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2025.08.27 - 2025.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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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수~일요일 12:00~19:00 |
| 장소|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서울 |
| 주소| |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6길 4/지하 1층 |
| 휴관| | 월,화 |
| 관람료| | 무료 |
| 전화번호| | 02-733-0440 |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 작가| |
김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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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수정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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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누아르 김상소 개인전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누아르—이 한 단어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겹쳐지고 얼마나 멀어질까? 글 대신 쓰여진 것이 회화라면, 그것을 읽는 방법은 어떻게 공유될 수 있을까. 누아르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무수한 명대사와 장면들이 무색하게, 누아르는 그 자체로는 무엇도 상정하지 않는다. 오직 분위기만을 전할 뿐이고, 수반하는 장르가 있을 때만 비로소 성립한다. 이처럼 누아르는 중심이 없이 부유하는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그 모호함으로써 수많은 이미지들을 끌어당긴다. 누아르의 핵심은 경계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나 그 경계는 종종 서사 속에서 대립하는 것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결국 다르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누아르》는 형용사처럼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보임과 이해의 사이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연장될 수 있는지 탐구한다. 김상소에게 누아르는, 전혀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으로부터 발견된다주1. 수집하고 소화한 이미지를 화면 위에 펼치고, 퍼즐을 조합하듯, 그 사이에 어떤 것이 누락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틈새를 서사로 반전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들은 가운데 중심으로 선형적으로 드러나지만, 선험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이미지가 한 단편으로서 포착되고 쪼개어질 때 그것의 시간성은 잠시 희미해진다. 김상소는 이렇게 시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사건들을 서사의 형태로 다시 쌓지만, 꽉 닫힌 기승전결을 위한 것은 아니다. 순서 없이 발생한 단편적 경험들을 모아 화면 속에 정리하되, 얼마든지 다시 분해되고 이어질 수 있게 여지를 둔다. 회화와 같은 부동의 매체에서 시작과 끝을 정하는 일은, 수집된 이야기들을 자신의 언어로써 다시 써 내려가는 작가의 몫이 되어버린다. 김상소는 만화, 소설, 영화와 같은 픽션과 뉴스, SNS, 일상과 같은 현실의 풍경이 서로 교차하거나 평행하는 순간을 본다. 맥락 없이 수집된 사물과 이미지들이 하나의 장면을 이루고, 화면 위에서 이어지며 일종의 서사를 연상하게 만드는 회화를 꾀한다. 세상은 이미 정리된 정보로 가득하고, 날 것을 스스로 채집해 분류해 볼 기회는 적어졌다. 그러나 김상소는 이러한 현상을 정보의 과잉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의 장면처럼 바라본다. 선입견으로부터 가능한 멀어져, 분류체계 없이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이어본다. 세계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으며 어떻게 그것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림 속 이미지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게 하고, 지금의 모습에 영향을 준 것들이다. 직관은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축적되고, 그 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한 작은 사건들은 단서처럼 배열되고, 시간의 파편들이 모여 미상의 연표를 전개한다. 삶의 여러 단서들로부터 파생된 감각은 화면을 채우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하던 이미지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잇는다. 작가는 그림을 그려나가야만 어떤 것들이 비어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서사의 빈자리를 찾고 채우는 노력은 단순히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회화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구체화하고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전시장을 감싸거나 가로지르는 납작한 화면들 사이로 두께를 가진 회화들이 놓여있다. 작가가 조각 대신 ‘덩어리’라고 부르는 이 작업들은 말 그대로 부피를 가진 회화이다. 각 덩어리의 한 면에는 여성 작가의 문학 작품주2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나 사회적 현실의 단면을 드러내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문장들은 내용을 지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단 얼룩이나 흔적처럼 드러나거나 가루처럼 쌓여있고, 조형물은 각도에 따라 색이나 물성만을 드러낸다. 캔버스 옆구리가 작가의 성향을 보여주듯, 화면의 일부이자 번외처럼 이야기를 전하는 덩어리들은 회화 사이에 개입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고 장면의 흐름을 비트는 장치로 기능한다. 때로는 말풍선처럼 서사에 끼어들고, 일방향으로 흐르는 화면을 다차원적으로 확장하거나, 커다란 색면으로서 화면에 스며 있던 빨강이나 파랑을 도드라지게 하기도 한다. 일부러 반복되지 않는 물성과 형태를 사용해 그림들에 중성적으로 스며들 수 있게 한다. 누아르는 명암의 충돌을 통해, 어둠 속에 있어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시대의 결을 드러낸다. 김상소는 누아르를 탐구하던 중, 오늘날 더 이상 묘사되지 않는 ‘멋진 남성성’에 대해 주목하기도 했다. 과거 미디어 속에서 남성 지배적인 이미지가 매력적으로 소비되거나, 거칠고 야성적인 태도가 곧 남성성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흔적이 되었다. 본질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회화를 탐구한 모더니즘은 가능한 모든 요소를 덜어내 핵심만을 남기려 했고, 김상소는 오히려 그러한 모더니즘의 태도 속에서 오래된 남성성의 흔적을 발견한다. 역사가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생소한 깨달음과, 이미 그것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양가적 감정 속에서 그는 새로운 질문을 떠올린다. 미술사의 흐름을 떠올리는 이미지 속에 동네 혹은 온라인에서 발견하게 된 여러 단상들과, 여성 작가와 가족의 서사를 병렬함으로써, 자신 안에 뿌리내린 익숙한 누아르의 감각을 전복해 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지를 카테고리화하거나 기존의 이분법적인 구조를 오히려 지양하고,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수평적으로 흐르며 위계 없이 드러나는 것을 꾀한다. 작은 네모 안의 이미지들은 일상에서 발견한 장면들이고, 바탕에 검게 펼쳐진 화면은 직관적으로 드러난 풍경이다. 전자는 이미지를 소화한 흔적이라면, 후자는 무의식적 반응에 가깝다. 두 층위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강렬한 대비 속에서 오히려 모든 것이 중첩된다. 마치 누아르의 대비가 결국 모든 것을 평행시키듯, 이미지들의 충돌은 오히려 그 사이에 위계가 없음을 드러낸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일과 본 것을 그리는 일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일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의 외피를 터득하는 일이고, 후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들이 내면에 이룬 세계를 그리기를 통해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쌓여온 심상을 꺼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드러낼 길을 찾아야 하고, 심상을 쌓기 위해서는 사물과 세상을 곱씹어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신중히 고른 한 단어에서 더 깊은 울림을 느끼는 것은, 나 또한 그 단어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은 어떻게 작가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삶에서 마주한 사람과 사물, 성공과 좌절을 번복했던 순간들, 오래된 신념이 수치와 반성으로 다가온 기억들, 막연한 미래를 익숙한 단어들에 기대어 읊어본 경험들이 어떻게 그림이 되고 회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누아르’는 우리를 한 장면을 공유하는 듯한 착각 속에 놓지만, 실은 각기 다른 기억과 이미지를 불러낸다. 작가가 던져놓은 회화라는 걸쇠에 이끌려 시선을 모았다가, 곧 생각 속에서 다시 각자의 세계로 흩어지고, 까맣게 사라진다. 회화에는 운동성이 없지만, 시작과 끝을 한자리에 드러내거나 여러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성을 정수처럼 드러내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김상소가 회화에 천착함으로써 앞으로 도달하고 싶은 것은 끝없이 얽히고 연장되는 서사들을 포용할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무게를 드러내는 침묵으로서의 회화와, 모호할수록 온전해지는 형용사처럼 말이다.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 *출처 및 제공: 스페이스 사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