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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양화선 : 너무 짧은 낮 Daytime is Way Too Short
기간| 2023.05.12 - 2023.06.06
시간| 11:00 - 18:00
장소| 라흰갤러리/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용산동3가 6-30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534-2033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양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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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양화선 너무 짧은 낮
    2023 Oil on linen 45.5x53cm
    (이미지 제공 = 라흰갤러리)

  • 양화선 친절한 프랑스
    2023 Oil on canvas 53x45.5cm
    (이미지 제공 = 라흰갤러리)

  • 양화선 오늘도 우체국
    2023 Oil on linen 53x45.5cm
    (이미지 제공 = 라흰갤러리)

  • 양화선 양화선_움직이는 작은 그림자
    2023 Oil on canvas 53x45.5cm
    (이미지 제공 = 라흰갤러리)
  • 			달콤한 덫의 예감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 사물과의 관계를 묘파하기
    
    누구에게나 결여된 것만 같았던 자유와 유희의 시간이 예기치 못하게 주어진 채로 무한정 길어질 때, 그것은 살아가고 체험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마비이자 올무가 된다. 마지막 개인전을 끝으로 영국에 돌아갔던 양화선 작가는 그에게 잇달아 닥친 락다운 (Lockdown)과 부상이라는 신산을 겪으며, 바로 이러한 불가피하고 공허한 나날들을 매일같이 버텨야만 했다. 그러나 작가는 수심으로부터 뻗는 우울과 고통을 이내 철저히 음미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을 소일’함에 따라 오히려 희미하게나마 행복을 갈구하고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어렴풋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끝없이 쓸려 넘어지고 가라앉을 것만 같았던 양화선의 의식이 태엽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약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덧없이 미끄러지던 지난 일상으로부터 작가가 숨통을 틔울 수 있었던 동인은 바로 이전까지 무료한 시간의 갈피를 넘기고자 단지 일종의 수단처럼 행했던 것들을 아끼고 존중하게 된 점에 있었다. 가령 그는 빵을 굽거나 식물을 키우고, 실내 공간을 가꾸는 등 아주 가깝고도 소소한 행위와 대상을 서늘한 구석으로 습관처럼 밀어 넣지 않고, 이로부터 스스로를 관찰하거나 작업을 둘러싼 회의, 내면의 소리를 직시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특정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익히 알고 있던 개체가 표면 너머로 빛을 발하며 자신에게 심장의 고동이 되어주었던 현상에 벅차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양화선은 계속되는 어깨 부상 탓에 구작 (舊作)들을 꺼내어 작은 크기로 다시 그리거나 소품 위주로 작업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는데, 그에 의하면 이는 되레 지난 작업의 자취를 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회복의 기회가 되었다. 다시 말해 양화선의 이번 전시 《너무 짧은 낮 Daytime is Way Too Short》는 그가 이처럼 필름을 돌려보듯 전작 (前作)을 하나씩 곱씹으며 떠올린 사적인 공간이나 소유물에 관한 공상과 사랑, 욕망을 엮은 이야기와 같다.
    
    상기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양화선은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는 동안 집 안에서 늘 사람의 손길을 붙잡는 사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새로운 의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지못해 오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만의 개성으로 채워진 사물과 실내 공간이 새롭고 다채로운 형태로 작가에게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것이다. 예컨대 작가는 천편일률적으로 설계된 아파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을 영위하는지, 어떠한 상품과 취향이 유행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다각도로 인식의 나사를 죄었다. 그리고 그는 고유의 독특한 성격을 파악한 사물들을 기존과 다른 형식으로 화면에 재현하여, 삶을 포착하는 감각을 한층 명징하고 예리하게 다듬고자 하였다. 
    
    양화선의 이번 신작들이 드러내는 형식적인 특징이란 이를테면 재료와 구도, 시점 등에서 발견된다. 우선 이전까지 그는 아크릴과 파스텔 색조를 사용하여 공상과 현실을 오가는 듯한 화면을 연출했으나, 본 전시에서는 유화 작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현실의 파리한 그림자에 억눌린 사물로부터 명랑한 생기와 향기, 나부끼는 빛깔을 길어내는 데에 유채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거 양화선이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정경을 담았다면, 이제 그는 눈앞의 사물이나 실내의 한 지점을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응시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개체와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고 그것의 심연을 열어, 사물과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새로운 범주를 묘파해낸다.
    
    # 결핍된 욕망과 행복의 표상
    
    양화선은 이렇듯 사물의 일부와 전체, 그리고 대상이 놓인 공간을 관심과 사랑으로 속속들이 다루는데,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는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이전까지는 인식의 표층으로 떠오르지 못했던 것들이 작품에서 어떻게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게 되었다. 사실 이는 망막에 비친 그대로의 상 (像)을 묘사하는 동안 작가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회화의 재현적 가치’에 관한 문제와도 밀접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양화선은 유행하는 물건이나  장난감, 인형 등 혹자의 눈에는 자본주의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은 것들에게 애정과 정열을 쏟으면서, 모든 작은 사물과 이를 형상화하는 행위의 다층적인 의미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의미란 말하자면 갖가지 물건들이 밀려오는 기억과 마음을 점령하는 아릿한 애착으로 그것만의 작은 세계를 다채롭게 확장하는 자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이와 같은 힘을 탐색하려는 회화가 현대인의 위태로운 삶을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긍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감하게 되었다.
    
    특히 양화선이 주목하는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그의 작업의 소재인 사물을 끝없이 소유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양극성에서 비롯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자본주의의 냄새가 농후한 이 풍요로운 소비사회에서 가진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며 탑을 쌓듯 욕망을 쌓는다. 그러나 소비에는 때때로 계급이 존재하고 물욕의 한계는 고갈되지 않기에, 우리는 소비 시대의 맹위 앞에서 만족과 허기의 양극성에 삶을 저당잡히고 만다. 일찍이 소설가 페렉 (Georges Perec)은 1965년에 집필한 『사물들』에서 이러한 욕망의 연쇄고리를 기록한 바 있는데, 페렉이 제언했듯이 사물은 ‘구매’를 통해 소비사회에서의 희열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으나 이 과정에 수반되는 물욕은 거꾸로 우리를 소진하므로, 사물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사람은 행복이라는 달콤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다.¹
    
    
    그러한 맥락에서 양화선의 작업은 사물의 유혹이라는 공기가 짙게 밴 오늘의 사회에서 인간이 왜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는지’를 질문하며, 관객이 융통성 있게 각자의 길을 찾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욕망과 행복의 표상인 사물을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단순하고도 감미롭게 묘사함으로써, 채워지지 않는 물욕과 사물을 소유해야만 성취되는 행복, 그럼에도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다. 말인즉 작가의 의도는 사물이 어떻게 우리를 행복으로 초대하고 때로는 번민하게 하는지에 대해 두서없는 감정을 정돈하도록 권유하는 데에 있다. 소유로 사들이는 행복이 사상누각에 불과할지라도, ‘부’가 기본 조건인 현대 문명의 그늘 아래에서 사물이 달콤한 행복의 순간을 찰나적이나마 촉발할 수 있다면, 행복을 추구할 때 수반되는 물욕을 막연히 비난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의 운명은 본디 이성과 탐욕, 정신과 쾌감이라는 양극의 영역을 오가도록 정해진 탓에, 우리는 각자가 짊어진 이 이중성의 문제를 조율하며 내면을 부단히 살펴볼 사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양화선은 욕망과 행복의 이중성이라는 달콤한 덫을 작업 사이사이에 놓음으로써, 사물을 통해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결코 먼 미래의 모험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언제나 좌절이라는 불가피한 먼지에 덮여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상술하였듯 이는 관객이 마치 미끌미끌한 비누와도 같은 행복의 양면을 인정하고, 행복의 유일한 원천인 ‘지금의 삶’을 긍정하여, 종국에는 스스로에게 합당한 결론에 이르도록 촉구하기 위함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목표가 되었음에도 그것이 단 한 번의 전율에 그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행복의 수단이 되는 눈앞의 사물에 먼저 진실해야만 할 터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황홀함과 여과되지 않은 욕구를 일시에 입은 양화선의 사물들은 우리가 행복을 좇는 동안 무심코 놓칠 수 있는 무언가가 다소라도 빛을 잃지 않도록, 희망과 침몰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든지 머지않아 촉발될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며 호흡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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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 “그들은 풍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점 궁핍한 섬이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김명숙 역 (펭퀸클래식코리아, 2015), 31-32, 99.
    
    
    
    (제공 = 라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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