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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뿌리의 형태 - 나의 자리》
기간| 2023.02.02 - 2023.03.11
시간| 11:00 - 18:00
장소| 라흰갤러리/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용산동3가 6-30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534-2033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병주
김선희, 인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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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뿌리의 형태 – 나의 자리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어떤 방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행복해지고 나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이를테면 장작을 지피고 누웠을 때 열기가 편안하게 내렸다가 새벽녘이면 적당히 따스하게 식는, 아궁이 있는 흙방이 그러하다. 한 시인은 부드러운 흙이 단단한 바닥이 되어 몸을 받쳐주는 이러한 흙방을 논하며, 이곳에서 ‘흙 속을 파고드는 뿌리같이 깊은 잠을 자고 싶다’고 말했다.1) 그에게는 이 공간이 참된 휴식과 명상을 가능케 함으로써 우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만드는 안전지대, 말하자면 ‘뿌리 내리기’를 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번 《뿌리의 형태 – 나의 자리》 展을 다루기에 앞서 구태여 흙방을 첫머리에 언급한 까닭은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특정 장소에 관한 애착과 사유를 다름 아닌 ‘뿌리’에 대한 욕구에 빗대어 설명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본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공간은 작가와 관객 모두가 정주자로서 장소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영역이며, 우리로 하여금 실존적 내부성을 체험케 하는 곳이다.

 

기실 삶과 욕망의 표상, 혹은 사유의 집합체인 공간만큼 나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건설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래서 내 우주의 전체가 설치된 권역인 공간은 곧 ‘나의 자리’로서, 삶의 목적을 실행하고 세상의 의미를 감지할 수 있는 ‘기저’와도 같다. 그런데 물질로 공간을 구축하려는 몇몇 예술가들에게는 공간의 의미가 일과 존재의 목적을 일치시킨다는 위와 같은 보편적인 화두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가령 한정된 공간을 작업을 통해 무한히 넓히거나 좁히고, 때로는 빛과 그림자에 가라앉게 만들며, 공간 안에 구현한 결과물로 노동의 가치를 가늠하고 그것으로 타인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본 전시는 이처럼 작업의 의미가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어 공간 안에서 결실을 맺는 세 작가를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그럼으로써 전시는 작가들의 작업에서 각자의 뿌리가 되는 공간이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는지, 혹은 작품을 공간에 들임으로 하여 어떻게 이들이 ‘나의 자리’를 건설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본 전시는 작가가 만들어낸 공간을 관객이 자신만의 감각으로 읽어내기를 권유한다. 인간이 실재한다는 것은 바로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고 우리는 거의 모든 순간 특정 공간에 속하지만, 매일 만나는 공간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여전히 까마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인간은 태생에서부터 지닌 신체적 한계로 인해 인공의 환경을 반드시 만들어야 할 운명이며, 이렇게 구축된 산물이 나의 요건을 마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2)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공간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며 실존을 탐색할 수 있는 장 (場)이 절실히 필요하다. 《뿌리의 형태》는 이렇듯 전시장 내에서 각자의 원형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을 구현하고, 이곳에서 관객이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이 만남을 통해 성찰을 완성하는 데에 의미를 둔다.

 

# 차원의 갈피를 넘나드는 일 - 김병주

 

건축을 비롯한 일상의 공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헤게모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혹자는 시간을 눈앞에 오래 붙들어 봄으로써 현상을 낱낱이 파악해보기를 꾀할 수 있겠으나, 태만에 기울어지지 않고 정신과 행동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간이 시간을 초월해야만 한다. 김병주의 작업은 바로 이처럼 시공간을 둘러싸고 통용되던 상식에 역으로 대응할 갈망을 품고, 건축의 ‘표피’를 입은 형식으로서 배태되었다. 달리 말해 김병주의 작품에서 일견 특정 시대의 건축 양식을 연상케 하는 건물은 사적인 것을 나타내는 관념적인 오브제에 그치며, 중요한 것은 벽과 기둥의 뒷면, 겹겹의 구조물 사이로 포개진 어느 갈피들이다.



김병주의 작업은 따라서 차단되지 않는 시야로 구조물의 경계를 통과한다는 개념을 기치로 내건다. 그리고 그가 작품으로부터 견고한 형체라는 금속성의 차가운 안개를 걷고 꿰뚫어 보려는 것은 흐려진 경계를 오가며 중첩되는 시공간이다. 이 독특한 미지는 작품을 빚어내는 철망의 선들로부터 비롯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투시가 적용된 작업에서 작가가 조립한 선들은 작품의 내부를 막히지도 트이지도 않은 영역으로 만들고, 관객은 경계를 넘어 내부에 시선을 침투시키며 정면을 보는 동시에 측면과 후면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선이 바뀜에 따라 지금 시야에 들어온 일부가 미래에 볼 것으로, 혹은 과거에 경험했던 대상이 되는 등, 작업의 형태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궤도를 벗어나 고정된 시간성의 껍데기를 탈피하고 경계의 망각으로 향한다. 이윽고 작가는 충돌하는 차원 안에서 선으로 간신히 지탱되던 형상을 충돌케 하고, 종내에는 형상을 지움으로써 미증유의 공간성을 창조하고 있다.

 

한편 김병주 작가가 이와 같이 시공간적인 차원의 갈피를 전복하고 넘나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철의 재료적인 성질이 반석처럼 굳게 자리하고 있다. 조금의 변형 없이 직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철은 작가에게 이른바 무감각의 재료이다. 따라서 철로 구성된 작업에서는 재료의 물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그것의 울림이 ‘다만 존재할 뿐’이라는 무의미에 그치며, 덕분에 작업의 건축적인 형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쉽게 비우고 포갤 수 있는 단순한 오브제로 남게 된다. 정교한 단계들을 거치는 밑 작업의 과정도 철의 절제된 성질 밑에 숨죽이고 있다. 김병주의 작업은 그래서 완벽에 가까운 형식을 위해 고투하면서도 그것이 도회의 배경음인 양 어느새 누구도 이를 의식하지 않게 만들고, 관객이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작품에 대입하여 고유의 시공간성을 확장할 수 있도록 다만 허공을 끝없이 채워 나간다.

 

# 응축된 찰나 - 김선희



물려받는 가르침과 일상에 길들여져 정신이 무뎌진 탓인지, 무한한 감각이 몸을 구석구석 통과하면서 주입되는 듯한, 언제나 눈과 귀가 밝은 삶이란 어느새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특별히 빛은 감각을 작동시키는 제일의 레이어임에도 막상 이를 두 손에 담아 보기가 난해하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사례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김선희는 명징한 빛의 씨앗을 공간에 떨어뜨림으로써 감각하기 어려웠던 빛을 눈자위로 낱낱이 포착하고, 그만큼이나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모든 찰나를 미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의 시간으로 수렴시키기를 시도한다. 요컨대 김선희의 작업이 들어선 공간은 밀물처럼 내내 분출되는 빛의 에너지에 힘입어 공기 중에서 순간을 거듭 감지하게 되는, 그래서 순간과 영원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셈이다.



본 전시에서 그는 종이와 광택이 없는 아크릴, 드로잉을 수단으로 삼아 공간에 빛의 화환을 엮었다. 그간 각양의 재료들을 탐구했던 작가는 생각의 표현보다 오히려 물성을 빈틈없이 다루는 기술에 때로는 더 주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재료와의 접촉이 발생하는 순간들이 맹목의 무 (無)에서 부여잡는 경이가 아니라 여일하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빛을 거쳐야만 가능했던 필연임을 깨달으면서, 공간 전체에 편재하는 빛을 무구한 광채 그대로 손바닥에 담을 수 없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빛줄기와 한 호흡으로 시너지를 내는 재료, 혹은 최소한의 물성과 조형성을 지님으로써 빛에 완전한 추동력을 선사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했다. 김선희가 부드럽게 광선을 피워 올리는 종이나 고형체의 틈새에 물성이 완전히 잠긴 아크릴을 사용하는 까닭은 이처럼 굽이치는 빛의 조각들을 낚아, 여기 이 공간에서 인지의 작용이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내비치기 위함이다.

 

이러한 재료를 토대로 작가는 빛의 도달 거리와 그림자의 각도를 고려하여 공간을 기획하고, 모호한 깊이감을 지닌 큐브로 빛의 영역을 나타냄으로써 그것의 모든 찰나적인 언어를 정밀하게 풀이해낸다. 이와 같은 작업의 목적은 상술하였듯 현재의 순간을 진지하게 감각하지 못하고 조락과 사멸에 이르고 마는 인간의 의식을 새로 경작하는 데에 있다. 빛을 접하는 시작점을 제로 (zero)로 설정하여, 막연히 흘려보내기만 했던 빛이 바로 만물을 알게 하는 매개체였음을, 너무나 자명한 이 원리를 다시금 피력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산재해 있는 빛으로부터 무한한 감각의 가능성이 샘솟는 이 순간을 관객이 철저히 사랑하게 만들며, 눈앞의 찰나를 응축하여 영원한 것으로 승화시킨다. 감각의 황무지로부터 김선희가 잣는 빛의 실은 그의 공간에 다른 욕망일랑 들어설 틈을 주지 않고 이렇게 우리 주위를 회전하고 감싸는 중이다.



# 다정한 덩어리 - 인영혜

 

인영혜는 자신의 손끝에 빈틈없이 밀착된 바느질로 ‘완전한 제어와 조율’에 이를 수 있음을 발견하고, 공예의 다른 재료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섬유의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변화와 실험을 위한 폭발적인 도약을 시도한다. 정성과 끈기가 수반되기만 한다면 섬유는 과연 같은 원단 내에서도, 다른 재료와의 접합을 통해서도 수백 가지의 형태를 변주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의자를 비롯한 가구, 드로잉 또는 카펫처럼 바닥을 가득 채우는 작업 또한 이러한 시도를 거쳐 완성되었다. 용도를 먼저 고민한 다음 원단을 재봉하여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고, 이 주머니들을 하나씩 바느질하며 퍼즐 맞추듯이 자유로운 형태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인영혜는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내면의 언어를 작업에 송알송알 수놓으며, 그의 공간에서 관객이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좇아 나지막하게 가라앉도록 만든다.

 

작가에 의하면 과거 그에게 부딪쳐 왔던 치열한 현실은 자의식을 어딘가에 저당잡힌 채 공허한 정신 한 조각으로 간신히 세상을 대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작가는 자기를 망실하지 않도록, 의자를 비롯한 작업에 스스로를 포개고 가두어 자아의 바탕을 다지고자 했다. 작가의 구작에서 눈, 코, 입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바느질 사이사이에 두드러지거나 톡톡 튀는 색채를 사용했던 이유 역시 타인에게 결코 얽섞이지 못할, 자기만의 정체성의 푯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특히 인영혜의 의자는 그의 바느질에 남겨진 마음 찌꺼기의 흔적들을 가장 잘 드러내곤 했다. 인간의 몸을 지탱하는 의자는 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기에, 작가는 누군가의 안락함을 위해 그의 육체의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의자의 고단함에 대해, 더 나아가서는 의자 뒤에 있는 자신의 투쟁하는 존재에까지 관객의 생각이 어렴풋이 미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영혜는 바느질로써 자신의 미욱한 자아도 함께 꿰매어 관철해보려 했던 결의에 이제는 마침표를 찍었다. 대신 그는 아늑하고 온화한 마음의 결을 내밀 수 있는 함축적인 조형성을 찾고, 자족한 내면과 위트의 울림으로 작업에 영혼을 불어 넣었다. 가령 그가 출품작에서 주로 사용한 벨벳 느낌의 원단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오브제는 가구의 느낌보다는 섬유 예술로서의 소프트 스컬프처 (Soft Sculpture), 말인즉 ‘다정한 덩어리’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익살을 한층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드로잉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이러한 작업들로 채워진 인영혜의 공간은 결코 우연이 아닌 그 자신의 갈망과 필요에 의해 마련된 곳인 만큼, 작가와 마찬가지로 존재가 일종의 정신적인 차질에 고립되어 있던 관객과의 벽을 금세 허물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마련한 포근한 덩어리에 어느덧 몸을 누이고 쉬며, 타래에 파인 정겨운 주름살 하나하나에 즐거이 마음을 맞닿게 해본다.



조용미,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문학과 지성사, 2007), 14-15, 137-138.
김현진, 『진심의 공간 : 나의 마음을 읽다 나의 삶을 그리다』 (자음과 모음, 2017), 111.


(출처 = 라흰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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