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빛이 머문 흔적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원근의 그림에서 붓자국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소간 분명하게 세로 방향의 결이 보이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색칠된 그림이 아니라 빛이 잠시 머문 듯한, 얇은 스크린 뒤에서 빛이 스며나오는 듯하다.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선택한 간결한 형태들,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몇 가지 색이 전부다. 지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추상회화는 기본적인 조형 언어로 감축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또한 마찬가지다.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색은 이름붙일 수 없는 미묘함을 가지며, 기하학적 형태 또한 대기에 감싸인 듯 모호하다. 모든 작품의 제목이 [무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함축하기 위해, 흔히 의미 그자체로 간주되는 지시대상을 괄호친다. 빛이 머문 흔적들을 제시하는 듯한 그의 작품에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묘사가 아니라 은유이다. 그가 구사하는 간단한 조형 언어는 형식으로의 환원도, 세계와의 단절도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이다’라는 확언이 아니라 ‘--이 아니다’로 해석된다. 이는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의 수사법이다. 한 번의 확언과 달리,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물의 편’(프랑시스 퐁주)에 선다. 갓 출시된 상품이나 명료하게 정의된 개념미술같은 방식이 아니라 오래된 사물과 더욱 가깝다. 현재를 명확하게 조명하는 빛이 아니라 사라져가거나 생겨나는 빛이다. 그의 색은 빛을 닮았다. 전원근은 ‘빨강, 노랑, 파랑, 초록’에서 ‘작업에 필요한 모든 색조가 이 색들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색을 팔렛트에서 섞는것이 아니라 40 -50 또는 그 이상의 얇은 레이어를 화면 위에서 서로 매우 얇게 덧대어 새로운 색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독일법인 현대 자동차 매거진과의 인터뷰) 2004년 독일 레버쿠젠에서 있었던 개인전 제목이 [추상, 절제, 감정]이었듯, 그의 작품에는 집중과 절제가 있다. 작가는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개별 물감들의 층 사이의 건조 시간을 관찰’하고 ‘자연, 온도, 습도, 빛에’ 의존한다. 여름이나 겨울 등 한 계절에만 가능한 작업도 있을 정도이다. 빛/색의 강도나 스크린의 두께에 따라 서서히 달라지는 듯한 화면은 순수하게 물감으로만 발색된 결과다. 다른 작품들과 나란히 보면 시시각각 조명이 변화하는 듯한 움직임의 환영이 있다. 크지 않은 작품이지만 마치 밤과 낮이 바뀌는 시간대의 하늘의 빛/색을 보는 듯하다. 미학에서 추상미술은 숭고로 해석되곤 한다. 미/숭고라는 미학적 범주에서 작품 크기는 중요한 요소지만, 경계가 모호한 그의 작품은 크기와 상관없이 숭고하다. 숭고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이라는 의미라면 말이다. 그의 작품은 작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아마도 고전적인 원근법은 ‘한눈에...’의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하는 형식일 것이다. 전원근의 작품은 공간보다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시간성은 설치 같은 큰 규모에서 중요한 범주지만, 그는 회화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여명이 밝아오거나 석양이 질 때 공기층을 통과하는 빛이 한가지 색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색과 색은 경계가 없고, 한 영역을 차지하는 색조차 특정되지 않는다. 지상의 모든 명확함을 규정짓는 경계는 하늘과 구름이 그렇듯이 사라져 버린다. 경계의 사라짐으로 인해 색은 또한 빛이 된다. 추상미술은 대개 지시대상이 없지만, 그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자연과 연계한다. 초기 추상화가들의 염려였던 예술과 실재를 단절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에서 경험의 비중을 말한다. 작가의 취향에는 역사나 고고학 같은 항목도 있다. 독일에서 25년간 공부하고 작업하면서도 ‘한국에 가면 항상 역사적 건물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사용된 재료와 색상을 살펴본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흔적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이 ‘먼저 느낀 것을 그런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추상화가에게 늘 상 질문되는 것, 요컨대 작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는 모든 작품의 제목인 [무제]로 암시한다. 재현주의에서 의미가 그려진 대상과 밀접하다면, 대상이 부재한 추상에서의 의미는 모호하고 그것이 대중적 소통을 저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려진 사과를 보고 저건 사과야라고 하는 것이 의미나 이해로 간주되는 관행은 부조리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그리트나 푸코 등 현대미술가와 철학자의 이의제기가 있었다. 프랑크 라우쾨터(뵈트허스트라세 뮤지엄 디렉터)는 대상이 부재한 비구상 작가들의 계보에 전원근을 놓는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회화를 위한 회화를 하는 추상의 전통은 회화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 ‘원뿔, 구, 그리고 원기둥의 형태들은 자연의 모든 것으로부터 본을 뜰 수 있다는 폴 세잔의 신조도 간접적으로 적용이 된다. 더 직접적인 의견은 테오 반 되스버그의 격언이다’ ‘반 되스버그는 그림은 오직 순수한 방식으로만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자연을 흉내내지 않은 색과 평면들로만 이루어져, 그들만을 위해 서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전원근은 세잔의 입체적인 요소들과 되스버그의 평면적 개념 사이를 중재한다’고 말한다. 프랑크 라우쾨터는 추상회화의 전통에서 전원근의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다. [감각의 논리]에서 추상회화를 코드화라고 비판했던 질 들뢰즈는 추상회화의 출발점에 놓인 세잔의 경우 기하학의 사용을 회화 코드의 사용과 달랐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세잔은 기하학을 부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유사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삼각형, 사각형 등으로 환원하는 이후의 기하추상은 부호와 같은 작품이지만, 유사의 언어는 ‘표현적인 운동, 측면 언어적 기호들, 숨결, 고함 등을 포함하는 관계적 언어’이다. 명확한 경계 없이 부드럽게 번져 나가는 전원근의 어법 또한 언어이기는 하되 부호와 같은 명확한 언어는 아니다. 색을 구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인데,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세잔이 피렌체식 선원근법 체계가 아니라 베네치아식 색조 체계를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그림을 얕은 상자처럼 다뤄서 화면 뒤로 공간을 겹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세잔의 풍경은 소실점이 없는 대신 공간이 평행하게 몇 겹의 층을 이룬다. 그것은 입체감을 주기 위한 모델링의 관행이 아니라 색채 가감 방식, 즉 옅은 농도의 물감들을 캔버스에 직접 나란히 칠하는 것이며, 전원근 또한 여러 겹의 색칠로 반복과 차이를 실행한다. 세잔처럼 정렬과 불연속을 사용하여 형태와 색채를 반복한다. 앨런 보네스에 의하면 세잔에게 그림은 색깔있는 붓자국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공통 기준이었다. 들뢰즈에 의하면 추상회화의 색채와 선은 유사 언어적이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회화가 줄곧 훌륭한 유사적 언어였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한다. 들뢰즈는 세잔의 작업에서의 색채 변조에 대해 ‘유사들의 조화’라고 말한다. 기하학을 부호가 아닌 감각이 되게 하여, 감각들이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앨런 보네스에 의하면 세잔이 사물의 외양을 몇 년간에 걸쳐 기록한 후에 사물 자체에 가까워지는데, 사물 자체는 본질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세잔과 모네는 베르그송이 주장처럼 시간 내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만 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관찰자의 변화하는 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과의 연계 속에서 기하학이 언급된 세잔과 달리 이후의 흐름은 그 연계를 떼어낸다. 앞서 세잔과 같이 언급된 테오 반 되스버그로 대표되는 구성주의가 대표적이다. [모던 유럽아트]에 의하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모던 스타일을 고려한 테오 반 되스버그는 추상이라는 말 대신에 구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는 ‘예술가의 목표는 추상적, 해석적 미술이 아니라, 구체적, 구성적 예술이다. 그것은 모든 연상적인 것을 제거하고, 정신이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명쾌하고 단순한 형태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 질서는 가능한 한 비개인적이고 기계적인 기술에 의해 정돈되어야 한다. 이 구조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결국 건축과 디자인의 길로 접어든 것은 소비에트의 구성주의나 서유럽의 바우하우스 등의 실험에서 찾아진다. 그러한 기계주의적 파토스가 유행했던 1920년대에 대학 강당 등을 디자인 하기도 했던 테오 반 되스버그의 구체예술은 자연에 뿌리를 두지 않은 대신에 예술자체의 형식적 속성에 바탕을 둔 예술을 말한다. 추상미술가인 칸딘스키 조차도 ‘내면의 삶을 대상을 통한 우회 없이 직접 표현하는,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구체적 미술’을 언급한다. 구체예술은 반(反)자연, 재현을 넘어서 추상까지도 극복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미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인공적인 자연의 창조가 이미 추상의 단계를 초월한 구체예술이다. 추상미술의 개척자들도 나중에 가서는 추상이란 명칭을 회피하였다. 반 되스버그는 2차원의 화면 위에서는 환영(illusion)으로 표현되는 자연형태, 즉 추상보다도 순수한 선, 색, 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구체예술가들은 자연과 양식을 대립시킨다. 1919년 [데 슈틸]지는 ‘자연의 목적은 인간이다. 인간의 목적은 양식이다’라고 선언한다. 20세기 초반의 전위화가들에게 자연은 인공적 수단에 의해 초월해야 할 것으로 설정된다. 몬드리안은 ‘이 세상의 무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을 미술의 목표로 삼았는데, 이 해방은 탈(脫)자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절대주의자인 말레비치도 ‘구상(具象)적 방식을 포기한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재앙과 근심을 주지 못하도록, 자연 및 자연의 근원적인 힘에서 벗어남으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구체예술의 두 번째 특징은 실체 개념적 파악 방법에 대신하여, 관계개념 또는 함수 개념적인 파악 방법이다. 분석 입체파에서 종합 입체파로의 여정은 자연에 따르는 구조가 아니라 ‘자율적’인 구조를 향한다. 현실에서 기하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에서 현실이 나오는 전도가 일어난다. 구체예술의 ‘내용’은 기능이라는 내용을 가지는 디자인의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1945년 막스 빌은 ‘구체예술이란 물적 효용을 위한 것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추상적 코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의하면 추상회화는 상징적인 코드를 만들어낸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수직적-하얀색-활동성, 수평적-검정색-정체성 등으로 코드화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추상회화는 이러한 순수 회화적인 코드의 세공화를 밀어부쳤다. 코드화라는 유사 과학적인 흐름은 철학에서의 구조주의와 비교될 수 있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 ‘나는 이러한 형식적인 불변 수들, 정신적 세계를 내비치는 이러한 관계들, 예술가마다 필요에 따라 재 창안해 내는 이러한 관계들을 구조라고 부르겠다’(루셀)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를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의 개념은 형태학적이거나 기하학적인 공간인, 형태들과 장소들의 질서인 공간에만 관련된다. 구조는 어떤 조립물 또는 구조물은 내적인 통일성으로서의 유기적이거나 인공적인 작품에 깔려있다. 구조라는 통일 원칙에 의해 지배된 작업물은 중심과 주변을 나눈다. 하지만 전원근의 작품에서 지양되는 것은 중심이다. 미광이 움직이는 듯한 면이든, 흐릿한 원들이든, 가장자리만 빛나는 텅 빈 캔버스든, 무언가를 덮으면서 내려오는 선이든 모두 ‘구조에 중심을 주고자 하는 의도, 고정된 기원에 관계시키려는 의도’(데리다)와 거리가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 중심의 기능은 구조에 방향을 부여하고 균형을 잡아서 구조를 조직하는 것이다. 전원근의 작품은 공간적 명확성을 가지는 구조 대신에 시간성이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 중시되는 차이, 차연, 반복, 흔적, 보충 등의 개념은 모두 시간성에 방점이 찍힌다. 청자나 백자같은 오래된 사물의 표면을 떠올리는 전원근의 작품에서 ‘모든 완결된 구조’(데리다)는 불가능하다. ‘텔로스는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열린 문’(데리다)이다. 전원근은 몇가지 색과 형태로 감축된 자신의 작품을 ‘내면세계의 거울’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자신만의 경험과 그와 관계된 기억의 잔상, 연상을 불러모을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무의미는 아니다. 작가는 ‘새로운 그림마다 지난번 작업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있도록 노력한다’고 하면서 ‘끊임없는 진화’를 말한다. 또 하나의 작품군은 둥근 형상들이 분포한 화면들이다. 확대를 거듭해서 흐릿해진 망점같은 느낌은 둥근 형태들은 마치 입자같이 보인다. 고대부터 여러 형태로 주장된 원자론에서 세상을 이루는 근본 입자는 미시적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기구에 의한 확대가 필수적일 것이다. 그림이라는 창 또한 그러한 확대경이 될 수 있다. 물리적 실재와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보자면 마치 볼풀공같은 형태들이다. 물론 유아들의 놀이터를 채우는 볼풀공과 달리 색조는 정확히 무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색으로 차분하게 조율되어 있고 중력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단색조로 채워진/비워진 작품들도 있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린 둥근 형태는 캔버스 바깥으로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이 시리즈는 둥근 형태의 배치가 다르다. 같은 크기의 화면이면서 나란히 놓고 봤을 때 잠재적인 동감이 있다. 한 화면에서 동그라미 크기는 같지만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색이 빠진 듯한 동그라미들도 색이 있는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느끼게 한다. 마치 무언가가 탈색된 것처럼 말이다. 화면마다 동그라미의 배치와 밀도는 달라지고,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작품 간의 원근감의 차이에 의한 동감이 있다. 색의 명도에 따라 깊이감도 있어서 추상적 화면 안에는 공간이 잠재한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크기는 일정해서 색감에 따른 추상적 원근감이다. 또 하나의 시리즈는 화면 가장자리에 미광이 느껴지는 작품군들이다. 색/빛의 경계는 없지만 화면이라는 경계에 기댄다. 화면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작품마다 화면 가장자리 빛의 양상은 달라져 이 또한 잠재적 움직임이다. 이 시리즈에서 화면의 옆면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화면들에 각기 다른 분위기를 주기 위해 무수히 칠했던 물감 자국이 가득하다. 측면만 보면 마치 염색체같이 다양한 유전 정보를 조밀하게 접어 넣은 형태가 떠오른다. 캔버스 옆구리의 여러색 층들은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부지런하게 발짓하는 새의 행동이 떠오른다. 그것은 색이 빛으로 승화하기 위한 몸짓일까. 전원근의 작품에서 평온함을 보는 프랑크 라우쾨터는 이에 대해 ‘그림의 과정으로 인한 색의 자취들은 모든 작업 모서리에 보이도록 남겨져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그가 보통 사용하는 색들, 즉 파랑, 노랑, 초록, 그리고 빨강, 그리고 얼마나 그 색들을 희석하는지를 밝힌다’고 말한다. 입자와 빛 등 자연의 근본 요소 외에, 재현적 형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붓질이 있는 작품군이 있다. 세로줄/결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소낙비나 창살같은 구체적인 형태가 있다. 죽죽 내려 그은 듯 한 화면은 푸른색과 어우러져 쏟아지는 비나 폭포 같이 물을 떠올린다. 작품마다 푸른 세로줄의 밀도는 다르다. 화면의 색과 결은 빛을 덮는, 또는 누르는 어둠이다. 줄이 아니라 결이 암시되는. 어둠의 장막이 밤처럼 내려앉는다. 어둠 아래로 창살같은 것이 넌지시 비춰진다. 작품마다 ‘창살’의 간격도 차이가 있다. 다른 작품군들과 달리 중력의 방향이 확실하다. 청자나 백자같은 오래된 도자기 표면 같은 색감과 질감을 가진 작품은 그가 역사적 사물에 가지는 관심을 반영한다. 그는 역사적, 고고학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말하면서, ‘그것들이 당시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수세기 후에 어떻게 발색이 될런지 궁금해’한다. ‘한국의 전통 도자기와 그것에서 사용되는 하늘색 유약 빛깔에도 매료’된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오래된 사물이야말로 당시의 빛을 머금고 있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 전원근의 작품에서 빛과 색이 교차되듯, 예술과 사물 또한 그렇다. (출처 = 데이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