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24.09.28 - 2024.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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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10:00 - 18:00 토 12:00 - 19:00 |
장소| | 아트센터 예술의시간/서울 |
주소| | 서울 금천구 범안로9길 23 (독산동)/예술의 시간 |
휴관| | 일, 공휴일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2-6952-0005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유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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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수정요청 |
전시정보
우리는 점차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1. 유장우 개인전 《너의 마음》에 흐르는 커다란 감정은 ‘불안’이다. 전시는 사회 전반에 만연하지만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눈에 보이도록 설명하기 어려운 집단적 감정들에 관한 단서를 찾아, 사회적 불안에 관한 메시지를 던진다. 개인의 마음 안에 도사린 감정들을 파고들 때 사회적으로 응집된 감정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8개의 작품을 연결하는 감정의 연쇄고리를 ‘불안-공포-열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유장우는 ‘불안 담론’에 ‘부자되기 담론’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나선다. 특히, 열망에 관해서는 행복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부자되기' 열망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젠가게임 같은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유희다. 희망을 쌓아 올리면서도 더 불안해지지 않기 위해 다시 불안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이 게임에서는 누구든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이 게임은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감정적 안정감을 선사하는 ‘행복'에 관한 근본적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당신이 바라는 행복의 정체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불안 위에 쌓은 행복 앞에 서있는 우리는 지금 느끼는 이것이 진짜 행복인가를 의심하면서, 다시 행복을 찾아 몸을 일으킨다. OECD는 경제, 자립, 형평성, 건강, 사회적 연대, 환경, 생활만족 등 총 7개의 분야에서 소득분포, 고용률, 소득불평등, 빈곤율, 기대수명, 자살률 등 총 26개 지표를 평가해 국가의 행복 정도를 분석한다. 국가가 어느 정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면, 국가에 속한 개인도 어느 정도는 행복하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행복지수는 어떤가. 한국이 OECD 국가 중 부동의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한국의 자살은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이 발생한 시기인 2000년 전후 크게 늘어났다. 이는 행복의 기준이 개인적, 문화적 요인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요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개인의 책임 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해석해야 할 근거로 볼 수 있다. 2024년 소비 트렌드 키워드에 신조어 ‘도파밍’이 올랐다. 도파민(dopamine)과 파밍(farming)의 합성어인 ‘도파밍'이 2024년의 트렌드 키워드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이 행복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 즉 컴퓨터 게임과 같은 일시적 자극으로라도 성취와 보상을 얻기 원하는 우울감에 젖어 있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지난 5년간 국내 우울증 환자의 수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증해 2022년 100만명을 넘어섰다. 비교적 가파른 증가율을 보인 연령대는 20대로 무려 90% 증가했고, 30대도 78%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불안장애 역시 86.8% 증가했다. 한국을 삼키는 우울은 의학적 진단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울은 사회적 우울, 광범위하게 응축된 구조적 정동이다. 불안의 일상화는 지난 수십여 년 동안 겪은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참사, 재난, 사건, 사고들이 한국판 자본주의 안으로 침잠하면서 비롯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겪은 경제 침체와 대량해고, 경제적 위기가 야기한 나와 내 가족의 위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난 20여년간 벌어진 참사들과 사건들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경제문제 위에 얹힌 폭력, 범죄의 위험, 사회안전망의 취약함은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불안증을 안겨준다. 우울, 분노, 혐오, 고통, 슬픔, 좌절, 절망, 수치, 모멸, 체념, 외로움, 소외감. 이런 감정들이 유령처럼 떠다니다가 언제 내 등에 매달리게 될지, 그야말로 재수없음과 있음 사이의 복불복 같은 삶을 사는 것 외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통제 불가한 사건들과 회의적 전망, 희망의 부재, 불확실성의 심화가 사회적 거대 공포감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쉽사리 휩쓸렸다 사라지는 현상이 아니라 기저에 깔린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공포로 가중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는 사회적 안정 집단 안에 정착하고자 하는 욕구와 거기로부터 밀려나고 남겨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라는 C.S.루이스 의 비평은 예리하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기’와 ‘부자되기’의 결합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움직인다. 슬픈 현실이지만, 우리의 과제는 결국 신자유주의 열풍과 무한경쟁의 트랙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경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집단에 속한다는 안도감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얼마나 유예시킬 수 있을까. 지수, 좌표, 그래프 안에서 내 위치를 찾아보는 일은 지금의 불만족과 불안을 조금 상쇄시키거나 확인시킬 뿐이다. 코로나 기간 중 주식투자의 열풍에 들어선 수많은 2030세대는 근로소득 만으로는 자산증식이 불가능한 시대적 불안을 해소할 대체제로서의 희망을 안고 개미의 행렬에 진입했다. 유장우는 그의 주식 투자 경험을 이전 전시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를 통해 풀어낸 바 있다. 그의 질문들은 현대사회의 현상 뒤에 숨겨진 열망들 사이에 머무르며, 열망이 발화하게 되는 근본적인 지점으로 파고든다. ‘부자되기’ 열망 아래 가라앉아 있는 속삭임,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부자가 되지 못했다면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메시지로 치환되는 치명적 좌절감을 숨기고 있다. 영끌족의 똑똑한 한 채를 잡기 위한 부동산 투자, 신기루를 따라가는 것 같은 개미 투자자들의 행렬에 ‘부자되기’ 열망은 불안-공포의 연쇄고리 뒤에 감춰진 행복을 얻기 위한 필수 연결고리가 된다. 밤낮으로 투자 공부에 매달리며, 될 것 같은 한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진 빚은 이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할 때 돌아볼 수 있는 돌파구는 전문가 집단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주식 메뉴와 부동산 재테크 상품 홍보에 열을 올리며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열광의 배팅은 대부분 상실감으로 이어지는데, 소중한 재산과 희망을 상실한 개인은 다시 서바이벌 게임에 참전하기 위해 홀로 일어서야 한다. 개인적, 집단적으로 유사하게 공유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은 하나의 열풍과 같이 소용돌이쳤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해야 하는 생애 전반에 걸친 재테크, 부자가 되기 위한 각종 담론들이 난무한 시대는 부자가 되지 못한 이들을 무능력 담론 위에 올려놓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또다시 좌절감과 상실감을 내재화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는 평생 공포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2. 나는 왜 불안한가. 내가 느끼는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유장우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너의 마음》 안에서 구조적으로 결합하여 구체화된다. 그는 작품 전반에 활용한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인간이 바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수치화, 데이터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너의 마음' 안에 있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다시 질문한다. 행복이 정말 ‘거기’에 있는가. 《너의 마음》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감정을 데이터로 변환하고, 자본으로 순환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도구다. 이미 많은 자본주의 개념들이 당시 사회의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해 왔듯이, 인공지능-자본주의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개념으로 등장한다. 사실 자본주의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든지 그것이 자본주의인 한, 이윤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유장우는 고유한 인간에 관한 빅데이터를 인공지능을 통해 처리하는 과정에서 개별 인간과 사회 사이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 것인지에 관해 관심을 갖는다. 즉 분리 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감정들, 특히 내면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심경의 변화들이 개별화되고 분류되어 데이터로 변환되는 과정과 원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함의들은 대개 권력, 공동체, 정체성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정체성에서 기억은 매우 중요한데, 우리를 유일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반추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대신 기계의 조언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SNS, 스마트폰, 디지털 기기가 수집하는 나의 지극히 사적인 정보들, 예를 들어 생활 패턴, 수면 패턴, 얼굴과 음성 인식을 통한 감정 추적, 생체리듬의 주기, 물리적, 감정적 반응의 패턴 등은 모두 우리의 자발적 ‘복종’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각종 기계와 스스로를 연결하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복종을 통해 기꺼이 통제 상황 안으로 들어간다. 인공지능의 인간 관찰과 해석에 의지하게 될 미래가 바로 눈 앞에 있다. 인간은 기술-자본주의를 넘어선 인공지능-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진입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인공지능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스스로 ‘생성'하는 어떤 ‘지능적' 생명체로 상상하는 것 자체도 실은, 인공지능의 사용적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현실을 혼동하는 일종의 ‘집단적 환각’일 수 있지 않을까. 간혹 생성형 AI가 거짓을 사실처럼 답변하는 소위 ‘환각(hallucination)’으로 불리는 현상에서 주목할 것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용자에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내용을 ‘어떻게든 생성해냈다’는데 있다. 최대한 ‘인간인 것 처럼’ 흉내내야 하는 것에 최적화되어가는 기계적 메커니즘에 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미래가 가장 인간 같은 기계의 탄생이라면, 인간의 감정, 의식, 생각, 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모으고 분류하는 거대 모델의 개발을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인간과 자본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아닐까. 3. 이 지점에서 유장우의 경험적 자기 발견이 추상적 세계의 개념과 연결되는 그의 관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감정을 사회 경제의 구조적 틀과 역사 안에서 살펴보는 태도, 기술의 발전이 끌고가는 세계의 변화가 인간의 내밀한 영역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들여다보는 방식은 유장우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는 이전 작업들에서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단초를 찾아, 자신이 속한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책임, 역할, 기능, 감각의 관련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개인-사회간 역학관계, 예컨대 한국판 자본주의, 한국적 사고방식 등에 관한 의문과 부조리를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현실적 경험과 추상적 개념의 연결을 시도해 왔다. ‘자본주의-자기 책임’에 관한 그의 관심이 이번에는 ‘인공지능 자본주의-자기 테크놀로지 ’로 이어진다고 짐작해 본다면,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점차 심화되는 감정의 상실과 일반화 현상은 개인을 채찍질하는 생존 방식의 구조적 딜레마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작가는 개인의 불안-행복이 사회적 불안-행복과 유기적이면서도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바라본다. 이를 통해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에 대한 본격적인 의심을 던지고, 사회 경제적 구조 안에서 맥없이 행복해하는 개인의 의존적 타율성을 질문한다. 보이지 않는 타자들과 그들(나를 포함한)이 구축한 이 세계에 의해 나는 얼마나 불안하고, 얼마나 행복한가. 《너의 마음》의 질문과 성찰은 자본주의의 구호 아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개인의 선택과 방향, 그리고 개인을 끌고 가는 사회적 열망이 가리키는 곳을 선회한다. 이미 도래한 인공지능-자본주의의 미래를 바라보며, 더욱 불안해진 나와 내 가족의 자리를 붙잡기 위한 몸부림에 ‘불안-공포-열망'으로 순환되는 감정의 연쇄고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너의 마음》은 만약 우리가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사회를 잠식한 불안에서 찾아야 하는 현실을 바라보게 하며,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요구되는 경제적 성취에 근접할 때에야 원하는 행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불안의 실체를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너의 마음〉에서 너는 ‘행복한 하루’를 담은 Vlog를 끝내며 질문한다. ‘나의 웃음, 나의 눈물, 나의 행복. 그것들은 정말 나인 것일까요?’ 자본주의가 심어준 행복에 대한 판타지는 현대사회 안에서 ‘인간인 것 처럼 흉내 내는데 최적화된 인공지능의 환각’과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행복을 흉내내는 환각’의 실체가 유령과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허상 앞에서 막혀버린 길 끝에 다다른 듯, 이것이 현실인지 허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매일을 맞이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할 여력도 없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삶에서, 불안을 걷어내며 부여잡을 수 있는 허상의 행복이라도 찾아야 오늘을 마무리할 수 있다. 오늘도 부디 너의 행복한 하루를 끝내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기를 바란다. 주시영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디렉터) (제공 = 아트센터 예술의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