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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컬러풀 한국 회화 - 조화(調和)에서 정화(淨化)까지》
기간| 2023.03.03 - 2023.04.15
시간| 10:30 - 18:00
장소| 아트스페이스3/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7-33/지하1층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0-5322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강하진
권순철
박재호
오수환
이강소
이봉열
최상철
하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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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전시전경

    (이미지 출처 =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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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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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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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아트스페이스3)
  • 			*전시 오프닝: 2023.03.03 (금)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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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러풀 한국 회화 - 조화에서 정화까지
    
    심상용(서울대학교 교수/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
    
    1. 왜 ‘컬러풀 한국 회화’인가?
    
    8인 8색의 삶과 예술
    
    《컬러풀 한국 회화》전의 여덟 명의 작가는 역사의 같은 시간대를 지나왔다. 1937년생인 이봉열을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해방 전후에 태어났다고 보아도 좋다. ‘해방: 구속이나 억압,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함’,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미학적인 용어가 달리 있을까. 이들 모두 1945년 해방을 맞은 이 나라 회화사의 초석을 닦아 왔다는 것 외에도, 어떤 선연한 동시대성의 공유가 마땅히 존재한다. 그로 인해 이들이 역사의 대변자가 아니라, 역사가 이들의 대변자가 된다.
    물론 삶의 여정, 예술에 대한 태도만큼은 8인 8색 팔색조다. 추상/구상의 구분이 크게 무의미하긴 하더라도, 형식적으론 권순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추상화가다. 권순철의 회화도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같은 추상이더라도, 각각의 미학적 지향은 구상/추상의 간극 만큼이나 달라 그 조화가 참으로 멋스럽다.
    
    한국미술사 맥락에서‘컬러풀’의 정의
    
    ‘단색’이 한국을 대변하는 미학의 표제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팔색조 같은 한국미술의 변화무쌍한 매력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저변에선 한국 추상회화사의 명백한 오독, 상품경제의 편입 안에서 그리고 우리 미술의 정전화된 경직된 읽기 안에서 조급하게 공식화된 오독이 목격된다. 예술 읽기마저 유익한(?) 정보를 실어나르는 도구를 자처하는 신자유주의적 지식의 풍토가 침투된 탓에, 정작 우리가 성취한 조형적(기표), 미학적(기의) 수준, 독자성이 제값에 맞게 독해되지 못한 것이다.
    1970, 80년대 추상미술 읽기가 그렇다. 추상은 저 먼 이상향의 일만도, 일상과의 단절을 시종 재촉하는 것만도 아니건만, 지고지순한 관념의 삽화로만 읽는 독법 일변도였다. 내용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추상이 난해한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엘리트주의의 산물인 것만도 아니다. 이 세계가 모두를 위한 진주가 되긴 어렵겠지만, 이 세계에서도 느끼고(감성), 음미하고(운률), 발견하는(의미와 상징), 모든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컬러풀 한국 회화》전에 담긴 여덟 개의 세계를 보라. 그것들 가운데 가장 그것과 멀어 보이는 것에서도, 반추된 자아와 세계 인식의 태도가 컬러풀하게, 선형 궤도가 아니라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반영되어 있다.
    
    목록의 은총
    
    이 여덟의 세계를 관류하는 하나의 일치하는 관점, 회화적 신념, 미학적 태도는 부재하다. 하지만 이 통합, 범주화의 실패야말로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은총이라 해야 하리라. 범주화의 집착에서 잠시 떨어지는 은총.
    이 은총 안에서 나는 이 세계들을 가공된 사회적 위상이나 이미지가 아닌, 연구나 독해의 대상, 주장이나 알리바이, 증거물로서가 아니라, 그 제각각의 것들로서 만난다. 분류와 범주화라는 비겁한 보호막, 개념의 중개나 중재를 벗어던지고서, 날 것의 그것들 자체로서. 은총이 아니고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하나의 사례: 이봉열은 일찍이 국전 추천작가상을 수상하고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강하진에게 국전은 ‘원칙과 문법이 없는 화단정치’의 연장선 상이었다. 일정한 노선의 차이에도, 두 이름 모두 이 땅이 성취해온 예술의 금자탑에서 더 없이 소중하다. 예술이 국전과 비국전, 좌와 우의 분열을 능히 넘어서는 이유는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깬 의식에 있다.
    또 하나의 사례: 하동철의 충분히 차갑고 중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기하학적 추상성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의 표상인 꽃상여와 신비하고 초월적인 빛의 환상을 오간다. 가장 한국적인 것, 고난 당한 땅과 그 땅의 사람들에서 오는 뜨거운 표현을 구축하고자 추구했던 권순철의 노선은 어느덧 예수상으로 흐른다. 추상과 구상, 모던과 민중, 이런 이분법은 무의미하고 무지하며 무엇보다 비인간적이다.
    
    예술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하고, 범주화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만나고 경험하고 즐기는 방식이어야 한다. 나의 진부한 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 여덟 개의 목록은 나를 더 세게 흔들어 잠에서 깨운다. 늘 그렇듯, 깨달음의 순간은 노력보다는 기다림을 통해서 다가온다. 진실은 언제나 해답이 아니라 만남의 형태로 다가온다. 그런 만남의 순간만 우리로 어설픈 해답을 움켜쥔 채 즐거워하는 어리석은 자의 권좌를 박차고 내려와, 겸손하게 질문하는 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한국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접붙임의 비유
    
    우리 미술의 현대사는 서구 미술의 접붙임에서 시작된 측면이 크다. 접붙임의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접붙여지는 곳에는 이미 절단의 아픔이 있고, 접붙임으로 돋아나는 어린 가지는 그 상처를 안은 채 자란다. 제대로 된 접붙임은 그저 막대기로 지지하거나 끈으로 묶는 정도가 아니다. 접붙임의 성패는 접붙임 이후, 곧 뿌리에서 수액을 전달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본 가지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 혁명의 성공이 다음 날 민중의 지지로 판가름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처럼, 접붙임은 상처를 동반하고 뿌리와의 부단한 교신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이다.
    《컬러풀 한국 회화》전의 여덟 명의 작가는 (예외와 차이가 있긴 하다) 한편으론 서구 미술의 접붙여진 문법을 예의 익히며 성장했고, 다른 한편으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질곡의 요인들을 생명의 수액으로 포섭하면서, 수용된 미학을 독립적으로 소화하고 독창적으로 경작한 결과를 주로 1980, 90년대에 발표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의 회화의 저변에서 벗어나야만 했던 수용의 자취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체화의 흔적을 보아야만 한다.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숲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자, 누구든 다른 길을 가야 하나니...”우리의 우리 미술사 읽기가 누락해온 맥락이다.
    
    시의성으로서《컬러풀 한국 회화》전
    
    《컬러풀 한국 회화》전의 저변에는 또 하나의, 훨씬 더 위협적인‘디지털 단색화(digital monochromaticize)’에 대한 시급한 인식이 깔려 있다. 모노크롬의 뜻은 검은색과 흰색, 회색조 외에 다른 컬러가 쓰이지 않은 상태를 넘어, 작금의 디지털 문명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 결정적인 조건은 전통적인 예술의 시간보다 일곱 배는 빠르게 흐르는 ‘NFT 아트’의 시간이다. 오늘날 이런저런 예술 붐(boom)을 분주하게 야기하는 시간, 갓 첫걸음을 뗀 아이를 이내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로 둔갑시키는 시간이다. 비즈니스나 마케팅의 차원이라면 유토피아적 생태계다. 하지만 예술로선 디스토피적인 재앙의 시간이다. 일곱 배나 빠른 시간을 인식의 범주로 산술적으로 치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196,70년대의 사건과 우리 사이에는 개략 350년 정도의 시차가 벌어지게 되는 셈이다. 이 정도면 공감이나 연대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소통조차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1970, 80년대의 예술혼, 청춘을 불사르도록 촉구했던 열망, 좌절과 극복의 연대기가 벌써 잊혀진 사건이 되고, 기억 상실이 일상이 되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 흐르거나 느리게 흐르지 않는다. 이 행성의 지전과 공전 질서는 적어도 아직은 견고하다. 다만 더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과 그로 인한 감각과 인식 상의 왜곡이 있을 뿐이다. 즉 디지털 시대의 인간이 이전보다 7배나 더 많거나 풍성한 삶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산업기술과 사회적 기제에 대해 프랑스의 이브 미쇼(Yves Michaud)가 적절하게 지적한다. “예술의 시대는 사건들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뭔가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무엇이? 하지만 이 질문은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전시, 개방된 표현, 새롭게 등장하는 참신한 주제 등이 생겨나는 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동일하고 덧없는 사건들을 짧은 간격으로 배열하는 것으로, 이때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전쟁이라도 치루듯, 동원 가능한 자원을 긁어모아, 사건들을 아침저녁으로 쏟아붓는 것으로, 새롭다거나 기괴하다거나 하는 라벨을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글로벌 이벤트들, 아트 비엔날레, 아트 페어, 각종 축제... 새로운 정보들이 쉴새 없이 생성되고 유포된다. 지역성을 숙청시키는 면허증 소지자들이 분주하게 날짜 분계선을 넘나든다. 지침들이 매일 새롭게 제공된다. 일곱배나 빠른 시간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을 위한 도덕적 자책감도 중요한 레퍼토리들 가운데 하나다. 각성을 촉구하고, 의지를 충동질한다. 최종 목표는 상품경제의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감추고 생각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속도 자체의 파시즘적 속성이다.
    《컬러풀 한국 회화》전의 아날로그 시간은 시몬느 베이유가 현대의 세 가지 괴물 가운데 하나로 꼽았던 기술, 일곱 배 빠르게 흐르는 디지털 시간, 사유의 단색화를 재촉하는 기술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 함께하는 여덟 개의 세계의 공통점은 족히 일곱 배는 되고도 남을, 공허한 사건들의 부산한 나열에 그때그때 휩쓸렸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2. 컬러풀 스펙트럼
    
    색과 빛의 출처 : 강하진-하동철 :
    Hajin Kang – Dongchul Ha : The Source of Color and Light
    
    “유달리 감성적인 한국인”의 미적 기질을 감안할 때,‘야수’나 ‘다다’, ‘엥포르멜’에 이리도 부채가 없는 세계를 구축한 사례는 흔치 않다. 이경성이 하동철의 회화를 두고 했던 말이다. 좋은 관찰이지만 관찰만으로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하동철 회화를 밝히는 빛은 감성적이다. 그 빛은 어릴 적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보았던 빛”이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꽃상여의 빛”이다. 다만 그것을 표면화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라.”강하진은 말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또한 신뢰하려면 작가가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창작에 대한 생각과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기는 하나, 나는 한 번도 선생-강하진-의 작업에 대하여 의문을 두지 않았다.(이종구) 그 세가지 근거로는 세 가지를 든다. 진정성, 치열한 태도, 깊은 도량. 참된 가치요, 이력서에 담기지 않는 이력이다.
    하동철의 빛은 그 근원에서 그리움과 초월과 마주한다. 강하진의 색은 점을 찍고 지우는 행위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물화(物化)의 산물이다. 비물질은 물질세계에 닿아있고, 색은 땅과 우주의 교제에서 비롯된다.
    
    감각의 필터들: 이봉열-박재호
    Bongreal Lee - Jaeho Park : Sensory Filters: From Harmony to Purification
    
    한때는 구성적 요소, 감성적 터치의 운행마저 내려놓았던 이봉열의 회화에 다시 목화 봉오리가 맺혔다. 김복영은 이봉열의 부재에서 ‘달관의 경지’를 논하지 않았던가. 이봉열의 감각은 표현할 때가 아니라 절제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애착이 아니라 애착을 버릴 때 감각은 날 선 직관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부드러운 앵포르멜, 첨예한 부재, 그리고 고향의 목화송이다. 이것은 엥포르멜도, 모노크롬도, 감각의 드로잉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이봉열일 뿐이다.
    박재호의 감각은 서정의 숙성으로 향한다. 그 감각질에 의해 서정성은 덧없는 유희의 덫을 피하면서 동시에 빈혈의 관념에 매몰되지 않는다. 감각은 필요한 딱 그만큼의 조형을 계량해내는 고도의 균형추이다. 이 균형추가 없을 때 회화는 수다스러운 입, 천한 개념놀이로 떨어지고 만다. 이 감각에 이끌릴 때, 회화는 불가지적 영계(靈界)를 헤매거나 무의식의 심연으로 낙하하고, 고졸한 관념의 향로를 별도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명상과 수행의 긴장: 최상철-오수환
    Sangchul Choi – Sufan Oh : Tension Between Meditation and Practicing Asceticism
    
    돌이 구르며 남긴 궤적이 1 천 번 겹치면서 톤(ton)을 만들어낸다. 작가 주체는 한결 뒤로 물러난다. 최소한의 개입이다. 무의식인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이 소환되는가? 아니다. 하지만 돌이 구를수록 의식은 또렷해진다. 무의식이 아니라 선연한 의식이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우연성은? 하지만 최상철에서 뇌관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모든 것은 결정적으로 중력에 이끌린다. 저항하지 않기 위한 저항이랄까. 최상철의 드로잉은 물리법칙의 순리를 따르면서, 지난 세기의 ‘반예술’의 넌센스를 조용히 나무란다.
    오수환의 선은 힘이 있으되, 그 힘은 대상에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운행에서 오는 힘이다. 태도는 분명하지만 예측은 불허다. 선언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다. 행위이되 욕망이 비워진 행위다. ‘비운다’의 의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진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 스스로 수동태가 되는 것, 무심(without intention) 미학이다. 마음을 비워야 영혼은 잔잔해지고, 의식의 안개가 걷힌다. 행위는 덧없는 기능에서 자유로워진다.
    
    미(美)의 벡터로서 붓 터치: 이강소-권순철
    Kang-So Lee – Sun-Cheol Kwun : Brush Strokes as an Aesthetic Vector
    
    감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야 한다. 붓이 가는 대로 하지만, 마치 뱃길이나 하늘길처럼. 붓은 가야할 곳으로만 간다. 붓에 마음을 실는 게 아니라 마음에 붓을 담그는 것, 그럴 때 붓은 감각이 이끄는 만큼만 간다. 붓 끝에서 맑은 정신, 청명한 기운이 감돈다. 머무름에서 생성되는 독소(毒素)들, 애착, 집착, 매몰이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새나 나룻배를 그리더라도, 반쯤만 재현이고 나머지는 표현이다.
    운명, 역사의 소용돌이, 모두 필연성의 묘사다. 권순철의 회화는 필연성의 고백이다. 그 자신의 고백이고, 사람들의 고백이고 시대의 고백이다. 이강소가 흘려보내는 것을 권순철은 애써 붙잡는다. 이강소가 메타인식을 논할 때 권순철은 땅의 인식을 부여잡는다. 이강소는‘사람다운 삶’의 미적 등가물로서 회화를 말한다. 권순철은 ‘좋은 표정을 가진 선한 얼굴’에서 그것을 본다. 두 세계의 저변에 두 작가의 도덕적 인격이 스며있다.  
    
    
    (출처 =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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