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뒤척이는 물질의 운동 [undercurrent 숫자]로 건조하게 붙여진 김춘환의 작품들은 언뜻 물감이 두껍게 칠해진 추상화같다. 재현으로부터 거리를 둔 현대미술은 물성을 강조하는 비구상적 형식을 낳았다. 그것들이 만약 물감으로 색이 잘 조율된 화면이라면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스민 몇 가지 색이 중심이 될 것이다. 대개 모노크롬 풍의 작품 전시회가 그렇다. 김춘환의 전시에는 다수의 색이 등장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작가가 수집하는 재료 그자체의 색 때문이다. 재료를 수집해야 하는 상황에서 작업은 그리 자유롭지 않다. 수집 대상인 잡지는 올드 미디어가 되어 구하기도 힘들고, 전단지는 일회적 속성이 강하다. 그런 재료들에서 작가가 원하는 색과 질감은 더욱 귀하다. ‘XX도 약에 쓰려면 귀하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당시에 가장 흔했던 것이 가장 희귀해진다는 고고학의 역설도 있다. 광고는 대량 소비를 목표로 하지만, 한때 보편적이었던 상품의 유행 주기는 점점 더 빨라진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문화적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것을 불태울 사람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자료들은 저절로 퇴색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적 자료가 전자매체의 글자로 바뀌어가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이제 정보혁명을 거듭하며 생산된 자료들은 ‘자동적으로 체계화하는 유동적인 시스템’(알라이다 아스만)으로 처리된다. 김춘환의 수집물은 엄격히 말해 쓰레기이며, 작품으로 용도변경 된 것이다. 물감 또한 상품으로서의 유통되는 기간이 있지만, 그래도 폐지보다 의도적으로 선택될 수 있다. 인쇄물에 포함된 글자같은 형태들이 뒤섞인 복합적인 화면의 색을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색과 질감을 그대로 보유한 일종의 꼴라주다. 꼴라주가 큐비즘에 의해 미술사에서 나타났을 때, 마침 그것도 인쇄물의 형태였으며, 평면으로 진화하는 회화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평가됐다. 꼴라주는 재현이 아닌 제시로서, 르네상스 이후에 수백 년에 걸쳐 확립된 회화의 재현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김춘환의 ‘작업을 구성하는 형식적인 방법인 꼴라주 기법’에 대해, ‘붙이기(coller)는 재현의 공간 속에 현실의 파편들을 끌어들여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오려내거나 특수한 이미지들의 부분을 차용하여 화면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서, 전통적인 꼴라주와의 차이를 말한다. 최초의 꼴라주는 당시 세계의 문화 수도 프랑스에서 인쇄된 신문 기사를 확인할 수도 있던 반면, 김춘환의 작품에서 글자는 입자로 흩어진다. 울퉁불퉁 거친 화면 가운데서 간혹 몇몇 글자를 알아볼 수도 있지만 이는 의도이기보다는 우연이다. 그의 작품에서 단면들의 집합인 복잡한 표면의 색과 형태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그때그때 조합된다. 고밀도로 집적된 인쇄물은 깍여 나가 회화의 밑층을 노출한다. 접히고 깍인 물질의 표면은 수백년간 창이나 거울 역할을 했던 회화 표면의 매끄러움과 거리가 있다. 붓대신 칼로 형태를 만들어나가며, 잘리고 깍인 단면이 노출된 거친 작품은 가학피학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낱장으로 하나하나 기능을 가졌던 페이지가 원래의 재료로 돌아가려는 듯한 움직임 또한 그러하다. 그 역동적 움직임은 디오니소스적이다. 문화평론가 캐밀 파야(Camille Paglia)는 [성의 페르소나sexual personae]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으로 나누는 문화적 유형학을 전개하면서 디오니소스적 경향을 원지적(原地的)(chthonian, 땅에 속하는)으로 설명한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김춘환의 작품에서 최초의 잡지의 페이지는 고도 문명의 산물에서 원지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그만의 가공법을 통해 만들어진 변화무쌍한 굴곡들은 고삐 풀린 자연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변화의 순간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이 국면은 아폴로적이다. 특히 자르기를 통한 날카로운 단면들의 노출은 소멸된 경계를 다시 경계짓는다. 캐밀 파야의 유형학에 의하면, 그것은 사물과 사물을 서로 구분하며 또 사물을 자연으로부터 떼어놓는다는 점에서 아폴론적 선(線)의 강조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경계는 물리적으로는 날카로움을 유지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경계는 매우 복잡하다. 문명의 산물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작업에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적 충동의 역학관계가 있다. 자연 또한 질서와 무질서, 항상성과 변화라는 두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업은 육체로 물질을 다루는 원초적 과정을 그대로 통과하는 고된 과정이다. 물질을 원래의 형태로 역행 후 예술로 재탄생한다. 캐밀 파야는 사드가 인간의 신체를 디오니소스적 과정에 복종시킨다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기본물질로 환원시켜 사나운 자연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사디즘은 일종의 형체 허물기인데, 사드적 의식의 참여자들은 ‘신체의 윤곽을 허물어뜨리면서 찢고, 찌르고, 긁고, 파내고, 폭행하고, 절개하고, 조각내고, 태우고, 용해’(캐밀 파야)하기 때문이다. 반듯한 하나를 역동적인 다(多)로 변모하는 과정은 사디즘적이며 이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산물이다. 캐밀 파야는 아름다움은 자연에 대항하는 우리의 무기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자연의 용해하는 흐름을 정지시키고 동결시킨다는 것이다. 작품 [undercurrent 180401](2018)에서 피부빛을 연상시키는 색감은 살갗 아래의 층을 보여주는 듯하다. 블랙 계열의 작품들은 모든 것이 태어났던 어둠(흙이나 우주 저편) 속으로 돌아가는 단계와 비견된다. 나무판 위에 종이가 꼴라주 된 작품 [undercurrent 190302](2019)은 마치 고대 식물의 잔해인 석탄같이 뭉쳐진 덩어리같다. 무엇인가 인쇄된 페이지가 원재료로의 환원하는 듯한 양상은 준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는 도록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가령 작품 [undercurrent 180902](2018)은 모 화가의 도록들을 활용한 것으로, 급격하게 달라진 형식이지만, 색감 등 분위기가 남아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종의 문화 유전자가 분쇄에 가까운 변형의 와중에도 보존된 것이다. 원재료의 매끄러운 표면들은 드러난 단층처럼, 암맥처럼 예상치 못한 물질의 주름을 드러낸다. 김춘환의 작품은 형태도 불확정적이지만, 수집된 재료와 밀접한 작품의 색상은 일회적이다. 한 물감통에서 꺼낸듯한 시리즈 작품이 불가능하다. 대신 작품 크기를 일정하게 조율해서 시리즈같은 느낌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블루, 블랙, 그린, 레드 계열 등 다양한 색이 등장한다. 매우 두텁고 무겁지만 회화같은 형식을 유지하며, 입체작품 역시 사각형 기본 틀은 유지한다. 작품에 따라 인쇄된 글자 등이 일부 보이기도 하며 밭고랑같은 홈이 패여져 있기도 하다. 작가가 부여한 질감에 따라서 비슷한 재료도 색감이 달라질 수 있다. 조밀한 밀도를 가지는 그의 작품은 보는 거리가 달라지면 또 다른 풍경들이 계속 등장한다. 작품으로 순간 멈춤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워낙 그 표면이 복잡해서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컴퓨터의 편재로 인한 페이퍼리스 사회의 가능성이 펼쳐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무엇인가 더 자세히 봐야 할 때 인쇄한다. 그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인쇄물은 이제 올드미디어가 되었지만, 미디어의 역사에서 인쇄의 위상은 엄청났다. 중세 말의 발명품인 인쇄는 문화사에 혁명적 변화를 야기했다. 그것은 김춘환이 물감 대신에 사용하는 종이의 발명과 연동된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종이가 도입된 것은 인쇄 가능성의 중요한 예비조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종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인쇄가 추상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특히 미술과 관련돼서는 시각성과 추상의 관련에 시사점을 준다. 맥루한은 수백년 동안 내려와 익숙해 있던 구술적 문화는 르네상스와 함께 시공 및 인간관계에 있어 연속적, 선형(線形)적, 그리고 획일적인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추상미술은 다른 감각 능력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분절된 시각 감각 능력에 기초한 사실주의이다. 즉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획일적이고 반복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겼다는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제 1 효과는 귀로 들리는 말을 가시적인 단어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가령 당시 자연과학의 발전, 즉 비가시적 힘에 가시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소통은 물론 감각마저도 역사성을 가진다는 맥루한의 논리는 시각성과 촉각성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시사적이다. 근대를 연 시각성의 한계는 다시금 다시점, 촉각성, 청각성이라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관점과 감각에 주목하게 한다. 꼴라주라는 형식으로부터 출발한 김춘환의 작품은 추상미술의 속성을 최대한 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원지성’으로의 방향에서 비롯된 풍부한 촉각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촉각성으로의 회귀가 물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대의 광고 형식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풍부한 문화적인 맥락이 있다. 그동안 미술에서 물성이라는 개념은 오남용되지 않았나. 예술가 주체에 상응하는 물성은 온갖 관념론적 의미가 부여되곤 했다. 김춘환의 작품에도 물성은 있지만 그 결은 더 복잡하다. 무엇인가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상품과 정보는 그자체로 존재하는 예술을 거친 후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어떤 대상이 원래의 기능을 다했을 때(또는 모호해졌을 때) 심미성은 활성화된다. 인쇄물은 특정 내용을 전달하지 않고 존재하는 단계에서 예술로 간주된다. 김춘환의 ‘종이’는 보거나 읽을 수 있게 회화의 형식으로 배치, 가공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평면은 극히 불투명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달해 주는 투명한 창이나 거울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복잡한 표면은 시공간의 단면이기도 한 평면작품의 특징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벗어난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 추상이 전제하는 일별로 끝나지 않는다. 거듭해서 봐야 하며 작품은 그때마다 다른 국면을 펼쳐준다. 그만큼 밀도 있게 접혀 있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는 [주름]에서 접지술, 즉 종이 접는 기술은 물질의 과학을 위한 모델이라고 말한다. 그는 접지술로부터 이미 물질과 생명, 유기체 간의 친화성을 추론한다. 유기체의 초기 단계인 알(卵)부터 습곡같은 지층까지 아우르는 주름은 곡선 운동 또는 굴절의 분해를 수반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접기놀이는 하나의 세계로부터 무한히 많은 존재들이 태어나는 비밀을 보여준다. 김춘환의 작품 또한 평평한 종이가 어떻게 복잡한 형상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준다. 들뢰즈에 의하면 접는다는 것은 두 부분을 나누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서로 차이나는 것으로 관계시킨다. 종이가 만들어 내는 주름은 바로크 시대의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처럼, 다양한 세계가 발생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재료에 관철된 힘은 주름의 접힘과 펼침을 낳는다. 펼침은 확실히 접힘의 반대나 소멸이 아니라 접힘 작용의 연속 또는 확장, 접힘이 현시되는 조건’(들뢰즈)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예술 작품 또한 무한하게 나아가는 주름이며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접기의 방식을 발견하는 자이다. 작가는 ‘내 꼴라주들은 종이의 다양한 움직임과 종이의 본질적 물질성이 살아 숨 쉬는 소박한 안식처이다. 잘려 나간 종이들이 우리의 시선을 내부로 인도할 때 그 잘단 면 주름의 파장들은 표면의 흔적들과 함께 퍼져나가게 된다. 이러한 주름의 파장은 기억(종이의 물질성과 행위의 반복)을 불러들인다. 결국 내 작업에서의 꼴라주들은 기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물론 특정 사건의 기억이 아니라 지층처럼 오랫동안 쌓였던 것의 단층이다. 이러한 기억은 선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뒤척이는 물질의 운동에 의해 저층에서 불쑥 솟아오른다. 작품의 주재료인 종이는 한국의 모노크롬 등의 회화에서 많이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모노크롬 회화의 경우 대부분 한지 등을 죽의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등, 물감을 다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촉각성이 강조되고 전면구도(all over)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김춘환이 선택하는 인쇄물은 대개 잡지나 전단지에서 오기 때문에 색감이나 표면도 윤택도 강렬한 편이다. 잡지에서도 광고 부분이 화려하고 종이 또한 가장 고급스럽다. 그 부분이 그 미디어의 진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 상품과 예술은 근접한다. 작가는 매일 우편함에 가득 찬 수많은 종류의 인쇄물을 보면서 현대인의 일상이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잠식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가 새로움이라는 이름 하에 시시각각으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 그리고 이미지들의 생산, 소비와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초래한 일상에서의 문화적 혼돈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그의 재료는 물성을 넘어서 미디어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의 작품 소재인 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우리 일상의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오브제’인 셈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우리들의 생생한 모습’, 즉 소비적 일상이 시시콜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꼴라주를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잡지를 먹고 그 산물을 내놓는다. 정보화 사회에서 일상이 된 과정을 작가는 물적인 형식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잡지라는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었어야 할 코드는 변화한다. 작가가 보기에는 그 방식이 재현보다 더 직접적이다. 정보사회 역시 잘리고 조합되고 다시 잘리는 무한 반복과정은 자연과 마찬가지다. 그가 선택하는 소재와 작업방식은 자연, 문화, 예술, 삶의 접점에 위치하게 한다. 작품 [undercurrent 180402](2018)처럼 멀리서 보면 두툼한 나무 껍질같은 표면은 종이의 원재료를 생각하게 한다. 실재의 모델인 자연은 수많은 겹과 결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 또한 실재를 지향한다. 최근 작품 [undercurrent 240602](2024)은 목침(퇴침베개) 같이 입체형으로 깍은 형태인데, 문화나 예술의 특유의 인공성이 느껴지면서도 자연과 보다 친근했던 오래된 사물의 면모를 가진다. 작품 표면에 내포된 사물의 특성을 오브제의 형태로 제시한다. 김춘환의 작품 색은 원재료의 색이지 도색된 것이 아니다. 작품 속 종이는 구기고 접히고 뭉쳐도 그 속성은 남아있다. 대개 광고 인쇄가 그러하다. 무엇을 인쇄해도 그럴듯해 보이는 상품을 연출하는데 부족하지 않은 번지르르한 표면은 가히 자본주의적 물성이라 할만하다. 그의 재료는 모노크롬 화가들이 자주 쓰는 종이 죽의 부드러움이나 그로부터 파생되는 관념론적 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종이는 거의 조각같은 방식으로 다뤄야 하는 거친 재료다. ‘표면 절단은 내 작업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절단은 ‘한 화면 안에 겉과 속, 안과 밖을 동시에 보여주어 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제재소에서 거대한 자연 원목들이 기계톱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30여년 가까이 파리에서 살고 작업하는 김춘환의 한국 작업실이 있는 고향 인천에서 목재소를 하시던 부친의 작업을 작가는 기억한다. 예전에는 거대한 원목을 가공하는 목재소가 도시 안에도 있었다. 나무라는 자연의 원재료를 가공하는 일종의 공장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생산/소비는 분리되었고, 그 이전의 기억은 그저 추억을 넘어서 새로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는 나무 대신에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 특히 광고지처럼 보다 많이 가공된 종이를 목재소의 원목처럼 다룬다. 종이들이 나무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덩어리로 변모하는 것이다. 덩어리는 다시 칼로 깍여서 평평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실에는 닳은 붓대신 닳은 칼들이 있다. 그는 칼로 ‘그린다’. 단면은 작가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를 만들기에 그의 작품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물질적 덩어리는 에너지의 집적체이며, 이 N차 가공물은 또다른 읽기나 보기를 권유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쇄된 종이들은 아니면서도 보여지고 읽혀진다. 배열된 재료를 깍는 각도와 강도에 따라 표면의 질감은 변화한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결들은 잘려진 단면의 양상이다. 잘린 것들이 겹쳐져 이어진다. 이어지기 위해 잘리는 역설적 모양새다. 단면이 모여 평면이 되려면 얼마나 많이 쌓여야 하는가. 그의 작품은 매우 묵직하다. 겹침과 잘림에 의해 생성된 미세한 주름들은 우연과 필연의 합작품이다. 작품에 따라서 밭고랑처럼 홈을 파주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름은 몇 겹이 된다. 겹주름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정해진 한계는 없다. 작가는 작품 생산의 주체이지만, 때로 작품은 자기들끼리 나아가며, 작가는 이러한 국면도 포함하는 더 큰 맥락을 만든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보여지듯, 작품마다 일정하게 색이 조율될 수 있는 이유는 재료 준비의 단계에서 수집과 분류작업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우연과 필연의 대화이다. 인쇄물의 특성상 동일한 것들이 한 번에 수집되는 행운도 있지만, 색감 별로 찢어서 한 장씩 모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번에 뭉태기로 구한 인쇄물은 작품 팜플렛부터 광고 전단지까지 다양하여 누군가는 알아볼 수도 있다. 인쇄물에서 대중에게 잘 각인된 상품은 대표색으로도 기억되기 때문이다. 발견 또는 수집된 재료가 어떻게 작품으로 변모할지는 작가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지만, 오랜 작업을 통해 남들은 쓰레기로 보는 것을 보물로 알아본다. 필자 기억에도 잡지가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을 같이 사라진 동네 서점에 월초가 되면 쫙 깔리는 다양한 잡지들은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인쇄물은 점점 감소해 가는 추세에 있다. 그래서 김춘환의 작품은 결코 자유롭게 그리거나 만들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결코 하나의 색으로 도포된 것이 아니며, 한 번의 동작으로 생겨날 수 있는 형태와 색채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작업을 통해 물질에 쟁여 놓은 에너지는 충만하게 접혀지고 펼쳐진다. 목침(퇴침베개)처럼 묵직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작품은 그의 작품의 조각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의 독특한 작업은 주변에서 수집된 광고 인쇄물과 잡지들을 한 장씩 뜯고 구겨 나무로 만든 패널 위에 빽빽이 부쳐 일정한 두께를 가진 종이 덩어리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물질을 다루는 기법은 세련되어지지만, 그의 작품은 장인적인 능숙함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재료가 감각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저자들이 구분하듯이 ‘재료 안에서 감각이 실현되는 것’과는 다르다. 김춘환의 작품은 주체의 관념을 물성으로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그 결과는 모든 원근법과 심도와는 무관한 그자체 고유의 어떤 두께를 부여하는 것 같다. ‘뒤덮을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고 모으고 쌓고 가로지르고 일으키고 접어야 한다. 그것은 지반의 상승이며 또한 구도가 층위화 되므로 조각마저도 평평해진다. 그것은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이라는 점에서 개념’(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작품은 단지 특이한 재료가 사용된 물성이 강조된 추상화로 개념화할 수 없다. 그러한 지배적인 경향은 초기 추상화가들이 염려했던 장식화를 낳았다. 작가는 작업과정에서 대화적 국면을 강조한다. ‘패널 위에 집적시켜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들의 상호 간섭과 뒤섞임을 만들어낸다. 패널 위에 종이를 부치는 과정은 종이들과 작가와의 조응이다. 종이가 하나씩 부쳐지는 과정에서 작가가 모든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에 모든것을 떠맡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이 덩어리들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도록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가 실재의 모델이기도 했던 바다나 대지를 닮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예술은 한 갓된 가상을 넘어서 실재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출처 = 데이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