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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문선희 : 이름보다 오래된
기간| 2023.10.18 - 2023.11.16
시간| 화-금 10:00 - 18:30 토 13:00 - 18:30 일 13:30 - 18:30 (*입장마감 18:00)
장소| 일우스페이스/서울
주소| 서울 중구 서소문동 41-3/대한항공 빌딩 1층
휴관| 월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53-6502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문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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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작가노트]

이것은 고라니 초상사진 연작이다.

처음으로 길 위에서 사슴을 만났던 날, 나는 깨달았다. 고라니와 노루 둘 다 이름만 익숙할 뿐 서로 어떻게 다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아는 것은 고작 이름뿐이었는데, 그간 어떻게 그들을 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일까?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 찾아간 구조센터에서 어린 고라니들과 3일을 함께 보냈다. 고요하고 적막한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오직 침묵만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서로 바라보고 보여지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가 흘렀다. 살아 있는 두 존재가 직접 만나 주의 깊게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숨소리를 듣고 온기와 촉감으로 서로를 감각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 달간 방문을 허락받았던 두 번째 구조센터에서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넉살 좋은 초코는 사랑이 많은 아이였다. 초코는 내게 거침없이 애정 표현을 했지만, 나는 언젠가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초코를 마음껏 쓰다듬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몸을 낮추는 것으로 초코에게 마음을 전했다.

눈높이를 맞추면 초코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초코도 신기한지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초코의 눈을 들여다볼 때면 같은 인간을 마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말갛게 영혼이 들여다보는 것 같달까. 옛사람들이 사슴을 영물로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초코라는 기준이 생기자, 마치 베일이 벗겨지듯 고라니들의 얼굴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묘하게도 고라니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리도 당연한 이치를 그동안 왜 깨닫지 못했을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고라니의 얼굴에 오롯이 새겨진 고유성이 깊이 매료되었다. 고유성에 깃든 경이와 다양성에 깃든 장엄함에, 나는 비로소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고라니라는 이름 석 자로 뭉뚱그려진 존재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유일무이한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 주장하거나 설득하는 대신 존재마다 깃든 빛을 그저 보여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 경험해야 할 신비로 다가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초상사진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고라니들이 관객들을 직접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길 바랐다. 마주 보는 느낌이 들도록 정면을 응시한 초상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고라니들은 기본적으로 눈을 피하는 습성이 있었다. 어렵게 고라니의 마음을 얻어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실내 공간이라 셔터 속도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겁 많은 고라니들에게 폭력이나 다름없는 플래시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게는 높은 선예도의 사진을 얻는 것보다 고라니의 심리적 안정이 더 중요했다. 자연광만으로 촬영하려면 고라니 쪽에서 나를 지그시 들여다봐야 했다. 고라니들이 나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져 갔다. 변화는 느리고 미묘하고 기적 같았다. 서로를 의식할 때 흐르는 긴장감과 떨림 속에서 고라니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지난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났다. 처음 고라니 초상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길어도 3~4년이면 이 프로젝트를 매듭지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50여 점의 초상사진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운 좋게 기회를 얻어도 야생의 존재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경우에 따라 며칠이 걸리기도 했고,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첫 만남에 극도의 경계심이나 불안감을 표현해 시도조차 못 한 경우도 많았고, 몇 달을 기다렸으나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 끝내 촬영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사진을 꺼냈다. 마침내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 순간에 당도했을 때, 부지불식간에 두 영혼이, 두 세계가 연결되었던 그때의 일렁임이 담긴 사진을 골랐다. 오직 존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경과 컬러를 닦아냈다. 몸도 과감히 생략했다.

미처 준비되기 전에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어린 고라니들의 초상은 졸업앨범 형식으로 구성했다. 무미건조하고 획일적인 타원형의 틀이 역으로 그들의 고유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어른 고라니들은 고요한 숨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에너지의 흐름 속에 세웠다. 의외로 피사체와 배경의 조화가 쉽지 않았다. 고라니가 풍기는 분위기에 따라 안개의 농도와 흐름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하나의 초상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정성을 들여 초상사진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다. 모두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로 초대받은 생명들이다. 그 유일무이함에 가슴이 부풀기도, 아리기도 했다.

초상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가지고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출처 = 일우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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