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19.08.01 - 2019.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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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9:00 - 23:00 |
장소| | 레드엘 갤러리/대전 |
주소| | 대전 동구 용전동 143-13/교차로빌딩 1층 |
휴관| | 연중무휴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42-622-1669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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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장미라는 작품명제 현대미술, 특히 그리기에 대해 말이 많아도 회화 고유의 즐거움은 분명 존재한다. 아직도 회화가 종지부를 찍지 않은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감과 캔버스, 그리고 미술가의 손이라는 단순한 구성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적어도 지구상에 미술가가 존속하는 한, 회의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올 것 같지 않다. 박중현의 회화로부터 이러한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의 그림은 소위 장미를 그린 것인데, 이게 자칫하면 클리셰로 흐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너무 많은 작가들에 의해, 너무 많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장미는 이렇게 단순하게, 혹은 일괄로 묶어서 이야기하기에 걸맞지 않다. 분명 장미이긴 한데 뭔가 부연설명을 요청한다. 누구나 그의 그림을 보면 장미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품제목도 분명하다. ‘로즈 세션(Rose Sessions), 그 다음에 일련번호가 붙어있고, 인생의 꽃(fleurs dans la vie)’ 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꽃이 가진 특유의 회오리 모양의 꽃잎구조와 색상도 장미의 특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문제는 그림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에 발생한다. 감상자의 눈에 장미를 사라지고 안료 그 자체만 다가오게 되어 있다. 즉, 회화의 재료 그 자체, 질폭한 물감덩어리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쯤 이르게 되면 이제 장미라는 이름은 무색해진다. 물질만이 감상자 눈앞으로 다가올 때, 작품에 어떠한 이름이 붙여지더라도 무관할 판이다. 그럼에도 박중현은 장미라는 이름을 자신의 작품에 부여했고, 실제로도 장미꽃을 그렸다고 말한다. 우연하게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장미가 등장하는데, 작품내용에 장미이야기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중에서야 에코는 장미의 상징성에 대해 말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라는 게 별게 없다라는 사실이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제멋대로 붙여진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중현의 작품을 보면서도 거의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장미를 그리고 있지만 그에게서 있어서 장미 역시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 굳이 작가자신이 장미에 의미를 부여해서이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냥 꾸며진 꽃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물감의 나선형 구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림은 재료의 유희이며, 동그란 형태를 수없이 반복한 것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에게 있어서 장미란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긴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 즉 슬픔, 환희, 아이러니, 갈증, 좌절, 운명이다. 곧 사람의 이야기다.’(작가노트) 즉, 그는 장미가 가진 자연생태학적 미감을 넘어 그 형상을 빌어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여기서 제작자와 감상자, 곧 저자와 독자 간의 틈이 벌어질 수 있다. 작가가 어떤 계기로 인해 장미에 몰입했다 해도 이는 개인적 정서에 국한된다. 즉, 장미에 대한 또 다른 해석과 관조자만의 그림읽기가 가능하다. 결국 저자의 죽음을 통하여 독자는 새롭게 탄생되어야만 한다. 이제 작가는 자신의 작품해석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관람자의 감상을 온전히 도울 수 있다. 작가는 장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작품이 공개되는 이상 장미에 대한 그의 개별적 의미는 상실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비단 박중현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오랫동안 예술작품에 의미를 부여해왔고, 감상자는 그 의미에 종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이미 의미를 잃은 세계에 또 다른 형태의 의미를 추가하는 일이다. 감상자는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미를 읽는다. 박중현의 조형적 특성 박중현의 작품은 즉흥성과 속도감, 직관적 손작업이 특징적이다. 반면에 꽃 봉우리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는 구축적인 면모도 보인다. 그 결과 그는 감각적이고 감칠맛 나는 회화를 만들어내었다. 결국 장미를 바라보는 작가 개인적 상념이나 감정 등의 부수적인 요소는 길을 잃고, 미술의 시지각적인 요소만 남는다. 작가의 개별적 사유와는 무관하게 그림은 작동된다 는 뜻이다. 타자에 의해 작품이야기가 확장되는 것. 이는 현대 미술이 응당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박중현의 방법은 미술이 미술일 수밖에 없는 재료를 극대화 했다. 그의 화면은 캔버스와 오일의 결합만이 주는 단순미가 있다. 감상자는 그의 작품을 바라봄에 있어서 장미라는 명제에 현혹되지 않아도 된다. 반복적이되 유려한 그의 회화를 그냥 즐겁게 바라보는 것. 여기까지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온당한 방법이다. 박중현의 회화는 결국 평면적 미감자체를 다루고 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장미꽃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깊다. 의미에 대한 냉담성을 강조하는 현대미술과, 의미를 부여 하려는 작가 입장 사이에는 간격이 발생한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틈새가 벌어지는 셈이다. 이는 펜을 쥔 이와 붓을 잡은 이의 시각적 차이점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에서 의미가 제거되었다고는 하지만, 작업에 대한 계기가 없다면 이 또한 넌센스한 일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각자의 세계를 지닌다. 예술이 지금도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다양한 생각들로부터이다. 예술가만큼 주어진 일상과 세계에 민감한 이도 드물 것이다. 주변에서 마주치는 단순한 사물이나 사실도 그저 지나가는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견지에서 보면 장미 한 점 한 점에 사람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장미는 인간의 군상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꽃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강렬한 채색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곳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표현된 꽃의 두께와 작은 틈새사이에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새길 수 있다. 박중현 작가는 지난 날 수많은 꽃을 그렸음에도 이제 장미만 남았다고 말한다. 세계는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일상에서도 그러하지만 작업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세계는 곧 장미꽃이었다. 다른 꽃으로는 장미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장미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부분 실존적 고민을 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장미에게 묻고 답한다. 장미를 통해 자기를 의심하고 질문을 이어간다. 그러나 질문에 대해 세계는 쉽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에 대해 답변 없는 세계.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일과 흡사하다. 그는 장미를 통해 세계에 대해 한발 한발 다가서려하지만 존재에 대한 즉답을 얻을 수 없다. 박중현은 이 때문에라도 장미연작을 통해 지속적으로 삶의 질문을 툭툭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작은 보람이 있다면 작품 활동을 통하여 수용자와 만나는 일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작업행위가 무의미하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화려하고 풍성한 장미꽃 이면에 작가자신의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 결과 그의 장미는 매우 다양한 표정을 지니게 되었다. 장미는 흔한 그림소재라 자칫하면 묻혀 버릴 가능성이 있었 다. 그러나 박중현은 작업형식을 바꾸어버림으로써 이를 극복했다. 말하자면 ‘잘 그린’ 장미로서가 아니라 ‘추상적 물감 덩어리’로서의 작품을 구현해낸 것이다. 적잖은 깊이감과 붓의 움직임, 그리고 오일칼라 특유의 두터운 맛을 화면 전면에 내세웠다. 게다가 원근법이나 3차원적 공간감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올 오버 페인팅이 주는 장점을 곧, 화면의 균질성을 추구했다. 공간의 확장감, 팽팽한 장미꽃들의 긴장감은 회화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장미를 다루면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가는 드물다. 그의 작업이 세상의 많은 장미그림 중 또 하나를 추가했다라고 조급하게 판단하기 이전에, 작품이 지닌 이면을 살펴보길 권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