로는 단색의 추상 내지는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해 보인다. 추상은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하는 방식’(리오타르)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사실 그림은 재현과 비재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사이에서 일어난다. 재현의 불구성을 지적하는 일련의 추상은 없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자 부재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재현될 수 없는 것, 표현의 불가능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그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림은 무엇인가를 암시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대상을 지우고 삭제한다 해도 이른바 암시 효과라는 것은 지속해서, 끝없이 화면 위로 회귀한다. 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추상은 따라서 색과 선, 물질, 빛 그리고 화면 그 자체 등이 작업의 주제가 되고 이것들이 모여 그 무엇인가를, 그것(it)을 애매하고 모호하게 겨냥한다. 그것은 분명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마치 유령처럼 서성이는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추상이기도 하고 모든 그림의 운명이라고 생각된다. 최용대의 그림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는 것, 비가시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 표면 아래에 잠복해있는 그 무엇을 떠오르게 하는 데 있어 적합한 표현 방식으로 추상을 선택하는 한편 “표현의 최소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다.”(작가노트) 이렇게 작가는 가능한 수사와 표현, 정서적인 드라마를 지우고 간결하고 함축적인 화면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 결과 자연스레 극소화된 화면, 추상회화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담론에 충실한 추상이 아니라 말을 지우고 단순함을 추구하고 자유로운 그리기를 시도한 결과로 인해 불가피하게 귀결된 추상인 것이다.
     
    
    3. 작가는 사각형의 화면 안에 붓 대신 스퀴즈를 사용한다. 더러 붓과 함께 또는 붓만 쓰기도 한다. 스퀴즈는 작가의 신체가 보다 직접적으로 화폭에 밀착되면서 그 진폭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도구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실존적인 경험이 생생하게 기록되는 편이다. 의식이나 관념에 앞서 몸이 그림을 만든다. 자신의 신체가 화폭에 보다 직접 접촉되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간 흔적, 지표적인 것이 그림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화의 본질은 제작이 아니라 행위에 방점이 놓이게 된다. 스퀴즈는 캔버스 표면에 올려놓은 물감을 여러 방향으로 끌고 나가면서 이를 화폭 안으로 삼투시키며 일정한 궤적을 만든다. 사각형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매우 납작하고 평면적인 스퀴즈의 자취는 프레임에 의해 그림의 내용이 규정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외부가 내부를 견인한다는 얘기다. 한편 작가는 이렇게 만든 작업들의 일부를, 또는 붓질로 제스처를 남긴 화면을 다시 물감의 층으로 균질하게 덮거나 헝겊으로 닦거나 물티슈로 문지른다. 이는 <숲> 연작의 블러링 효과와 유사하다. 그린 후에 다시 덮고 지우고 흐리게 하는 일을 반복한다. 한편 스퀴즈와 붓질, 헝겊, 물티슈 등을 이용한 작업은 의식을 가지고 제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무의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에 가깝다. 결국 작가는 최대한 자유로운 상태로 그리고자 했으며 그림 속에서 가장 다양한 것을 가능한 생명력 있게 결합하려 한 것 같다. 지난 <숲>연작은 모든 대상을 짙게 가리고 은폐하는 안개 속에 흡사 유령처럼 출몰하는 나무/숲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물감의 흔적, 질료의 쓸려나간 듯한 흔적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었다. 안개는 낮의 세계, 가시성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안긴다. 망막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모호한 세계가 다만 질료가 되어 흐른다. 최근의 작품들은 이를 보다 더 밀고 나간 그림이다. 모든 것들이 다 녹아들고 지워지고 사라진 듯한 세계, 대상과 언어와 표현이 부재한 화면을 보여주지만 정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거나 소멸될 수 없는 것들,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존재한 모든 것들을, 가시성의 세계 이면에 자리한 비가시성의 것들을 침묵의 표면 위로 끝없이 출몰시키려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 갤러리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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