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Tyler Dobson Kids
2020 acrylic on canvas 61 x 45.7 cm
(이미지 제공 = 에프레미디스)

Tamar Magradze That‘s the way love is
2020 acrylic and graphite on canvas framed (silver leaf frame) 70 x 50 cm
(이미지 제공 = 에프레미디스)

Marte Eknæs Affiliation 2
2020 brush drawing on aluminium 56 x 38 cm
(이미지 제공 = 에프레미디스)

Xavier Robles de Medina Rajio Taiso (study)
2018 graphiteoncolouredpaper 26 x 20 cm
(이미지 제공 = 에프레미디스)

			찜통더위 속에 시간도 몸도 늘어진 어느 날, 동네 산책을 결심하고 길을 나선다. 정처 없이 헤매던 중 언제부턴가 반복되는 오랜 버릇의 패턴 속으로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세월의 반복으로 인해 마모되고 움푹 파인 돌 계단처럼...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공원에 들어서 있다. 머릿속에는 반 쯤 잊어버린 가사지만 진한 여운의 울적한 팝송 후렴구가 맴돌고 있다. 공원에서 작고 밝은 무언가에 시선이 사로 잡힌다.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긴 풀 밭에 배를 깔고 눕는다. 무언가 아주 작 고 정교하지만, 광택과 얼룩이 나선형 미로처럼 서로 휘감기는 모호한 구조의 건축물이다. 이 미시의 세상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 아기자기한 놀이에 정신이 팔려 한동안 나를 잊고 싶어진다. 

‘No Remedy For Memory’는 현재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기억의 여운에 관한 전시이다. 전시되는 6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들은 독특한 리서치, 차용 그리고 영감에 기인한 뚜렷한 개성과 형식적 차이를 취하나, 동시에 이를 아우르는 이미지, 공간의 구조와 역사성이라는 공통된 지향점도 보인다. 양가적 향수, 도피적인 환상, 흐릿해진 상징들이 우리의 기억을 형성시키고 구성 짓는다.

타일러 돕슨(Tyler Dobson)은 MZ세대 의 대중적 팬덤과 예술사의 거장들을 향한 진지한 존경을 교차시켜 묘하게 역설적인 비조를 자아낸다. 화가 로스코 (Mark Rothko), 아돌프 고틀립 (Adolph Gottlieb), 싱어송라이터 라나 델 레이 (Lana Del Rey), 코카콜라와 같은 대중문화 및 대중 아이콘을 차용하는 등, 수십 년이 지나도 축적되는 화려함과 위상, 변모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돕슨의 기호와 표의는 그 이면의 작가적 주관성(그리고 더 나아가 주관성 자체가)이 얼마나 얕고 취약한지 금방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반복되는 점과 선, 파선은 철자의 구두점과 서예의 빙점을 모방하여 언어와 이미지, 재현과 추상 사이의 양가적 지점에 문진처럼 그림을 고정한다.

마테 에크네스(Marte Eknæs)의 조각 작업은 특정 소재와 물체의 수행성을 고찰한다. 특히 공공장소를 통해서 또는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이동과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대체로 산업적 기능성과 인프라의 편재성과 맞닿아 있는 소재의 선택 기준이 정밀함과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는 물성이라 하는 그녀는 산업적 소재를 차용하고 재맥락화하여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적 전율을 일으킨다. 산업용 PVC 관을 소재로 제작한 ‘!’조각은 기호의 임의성에 대한 작품이다. 반복적인 소통과 체질화만으로도 점과 선처럼 단순한 것도 기표화된 느낌표나 경계의 알림이 될 수 있다 는 이야기다.

타마 마그라제(Tamar Magradze)의 회화는 집단 기억의 체현, 또는 어떤 현실도피의 욕망을 몽환적으로 그려낸다. 대체로 여성적으로 또는 중성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캔버스 화폭에서 모호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구체적인 시기성이나 장소 을 답보할 수 없다. 투지, 우수, 여림 등의 여러 기분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의인화된 형태를 띤다. 구소련 붕괴 전, 공산권이 지 배하고 있던 조지아에서 자라난 마그라제 작가의 회화적 수행은 그 시대적 트라우마를 위로한다. 초현실적으로 넓게 펼쳐지는 그림의 질감은 신화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차원 문이 되어 인간, 짐승, 풍경이 서로 끊임없이 흐르듯 교류하고 교감하는 세계를 엿본다. 이 문이 조화점인지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취약점인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파리에서 사랑을 담아 (From Paris with Love)>는 아티스트이자 정치적 성향을 띤 도미네이트릭(political dominatrix)인 리바 메이버리(Reba Maybury)의 회화 연작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 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1901)가 1894년에 그린 유화 <건강검 진(L`Inspection médicale)> 속, 성 노동자 들이 의무 검진을 기다리는 장면을 컬러링 북으로 둔갑시킨 연작이다. 연작의 작품은 그녀의 작가적 수행을 근간하는 생산의 수단과 노동의 교환이라는 개념으로, 그녀의 복종하는 고객들의 ‘참여’로 완성되었다. 파리의 관광 기념품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특징적인 스타일이 도시를 낭만의 장소로 묘사하는 방식을 드러내어 여가, 쾌락, 근대 부르주아의 자유라는 명목이 가린 정치적 현실과 물질적 결핍을 드러낸다. 메이버리의 지배 플레이에 복종하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캔버스 천에 인쇄된 도안에 번호에 따라 해당 색을 칠하라는 ‘힘의 놀음’ 속에서 툴루즈 로트테크의 대표작에 짙게 깔린 폭력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자비에 로블레스 드 메디나(Xavier Robles de Medina)는 시각적 정밀도와 심도인지가 두드러지는 환영같은 모노크롬 회화를 그린다. 거의 기계적으로 일관된 마킹 표식 기법을 사용하는 그는 개인적으로 수집한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를 토대로 그림을 그린다. 필름의 입자가 보이는 영상의 스크린숏부터 인류학적 연구자료와 대중문화 아이콘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를 그린다. 시간과 노동, 집중력 집약적일 수밖에 없는 그의 독특한 붓놀림은 low-Fi 미디어의 잡음과 입자를 모방한다. 디지털 픽셀의 무심하고 규칙적인 자동 생성 방식에 대한 대조다. 미술 작품 제작에 드는 시간을 크게 감축할 수 있는 기술과 방식이 흔히 사용되는 오늘날의 사조를 거스르는 행위다. 캔버스 앞에서 노동하는 시간과 붓을 쥔 손과 전완이 무던히 반복한 동작으로 결국 몸이 기억하게 되는 모습이다.

어니 왕(Ernie Wang)은 경제의 붕괴와 환경 파괴로 끊임없이 위협받는 세계의 좌절에 응한다. 무시할 수 없는 위압적인 현실을 바라보던 작가는 세련된 도자 공예로 당의를 입힌 판타지 속으로 기꺼이 도피한다. 비디오 게임 등의 가상 공간에 충만한 불가사의하고 공상적인 상징적 언어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작품은 소우주 적 유토피아로의 순간적 도피를 제안한다. 선물로 레고 블록을 받은 아이의 복받치는 즐거움과 몰입이 느껴지는 소형 조각이다. 정교하게 소용돌이치는 조형성과 외형에 나타나는 회화적 표현은 다양한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좌절된 충돌을 연출하지만, 작가가 조각을 통해 전달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창조와 제작이 선사하는 기쁨, 즉 그 수단이 결과이자 존재 이유가 되는 특이점이다.

(제공 = 에프레미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