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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본다. 보이는 현실을 변형하거나 조합한 심상을 의미하던 이미지가 이제 현실보다 먼저 도달해 우리가 보게 될 세계를 설계한다. 즉 현실의 결과로 이미지를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결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동시대 미술 역시 다양한 이미지를 자신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런데 미술이 이미지로부터 태어나 이미지로 종결된다면 작가와 작품은 어떻게 현실에 닿을 것인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이 끝없이 복제되는 기호의 연쇄에서 재현의 종결을 입증했다면, 오늘날의 미술은 실재하는 것의 환영이 아니라 이미지의 그림자와 투쟁한다. 이런 시대의 미술에서 재현은 기피하거나 끊어내야 할 사슬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딛기 위해 회복해야 할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지금 형상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이유다. 《형상 회로: 동아미술제와 그 시대》(이하 형상 회로)는 《동아미술제》(1978)를 계기로 한국 미술의 현대적 도약이 펼쳐진 형상의 시대를 조망하는 전시다. 1970년대는 단색화가 이룬 성취가 정점에 도달함과 동시에 주류화된 형식주의 내부에서 현실을 향한 새로운 감각이 싹튼 시기다. 제도적으로는 국가가 미적 판단을 독점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1949—1981, 문교부 주최)—의 관제 미학을 거부하고 그 경직성을 타파하려는 요구가 분출했다. 1978년 동아일보사와 동아방송이 개최한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형상성’을 화두로 미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일신하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상’이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이전까지 미술의 관례에서 ‘구상(具象)’은 주로 사실주의적 화법을 지칭하는 말로 좁게 쓰였으나, 형상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사실 재현과 순수 추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미학적 활로를 찾기 위한 의지를 반영한다. 동아미술제는 회화와 조각 부문으로 나뉘었는데 각 부문 수상작은 매체의 고유성을 강조하기보다 미술제의 취지에 맞추어 기존 형식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를 보였다. 1980년대 형상 탐구는 일군의 실험미술이 거둔 성과와 함께 탈매체, 다원주의, 일상에 관한 관심과 유희로 수용되며, 1990년대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토대를 이룬다. 다음은 형상의 논의가 담으려 했던 사회적 변화와 의지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은 압축적 근대와 유신체제라는 전무후무한 개발 시스템의 격랑을 통과했다. 규격화된 아파트 단지가 삶의 터전이 된 도시에서 개인성의 발견은 익명의 집단 내부에서 각성한 감각적 현실과 연동되었다. 비로소 사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질감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단위로 떠오른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이념이 삶을 규율하는 가운데 낡은 골목길의 벽돌 건물, 버스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 텔레비전과 수입 공산품이 침범하는 미시적 풍경이 강렬한 대비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물질의 범람은 굴절된 모더니즘이나 세상을 초월한 구도(求道)의 미술이 목격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것으로, 동아미술제를 통해 전면에 부상한 형상의 추구는 이에 호응하는 가장 정직한 응답이었다. 동아일보사를 비롯해 중앙일보사(중앙미술대전), 한국일보사(한국미술대상전) 등 언론사가 이른바 ‘민전’을 주도한 점은 흥미롭다. 변화한 세계의 현실성을 투영하길 바란 ‘미디어’의 사명이 미술의 사명과 일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상의 시대와 기원을 공유하는 구상성의 복권이다. 이 움직임은 신표현, 신구상, 자유구상 같은 표제와 함께 미술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전개됐다. 예컨대 이때 ‘새로운 표현성’이란 위계 없이 뒤섞인 대상 혹은 세계를 대면하면서 인식과 표현의 기술적 일치를 시도한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 미술에서는 1980년대 이후 ‘리얼함’을 추구하는 소수의 실천이 꾸준히 지속되었고, 특히 2000년대부터 사진이나 스크린 이미지를 재구성하거나 내면의 심리와 동시대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회화적 양식이 가시화되었다. 일민미술관의 지난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2023)는 산발적으로 잔존한 구상의 실천을 계보화함으로써 이것이 미술사에서 갖는 의의를 탐색했다. 《형상 회로》는 이 기획의 막후에 존재하는 다른 이야기를 비춘다. 이번 전시가 소개하는 동아미술제 수상작가—변종곤, 이승택, 박장년, 한운성, 곽정명—와 인근의 작가—게오르그 바젤리츠, 마르쿠스 뤼페르츠, 정강자—, ‘그 시대’의 지형을 이루는 작가—공성훈, 정석희, 이제, 박광수, 호상근, 김세은, 심현빈, 나디아 지와, 김현진—들로부터 일련의 경향을 찾는다. 《형상 회로》는 형상에 관한 넓은 범주 중 일정한 부분을 다룬다. 우선 정형화된 극사실주의의 이해를 따르지 않는다. 극사실화는 초기 형상 논의의 발전에서 중요한 양식이 되었으나, 본 전시가 진단하는 구상의 흐름은 사실적 경향을 받아들여 일부 작가가 도달하려 한 현전성에 초점을 맞춘다. 다음으로 1980년대에 민중미술에 가까워진 형상미술을 전시의 맥락과 구분한다. 형상과 민중의 접점은 비교적 풍부하게 해명된 영역으로, 이 담론은 이미 포스트민중에 이르기까지 현대적 구상을 읽는 주류의 비평 언어로서 성과와 한계를 모두 남겼다. 전시는 이에 속하지 않은 미학적 도약으로서의 형상에 주목한다. 《형상 회로》의 형상들이 감각의 역전이나 충격,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추동되었듯, 최근 미술에서는 재현이나 환영의 타파가 아니라 광의의 리얼리즘에 근간해 현상적 경험을 매개하려는 경향이 감지된다. 형상적 충동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겁고 느린 이미지를 생산하는 능력이야말로 현실에 돌아 앉아 등을 맞댈 수 있는 미술의 독자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충격을 줄 수 있는 현실과 사실을 찾는” 한편, “현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닌 현실 자체”를 제시하려 한 동아미술제의 목표와 여전히 부합한다. ‘형상 회로’는 이처럼 일순간 현실과 이어져 불을 밝히는 미술의 작용인 동시에, 각자의 거리와 시차를 가진 회로 내부에서 빛을 발하는 작가적 실천을 의미한다. *출처 및 제공: 일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