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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이명기 : TAKE A STROLL...
기간| 2023.02.01 - 2023.02.28
시간| 월-금 10:00 - 18:30 토 10:00 - 15:00
장소| 데이트갤러리/부산
주소|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298번길 5/2F
휴관| 일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1-758-984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이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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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무(無)의 서사




우리는 지금 아주 특별한 작가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그 작가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자기의 세계를 심연의 낭떠러지에 감춘다. 그러나 감추는 행위야말로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작가의 이름은 이명기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세계에 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또 하나는 불가지론자(agnostic)이다.” 이명기 작가는 후자에 속한다.

근대라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태어났다. 근대 이전의 과거는 확실한 믿음으로부터 문화적 토대를 쌓았다. 확실한 믿음은 신에 관한 절대적 신뢰였다. 근대, 즉 모더니티 역시 믿음이 있다. 모더니티의 근원은 역사의 흐름과 축적에 의하여 진리가 보장된다는 믿음에 있다. 따라서 모더니티는 세속화된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사유에서 신을 제거하고 사람의 이성적 사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토대에서 세계가 새로이 열린다는 태도가 모더니티이다. 신을 보류하여 인간의 힘을 내세우는 것이 그것의 기본 강령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식이 확고해지고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을수록 허무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허무감은 결국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사람은 죽음을 잊기 위하여 문화를 만들었다. 사람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예술을 통하여 잊을 수 있다.

예술은 한 예술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물질(매체)에 기입한 구현체이다. 우리는 작품을 바라보면서 예술가가 바라본 세계관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예술은 역사를 뛰어넘을 수 없다. 반드시 특정 시간과 공간에 구속된다. 예술은 어떤 예술가가 이전 예술가의 형식과 대화하고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인지 끊임 없이 질문하면서 태어난다. 이명기 작가는 과학이 발달하고 정보가 축적될수록 공허해지고 마는 우리시대의 불가사의한 진리에 관해 사유한다.

나는 어떤 것을 잘하기보다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보다는 미술을 잘 이해하는 한사람.……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보다는 인간 자체를 잘 이해하는 인간. 잘 살아가는 게 아닌 삶 자체를 잘 이해하는 삶을 바라며, 더 나아가 이 우주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이명기, 「작가노트」, 2022.


이명기 작가는 자기 삶에서 습득이나 실행력보다 스스로 이해의 선취를 요구하고 있다. 작가의 관심은 일상적인 일에서 예술로 나아가며, 예술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우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예술은 궁극적 형이상학적 질문과 일상의 편린 그 어디쯤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일상, 예술, 삶,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물질이 무엇이고 우주의 목적이 무엇이며 미래에 어떤 삶이 연출될지에 관하여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 하나밖에 없다. 나아가 열역학 제2 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너와 나를 포함한 우주는 열사(熱死, heat death)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여정이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이명기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모든 것은 허무로 사라지는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사실은)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다. 신은 만물을 낳고 낳지만(生生之謂易) 또다시 이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린다. 따라서 이명기 작가는 녹(綠, rust)에 관하여 사유한다. 녹은 절멸의 예고편이기 때문이다. 조각 작품을 만들 때 작가의 인위가 개입된다. 작가의 인위를 뛰어넘어 녹슮이라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개입된다. 누가 녹슬게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 자연스러움은 무엇인가? 신의 개입인가? 단순한 물리적, 화학적 현상인가? 아니면 섭리인가? 작용인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 말할 수 없는 지점은 심층적 무의식에 내재한 어두운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운하임리히(unheimlich)라고 말하거나 언캐니(uncanny)하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으스스한 두려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주지와 같이 이명기 작가의 작품세계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포스트 미니멀리즘은 미니멀리즘의 자가당착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 미술을 극복하고자 했다. 모더니즘은 예술가의 아이덴티티를 신화로 격상시켰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모더니즘에 신화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인마다 독특한 손의 터치, 붓질, 형질, 사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산업공정을 도입했다. 산업공정을 도입한 예술은 다시 작품 자체에 내재한 미적 특성보다 외부적 요소에 호소하게 되었다. 관객, 빛, 그림자, 소리와 같은 외적 요소가 감상의 요건이 되면서 미니멀리즘은 생기를 잃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전통에 있는 작가들은 근대적 숭고(modern sublime)를 도입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처럼 크기에서 관객을 압도하거나 작품 속에 관객을 가둘 수도 있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1954-)처럼 연옥과 같은 심연에 관객을 빠뜨리거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연상시키는 괴물의 뱃속으로 관객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에바 헤세(Eva Hesse, 1936-1970)처럼 미니멀리즘에 따뜻한 온기를 채워줄 수도 있었다. 모두 좋은 것이다. 반면에 이명기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전통에 무(無)의 서사를 주입하여 작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가 보고 듣는 세계를 현상(phenomenon)이라고 한다. 현상은 확률로 나타난 세계이다. 확률 이면에 있는 세계가 무(無)이다. 무(無)는 존재론적으로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숨겨진 세계를 무(無)라고 한다. 그 무(無)의 세계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녹을 갈아낸다(grind). 갈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짝이는 표면이 나타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녹으로 변한다. 이명기 작가에게 녹슮은, 녹슨다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확률로 나타난 현상 이면에서 세계를 조절하고 재단하며 운용하는 무(無)의 서사이다. 그것을 이름 지을 수가 없어서 현묘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운하임리히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사이즈나 제작연도마저도 밝히기를 꺼리는데, 제목 없는 작가의 2022년 작품이 있다. 쇠로 만든 사각형 프레임이 공간을 완벽히 점유한다. 사각형 프레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간 저편과 공간 이편을 완전히 분리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쪽에서 프레임 너머에 있는 저쪽을 바라볼 수 있다. 육신은 분리되지만, 시선은 공유된다. 좌우의 벽체는 이 프레임에 의하여 서로 만나게 되며 하나가 된다.

강철 철판을 벽면에 완벽히 박아 고정한 2021년 작업도 있다. 역시 제목을 갖고 있지 않은 이 작품은 공간에 묻힌 2차원 평면 회화인 동시에 압도적 기세를 내뿜는 조각이다. 이 작품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서 영원히 진동한다.

대구시 대봉동 굿아트스페이스 외벽에 설치한 2019년도 작업도 있다. 철판을 이어서 건물 외벽에 영구적으로 설치한 이 작품은 건물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따로 독립되어있다. 건물은 평면 철판 작업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배제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철학적으로 엄밀히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이명기 작가의 대표작 세 점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작가의 전 작품이 구유하고 있는 속성은 무(無)를 향한 서사이다. 철판이라는 물질은 산업사회의 기본 요소이면서 신비성을 품는 물질이다. 산업사회의 소재이기 때문에 세속적이다. 동시에 건물이나 공간의 부분을 점유할 때, 특히 수직으로 세워져 공간의 벽면 속으로 묻혀 잠입할 때,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위력을 연출한다. 세속적 가치와 초월적 힘 사이에서 끝없이 진동하며, 하나와 둘 사이에서 끝없이 투쟁하며, 분리와 일신(一身)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한다. 이명기 작가의 작품은 특정한 의미나 메시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나 메시지를 심연의 바닥에 숨기면서 오히려 강렬한 무(無)의 서사가 우리의 무의식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진명, 큐레이터․미술비평․동양학


(출처 = 데이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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