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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박정현 : 0.917 - Unspeakable
기간| 2023.02.14 - 2023.03.30
시간| 10:30 - 18:00
장소| 갤러리CNK/대구
주소| 대구 중구 대봉동 722-3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3-424-0606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박정현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박정현 0.917_flag#1/flag#2
    2023 Acylic on canvas 1600x1600mmx2ea
    (이미지 출처 = 갤러리CNK)
  • 			갤러리CNK에서는 2월 14일부터 3월 30일까지 박정현 작가의 <0.917 - Unspeakable>를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에 드러나는 ‘0.917’은 작품의 소재이기도 한 텍스트의 숨겨진 91.7%와 드러난 8.3%를 일컫는 것이며, 이는 일부 보여지는 것들로는 실체를 알 수 없고,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작업이 작가 개인의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치유)하려고 했다면, 이번 전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양해진 구도와, 입체 작업으로 제시한다. - 0.917 말할 수 없으면 침묵해야 한다. -
    
    입체(설치), 회화 등 신작 20여점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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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기 힘든 진실이 재현되는 순간
    
    
    반이정·미술평론가·아팅(갤러리)디렉터 
    
    
    내가 쓰는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화면엔 빙산이 수면에 깊게 가라앉은 모습을 도안한 그림과 그 상단에 ‘헤밍웨이의 빙산이론 Hemingway’s Iceberg Theory’이라 적힌 이미지 파일이 하나 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독자가 책에서 읽는 부분이란 작중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와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일 뿐, 책에 적혀있진 않지만 저변에 작품의 깊은 의미 혹은 진실이 담기도록 작문해야 한다는 헤밍웨이의 문학관을 모형화한 그림이자 이론이다. 빙하에 떠 있는 빙산이 전체 부피의 8.3%에 불과하고 수면 밑으로 91.7%의 보이지 않는 나머지가 잠겼다는 자연 세계의 빙산 비율은 이처럼 문학이론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밖으로 나타난 인간의 언행을 지배하는 동력이 저변에 깔린 무의식이라고 가설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빗댈 때도 소환된다. 요점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과 핵심이 있다는 것이리라.  
    
    
    
    <0.917_ flag_산>(2023, 2400 x 800 mm)처럼 건곤감리를 변형한 이번 개인전 신작부터, <0.917>(2014, 200x200 cm, acrylic on canvas)같은 구작에 이르기까지 박정현이 물에 잠긴 빙산이 차지하는 질량 비, 비중比重을 주제로 작업에 임한 시기는 최소 9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렇지만 박정현의 오래고 일관된 주제에 참조 삼으려고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헤밍웨이의 빙산이론 이미지를 띄워 놨던 건 아니다. 공교로운 우연이다. 가까운 사이 중에도 소수에게만 털어놓는 내 세계관이 있다. 근래 몇 년 사이에 변화된 내 세계관을 빗대기에 수면 깊이 가라앉아 사람들이 보질 못하는 사안의 본질을 은유한 빙산 그림이 어울려서 컴퓨터 바탕화면에 얹어둔 것이다. 아울러 단도직입적인 메시지를 담은 자칭 타칭 예술 작품들이 일각에서 환호를 받곤 하는 세태를 딱하게 여겨, 예술의 본질은 수면 밑에 가라앉은 빙산처럼 묘사해야한다는 헤밍웨이의 이론을 나란히 깔아둔 거였다. 근 몇 년 사이 바뀐 내 세계관을 압축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안에 대한 공동체의 믿음은 실제론 진실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고, 그 이유는 어떤 사안이건 흑백논리로 단순명료하게 구분지어 전달하는 미디어 환경 아래에 공동체가 살기 때문이라는 것. 선정적인 주제로 연명하게 마련인 미디어의 생리 때문에, 공동체가 쓰는 의사소통법도 진실보다는 선정성을 담기 유리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 이게 변화된 내 세계관의 요지다. 
    
    
    
    박정현의 신작으로 구성된 개인전 <0.917-Unspeakable 2023.0214-0330 갤러리CNK>에는 주역의 8궤八卦에서 4궤를 고른 건곤감리 도상을 자기 스타일로 변형한 모형들이 자의적으로 배치된 연작이 출품되었다. 건곤감리의 제작 방식은 정해져있다. 일관된 폭을 지닌 긴 막대를 공식에 따라 나열하는 거다. 한데 박정현의 신작에 출현하는 건곤감리 가운데 그 공식을 따르는 작품은 없다시피 하다. 개별 막대마다 상단이 요철처럼 처리 되는 둥 변형되어 있다. 여기서 수면에 잠긴 91.7%의 육안으로 해독되지 않는 진실이 묻어있다. 건곤감리의 막대 위의 요철은 애국가 1,2,3,4절을 한글로 옮긴 문장 중 91.7%를 막대 안에 숨기고 8.3%의 상단 부위만 노출시킨 거다. 때문에 흡사 대도시에 일렬로 들어찬 마천루가 역광에 비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 혹은 진실을 담은 문장의 일부만 노출시킨 박정현의 건곤감리 신작 회화는 일견 추상회화로 보이며 실질적으로 동시대 추상회화가 맞다. 추상회화의 출발은 그림에서 이야기와 내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림에 이야기를 담아온 고전 회화들은 ‘문학성’을 취하기 때문에 미술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비평이 20세기 초중반 서양미술사에서 힘을 받아 추상미술이 전성기를 맞은 시절이 20세기 중반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내용과 이야기를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순수성에 집중해야 옳다는 근본주의 미학이 오래갈리 없었다. 다시 다채로운 이야기와 형식실험이 미술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2010년 전후로 한국 화단에서는 추상회화의 옛 영광이 미술시장에서 재조명되는 희귀한 사건이 일어났다. 단색화 광풍이다. 단색조로 채색된 추상회화는 화단, 정확히는 미술시장에서 10여년 가까이 유행을 탔고, 엇비슷한 모양새를 띤 추상화에 자기 스타일을 입혀 장식품처럼 유통되기도 했으면 지금도 그 흐름은 유지되는 중이다. 이 같은 시장의 쏠림을 막을 방법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21세기에 출현한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회화는, 20세기 초중반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미학적 출발점이 같을 순 없다고 나는 믿는다. 작가의 세계관을 담되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는 것도 한 착안이라 생각한다. 흡사 물밑에 가라앉아 가시권 밖으로 밀려난 91.7%의 빙산이라는 구체적인 내용물처럼 말이다. 국내외 미술판에도 이전과 다른 회화 경향이 출현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수년 전부터 ‘새로운 회화’라고 스스로 칭해왔다. 2014년 전후로 제작되어 지금에 이르는 박정현의 평면 작업 연작도 그 분류 안에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박정현의 지난 작업 포트폴리오부터 검토하면서 해석을 끌어낼 키워드나 문맥을 적어나갔다. 앞서 반복한 91.7%의 빙산 혹은 질량 비, 비중比重으로 수치화한 0.917도 있었고, 공동체의 많은 이들이 가담하는 허구적 의사소통법도 있었고, 합의된 공식에서 빗겨난 세계관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진실 됨에 관해서도 메모해뒀다. 이것은 그녀가 영국 유학시절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수평이 기울어진 ㄷ자형 탁자 연작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이 연작은 이번 개인전에서는 <T_ables_embrace>(2023, 1500x1800mm acrylic on canvas) 같은 작업에서 변형되어 출품되었다. 탁자를 뜻하는 영단어 table의 맨 앞 영문 대문자 T는 뜻밖에 외발로 세워진 탁자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때문에 <T_ables_embrace>라는 작품 제목은, ‘탁자의 여러 가능성(able)을 포용한(embrace) 결과물’처럼 풀이되기도 했다. 그게 작가 의도인진 나는 모르지만 그렇게 풀이해도 되리라 본다. 영국 유학중 제작한 <Table>(2009, steel&rubber, 170x70x120cm)이나 2013년 모국에 입국한 후 대구미술관에서 발표한 유사한 탁자 설치물을, 탁자로 쓸 수 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여기에 ‘공동체가 합의한 공식에서 빗겨난 세계관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진실’이 예술과 디자인의 중간 형태로 재현된 모습을 보게 된다. 수평이 기운 탁자 상단에 컵을 흘러내지 않도록 조심히 균형 잡아 얹고 사무를 보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할 필욘 없지만 사용할 순 있다는 얘기다. 해서 <T_ables> 연작은 순수미술과 응용미술로 나뉘는 시각예술 구분법을 포용하되, 그 둘이 공존하는 여러 가능태 중 하나로 제시한 것처럼 보였다. 디자인의 실용적 도구(탁자)의 외관을 갖추되, 실제 사용하진 않고 작가의 상상력이 투영된 창작물로서 말이다. 
    
    
    
    가구의 쓸모를 낮게 변형시킨 평면/설치물이나, 읽힐 수 없게 완벽한 문장 중 8.3%만 노출시켜, 내용을 담되 그것을 파악할 순 없게 만든 동시대 새로운 추상회화까지, 구작부터 신작 사이 박정현의 미적 태도는 이번 개인전 제목에 포함된 0.917 혹은 몇 달 전부터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띄워둔 빙산이론으로 수렴되는 것 같다. 공동체가 합의해서 익숙해진 여러 삶의 공식들이 잘못된 건 아닐 게다. 그 공식들은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운행시키고 있다. 그와는 별개로 진실을 인식하는 능력은 다른 문제이리라. 수면에 잠긴 빙산의 본질은 91.7%이며, 박정현 개인전 제목처럼 ‘표준이 되는 어떤 물질과 같은 부피일 때 질량의 비’를 수치화해서 0.917로 표기되기도 한다. 전시 제목으로 택한 0.917는 자연수自然數 가운데 가장 작은 1보다도 비중이 낮게 보인다.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91.7%를 인식하는 인류의 비율은 0.917%일 정도로 적다고 과하게 풀이하고 싶은 심경이 내 안에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럴 순 없어도 예술의 ‘찐’은 수면에 가라앉은 91.7%를 어떤 방식이건 세련되게 보여줘야 하며, 0.917%만큼 낮은 비율의 진짜 안목을 담아야 한다.
    
    (출처 = 갤러리C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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