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23.07.04 - 2023.08.19 |
---|---|
시간| | 10:00 - 18:00 |
장소| | 페로탕 도산파크/서울 |
주소| |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10 |
휴관| | 일요일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2-545-7978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시야오 왕(Xiyao WANG)
|
정보수정요청 |
전시정보
페로탕 도산파크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야오 왕의 개인전 ≪알롱제≫를 선보인다. 역동성과 확장성이 느껴지는 작가의 작품은 커다란 빈 공간 속에 대담한 신체적 제스처로 표현되어 뚜렷한 존재감 또는 지각적 정동(affect)을 전달한다. 작가는 페로탕과의 두 번째 개인전을 위해 신체의 주체적 표현에 대한 탐구를 확장하여 시간성과 유동성, 형태와 여백, 물질과 정신의 개념을 함의하는 대형 추상화를 제작하였다. 작가는 동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감각적인 현상, 공간에 대한 수용성, 철학적인 해석을 통합하여 최소한의 그리기로 무의식적 공간 인식에 대한 내밀한 성찰을 표현한다. 알롱제 검은 목탄 선으로 가로지르고 다채로운 색상의 오일 스틱으로 마무리된 시야오 왕의 캔버스는 비어 있는 공간을 작품의 필수 구성 요소로 만드는 간결한 시각 언어로 해석되며, 이는 작품에 동적 균형을 부여한다. 이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생동적인 느낌의 시각적 징후는 작가가 실제로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발레는 복잡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안무를 수행하면서 신체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동시에 모든 동작을 제어해야 하는 엄격한 무용이다. 프랑스어 ‘알롱제(allongé)’는 발레 무용수들이 훈련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로, 동작의 시작이나 끝에 팔을 길게 뻗어 몸이 만들어 내는 선의 연속성에 집중하며 자세를 길게 늘일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알롱제는 무용수의 호흡, 몸의 긴장, 정신적 집중력을 완전하게 통합하는 핵심 기제이다. 다시 말해, 이는 정해진 동작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는 준비의 순간이기도, 동작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신체적 정신적 강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완결의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에게 알롱제는 손이 캔버스에 닿기 직전, 인지적 평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주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 순간은 형태를 그리는 작업만큼이나 중요한데, 이 짧은 순간에 그녀의 마음속 감각적 충동이 최대한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에야 작가는 이러한 찰나의 감각을 넓은 곡선의 획과 응축된 짧고 강한 획으로 휘갈기듯 화면에 새긴다. 그러한 감각이 얼마나 선명하고 정확하게 전달되는지가 각 선의 특색과 함께 온전한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중요하다. 이러한 자유로운 제스처의 끝에 다시금 알롱제를 떠올림으로써, 각각의 획이 끝나는 지점을 넘어 확장되어 모든 추상적인 흔적이 작가의 의도를 온전하게 응축하도록 한다. 따라서, 작가의 회화 방법론은 어떤 즉각성을 시사하지만, 결코 즉흥적이지만은 않다. 캔버스 앞에서 작가가 내리는 창의적인 결정은 항상 신중하게 이루어지며, 각 결정은 그려진 선들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작가의 회화 방법론에 필수적인 ‘찰나’에 대한 감수성에 더하여, 알롱제는 발레에서 다른 무용수와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수단으로, 보다 관계적인 맥락에서도 작용한다. 그룹 혹은 듀엣으로 춤을 출 때, 무용수는 동료 무용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서로의 미묘한 알롱제를 감지하기 위해 의식을 고도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한 잠재의식 속 감지력을 통해 여러 명의 무용수가 유연하고 격렬한 안무를 수행하면서도 한 몸이 된 듯 조화롭고도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알롱제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자신을 동화시킴으로써 자기 몸을 그 주변으로 확장하는 수단으로 인식된다.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움직임과 시각적 공백이 있는 공간에서 인물이 더욱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빈공간에 대한 감수성은 이번 전시의 신작에서 비슷하게 작용한다. 작가는 캔버스의 많은 부분을 칠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어 자신만의 독특한 획, 구불구불한 곡선과 번짐이 더욱 결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시야오 왕은 빈 공간에 대한 공명을 작품에 담아낸 수많은 근현대 예술가 중 자신의 작업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사이 톰블리(Cy Twombly)를 꼽으며, 붓글씨를 쓰는 듯한 소용돌이 문양과 무작위적인 낙서로 20세기 중반 추상표현주의의 언어를 재정의한 이 미국 작가에 크게 공감했다. 두 작가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제스처에 대한 성향은 다르지만, 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경외심은 공통적이다. 이는 빈 공간이 단순히 텅 빈 표면이나 지각의 공백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그 자체로 진정한 실체임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작업방식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게 한다. 사이 톰블리의 <올림피아>(1957)와 시야오 왕의 <알롱제 no.1>(2023)과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즉각성은, 절제된 그리기와 빈 화면을 가로지르는 획의 강렬함과 역동성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즉각성은 대뇌에서 식별 가능한 기표로 인식되기보다, 그림이라는 ‘이벤트’에 대해 보다 본능적이고 내재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의식적인 인식을 대체하는 체화된 감각으로 발생한다. 의미가 아닌 경험의 장으로 캔버스를 이해할 때, 여백을 통해 인지적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정동(affect)의 형이상학적 현상에 몸을 맡기게 된다. 1980년대까지 정동(affect)에 대한 철학적 개념이 비교적 모호했던 서양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고대 도교의 우주론에서 영향을 받아 자아와 우주의 상호작용에 대한 유사 변증법이 문화적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일찍이 존재하였다. 2000여 년 전 노자의 『도덕경』 에서 공식화된 도교는, 실체와 무(無)가 우주의 흐름, 즉 ‘도’를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요소이자, 분리될 수 없는 반대 개념으로 존재하며, 유형과 무형, 한정된 것과 무한한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와 같은 비(非)이원론적 관념은 전통 수묵화와 같은 대중적 문화 관습을 시작으로 중국 사회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었다. 예술가는 존재와 비존재의 도교적 관계를 유추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릴 때에는 감지되지 않는 그 반대, 즉 보이지 않는 빈 공간도 포함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로 인해 당나라(618~907년) 때 ‘의도된 여백’이라는 개념이 화가들 사이에 처음으로 등장, 이는 곧 중국 미술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았으며 지난 1000년 동안 중국 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특징으로 발전하였다. 중국 충칭에서 자란 작가는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과 서양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중국 전통 산수화의 특징인 ‘의도된 여백’을 처음으로 접했으나 이에 대한 철학적 함의는 수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구입한 전시회 도록과 단행본을 통해 그림을 접한 시야오 왕은 네 살 때부터 이 책들을 보고 따라 그리며 그림의 기초를 익히고, 중국 산수화 속 자연 풍경에 구조적 대위법으로 여백을 사용하는 전통 기법을 흡수했다. 이후 청소년기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 원칙에 대한 도교적 근거를 깨닫게 되었다. 작가의 예술적 성향은 궁극적으로 추상화로 발전했지만, ‘의도된 여백’에 대한 이해는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대학원 시절 사이 톰블리의 작품을 더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빈 공간을 단순히 칠하지 않은 캔버스 이상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의도된 여백’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인식이 대학원 시절 발레 수련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작가가 알롱제를 자신의 회화적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자신의 작품을 정의하는 신체적 주체성에 더 깊이 관여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알롱제와 회화적 정동(affect)은 공간 경험에 속하는 신체적 감각이자 인지적 상태이므로, 말로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예술적 자성이 깃든 작품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버스 위에 작가의 제스처로 힘차게 쏟아부은 선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전히 이성적이거나 경험적인 결론을 넘어 의식을 확장하게 한다. 시야오 왕의 작품은 객관적인 용어로 파악하거나 정량화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매혹적인 힘과 독특한 존재감을 갖게 된다. 작가는 도가사상의 비이원적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여 각자의 내면과 주변 환경이 공명하는 만남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작품 속 정동(affect)적이고 시공간적인 춤의 목격자로서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한다. — 앤디 세인트 루이스, 미술평론가 (출처 = 페로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