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정체성의 요구 한국의 현대미술, 특히나 한국 현대 동양화는 근대 이후 유입된 서구미술과 지난 전통사회에서 기능하던 이미지 사이에서 나름의‘알리바이를 만들어 나가려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배태되었다. 타자를 접하는 순간 자아에 대한, 나에 대한 정체성의 요구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이다. 서구 미술의 단순한 수용이나 과거의 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 동양과 서양, 전통문화와 서구 현대문화가 접촉하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이 중요해졌으며 이는 새로운 미술, 새로운 주체를 요구했다. 그로부터 발원하는 미술은 다분히 개념적이어야 했다. 여기서 개념적이란 ‘개념미술’이 아니라 작업을 하는 나름의 ‘타당한’ 논리를 지녀야 했다는 뜻에서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아니 대다수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으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실은 외부에서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 작가들에게 공통된 과제이자 심리적 억압과 불편한 강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동시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추이이자 상식적인 작업의 내용이자 이념이 되었다. 반면 미술이 이렇게 제한된 당위성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그것은 미술의 자유를 다소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집단적인 미술 사조나 유사한 작업들의 반복이 그러한 예증이다. 따라서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은 타자와는 다른 자기 미술의 논리와 이념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것이 결코 억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틈에서 자신의 작업을 개별적인 그 무엇으로 위치시켜야만 했다. 자신에게 있어 미술이 무엇인지, 동양화작업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별적 시각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전통회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뜯어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양화와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주체적 시각과 해독 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구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해석 역시 그러하다. 동양화적인 것의 추구 이주연의 작업은 그런 맥락에서 이른바 ‘현대적인’ 동양화 작업을 탐색 하고자 한다. 사실 현대적인 동양화란 이상한 표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동양화 장르, 개념, 매체 등등을 서구현대미술의 논리 속에서 해체, 재구성 해나가려는 일련의 시도를 총칭한다. 그것은 ‘동양화적인 것’에 모색이자 추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이후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작가는 동양화, 서양 현대미술의 접점에서 자신이 작업을 위치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작가에게 동양화작업의 근간은 재료체험에서 나온다. 한지와 먹, 분채, 모필이 여전히 그림의 핵심적인 매개가 된다. 이 재료는 단지 물리적인 수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표현의 미감과 특질이 지니는 상징성, 전통에 대한 은유를 함축하고자 한다. 또한 재료가 발산하는 지니는 의미와 함께 그것들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뒤따른다. 여기서 공간이란 두 가지를 함유하는데 하나는 그림이 이루어지는 평면으로서의 화면이고 또 하나는 그 평면의 화면이 벽으로 확산되고 가설되는 차원에서 맞닥뜨리는 공간개념이다. 전자는 그림의 본질적인 토대, 조건인 평면성을 유지하면서 그 평면성 안에 색을 입혀 일련의 색 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그림은 이미지나 내용, 주제가 소거된 상태에서 색채로 물들은 평면으로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다분히 색 면 추상과 유사하다. 추상표현주의의 화면 개념에 색채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킨 1960년대 미국의 색 면 추상은 형태를 소수의 단순한 모양으로 감축시키고 캔버스를 거대한 규모로 확대시킴으로 해서 순수한 색감의 화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거두고자 한 그림이다. 색상간의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분할에 있어서 극히 협소한 표면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색 면을 연속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단순화와 함께 화면 내부의 형태를 캔버스의 사각형 구성에 연관시켜 보고자 한 이들이 색 면 추상화가들 이었다. 이들은 색채만이 제공하는 경험을 보여주거나 채색과 바탕이 완전히 융합된 작품을 선보였다. 그로인해 색채는 하나의 언어, 감각을 통한 색채언어가 되었다. 이처럼 색 면 추상작업은 색채의 대조와 대비에 의하여 회화를 완성하고자 했으며 이들에게 색채는 단지 물리적인 흔적이나 물질(물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전달자 혹은 다른 정신적 실체로 들어가는 통로로 이해되었다. 색과 빛의 형상화 이주연의 작업 또한 순수한 색채의 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이 이미지를 대신하고 주제나 내용을 대체한다. 다분히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균질하지 않은 색 면을, 그 미세한 차이를 주의 깊게 응시하게 하면서 여러 상념에 젖어들게 하는 편이다. 동시에 그 색채는 빛이기도 하다. 작가는 색을 빌어 결국 빛을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평면의 사각형 화면은 수많은 빛을 모으고 투과하고 다시 방사하는 공간이 된다. 그것은 화면이자 창문이고 색채이자 그림이며 그림이자 실제 벽과 공간으로 구획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색이란 인간의 눈이 수용하는 외부의 자극을 가리키며 그 실체는 빛이다. 빛은 태양의 광선, 곧 빛의 파장이며 우리들의 눈은 제한된 범위내의 빛(파장)만을 보고 있으며 이것이 서로 다른 색으로 지각된다. 인간이 식별할 수 있는 색은 어림잡아 약 800만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색은 나라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색은 다른 의미를 부여 받아 온 것이다. 우선 빛은 사물이 존재와 형태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전통적으로 미술작품에서 빛은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통일감과 질서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명암대비를 낳는다. 결국 빛이 미치는 범위는 사물이 보이는 범위가 된다. 그리고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런가하면 빛은 사물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회화적 표현에서 빛은 상징성을 갖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상징성은 문화권마다 다르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 안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 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빛에 의해 수시로 몸을 돌변하는 자연, 대상을 포착하려는 것이 모든 미술가들의 부질없는 욕망이었다. 해서 미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빛을 잡아 놓는다. 이주연의 색채, 색 면 그림 역시 그러한 기미를 포착하고 구현하려는 시도에서 나온다. 그것은 결국 빛의 형상화다. 이주연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부드럽게 착색된 색/빛은 무수한 시간 동안 발림과 삼투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로인해 표면에 은은하고 깊이 있는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색상을 지닌, 여러 단위로 분할된 색 면들은 건물(전통적인 한옥)의 창문이나 공간구획, 그리고 조선시대 조각보 등을 인상적으로 떠올려준다. 한국의 조각보는 다각형, 원형, 삼각형 등이 문양으로서 구성되며 형태는 반복적 구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창살의 형태, 담과 벽의 형태, 목가구의 형태를 분해하고 이를 응용하여 독자적 방법으로 재결합 시켜 만든 것으로 다분히 비대칭적 균형을 이루는 면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작은 색 면들이 절묘한 구성에 의해 재배치되어 새로운 미적 공간으로 거듭 나는 조각보의 예술적 성취는 이주연의 작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작가는 흡사 조각보의 구성처럼 평면의 화면을 여러 개의 면으로 쪼개어 공간을 만든다. 이때 면과 면을 분리하고 일종의 경계로 작용하는 요철의 면(입체의 벽)이 빛에 의해 그림자를 만들고 깊이를 부여하며 다층적인 공간감을 안겨준다. 또한 단색으로 보이는 화면은 실상 미세한 색 층의 차이로 인해 단일한 색 면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구체적인 색상의 명명성을 이탈하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색채로 분산된다. 그로인해 색은 심리적인 영역을 획득한다. 그 색/빛은 한지를 투과한 광선의 느낌을 매혹적으로 발산한다. 한옥의 격자형 창문에 발려진 한지, 창호문짝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색 면 추상에 유사한 평면회화이자 동시에 전통적인 조각보의 화면구성 혹은 요철효과를 지닌 입체적인(부조적인 회화)물이기도 하며 다분히 건축적인 구조물과 흡사하기도 하다. 사각의 프레임 회화란 일정한 평면 위에 그려진 이미지가 프레임(액자)에 의해 제한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회화는 주어진 사각형의 화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림의 내용은 사각의 틀, 프레임이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셈이다. 모든 그림은 그 사각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며 그 모서리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물리적 실체로서의 사각형의 화면은 오랫동안 회화를 회화이게 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인 셈이다. 그 사각의 틀이라는 완강한 한계로부터 부단히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1960년대의 프랭크 스텔라의 이른바 ‘변형캔버스’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회화는 사각형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한편 깊이를 동반한 두께에 의해 지탱되어 나가면서 회화와 조각, 그림과 물질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더 나아가 화면은 벽에 기생하는 회화의 삶을 확장시켜 벽 전체로 펼쳐지거나 타고 넘어가는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 벽의 표면을 문제시하거나 공간 전체에 사건을 야기하는 식으로 펼쳐진 것이다. 사각형의 화면 안과 밖이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긴장을 이루는데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면서 동시에 부조이자 조각이고 또는 벽 전체가 지각적 표면으로 돌기되는 형국이다. 그런가하면 조각이란 것 역시 일정한 공간에 3차원의 입체물이 조각대(좌대)에 올려 진 경우를 말한다. 회화와 조각은 각기 이 액자와 좌대에 끼워지고 놓여 졌을 때 회화, 조각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권위, 명칭이 그것들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액틀과 좌대는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지녀오면서 이어져왔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어쩌면 이 액틀과 좌대를 지운 자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림이게 하고 조각이게 하는 장치였던 액틀과 좌대를 치우자 그림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벽에 붙은 사물로 보이기 시작했고 좌대를 치우자 3차원의 입체물 역시 바닥에 내려앉아 일상적 기물과 하등의 차이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오브제나 설치미술로 귀결되는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액틀과 좌대가 더 이상 부속물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직접적 오브제가 되거나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회화에서 액틀을 처음으로 치운 사람은 몬드리안이다. 사각형의 캔버스 그 자체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 테두리를 작품의 내용으로 끌어안는 것이 바로 그의 선과 면으로만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이후 화면의 모양이 그 내용을 규정하는 이른바 변형캔버스 작품이 앞서 언급한 스텔라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액틀은 현대미술에서 사라져버렸다. 물론 여전히 액자를 존중하는 작가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 액틀의 중요성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조각의 좌대 역시 로댕에 와서 없어진다. 받침대가 하나의 실재로 취급되는가 하면 오직 그 받침대, 사각형의 박스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 현대조각의 운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이 프레임이란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닌 셈이다. 이주연은 액틀이 사라진 화면, 화면과 프레임, 화면과 공간 등을 질문한다. 앞서 언급했던 현대미술의 자기 환원에 따른 액틀의 제거로, 그로인해 실제적인 오브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작가는 오히려 그 사이의 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데리다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언급한 파레르곤 이란 용어에 주목한 것을 상기시킨다. 파레르곤 이란 에르곤(작품)에 기생하는 부차적인 것, 그러니까 회화에서는 틀을 말한다. 논문의 각주 역시 그런 의미이다. 쟈크 데리다는 그것이 작품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고유한 작품의 내적 구조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파레르곤은 작품(에르곤)의 결핍에 관계 맺는 내적 구조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상호 보족하는 관계인 ‘액틀-그림’이라는 것이다. 액틀을 그림을 위한 단순한 장식이나 혹은 작품을 단순히 장식하는 껍데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림과 액틀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림이 시작되고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모색이 반영되어 있다. 이주연은 화면-액틀의 구분이 없는 상황으로 나가며서 그 모두를 끌어안은 화면, 동시에 화면 스스로 액틀로, 입체로, 구조로 증식해 나가는 추이를 용인한다. 중심도 주변도 없고, 다양한 응시의 시선을 허용하는 무수한 면들로 이루어진 화면이다. 평면적이면서도 수직과 수평, 좌와 우, 부감과 조감의 시선에 의해 연속적으로 다양한 공간을 열어나가는 화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평면이자 입체, 그림이자 조각에 해당하는 화면 구성으로 인해 가능한, 펼쳐지는 시선이다. 전통적인 동양화는 비 원근법적 공간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동양화에서 고정된 하나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화의 장의 혼융상태에 있는 동양화와는 달리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다. 그로인해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부터(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 (주체로서의) 실체가 사상된다. 실체의 개념은 하나의 실체 둘레에 지각의 틀을 만들어주는 응시법 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응시법은 전체의 시장(視場)으로부터 하나의 컷을 잘라내어 그 잘라낸 컷을 정지된 틀 속에 부동의 것으로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하나의 회화적 공간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을 서로 가르는 분명한 구획선이 없다. 모든 것은 실재이며 동시에 무인 우주의 진여를 배경으로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적 장에 자리하며 그 장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고 또는 그 안에서 구획 짓는 테두리를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무상의 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실체의 존재적 근거는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독립된 자아적 존재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동양화 구도의 특징이자 응시의 핵심이다. 나가는 글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주연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자연스레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서양화, 나와 타자, 한국 전통 미술과 서구 현대 미술의 차이와 갈등을 몸소 겪어냈던 것 같다. 안에 있을 때보다 밖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좀 심각한 질문을 강요받거나 문화적 충격을 겪는다. 어쩔 수 없이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충돌과 교차를 치러내면서 작가가 깨달은 것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 강요나 선언이 아니라 둘의 조화에 놓여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조화는 결국 소통의 차원에서 모색된다. 서로 다른 것들을 섞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었던 것을 한 축으로 해서 그 위에 새롭게 받아들인 것을 접속하는 일이 작업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작가는 전통 동양화가 지닌 특징적인 기법, 모필의 맛과 선염과 삼투 그리고 풍성한 수용성의 회화를 근간으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존 동양화 재료를 개방하고 확장시켜 여러 재료를 과감하게 수용해 그려내고는 그렇게 이루어진 낱낱의 화면을 중층적으로 포개거나 잇대어서 부조나 조각, 또는 벽면 위에 설치화 하는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 따라 재료의 개방성과 틀의 확장, 탈평면화 그리고 화면내부의 공간이 다층적인 공간으로 확산, 배치되며 다분히 입체적인 회화가 만들어졌다. 이 변형 화면은 그림과 입체를 동시에 거느리고 벽 위에 돌출 되어 있다. 회화이자 부조이고 그리기와 만들기가 혼재되어 있으며 화면은 여러 층위의 공간/시간이 겹겹이 쌓여있다. 정면에서는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른 깊이, 층 차를 지니고 있다. 표면에서는 눈에 띄지 않은 그 다른 깊이, 복잡한 내부는 겉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상이다. 이중의 세계를 한 몸에 지닌 화면은 벽에 붙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벽으로부터 부단히 나와 보인다. 나오려는 힘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응시의 시선, 구도는 다분히 전통적인 동양화의 특질에서 연유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