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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마음의 이치 The Way of Heart
Exhibition Poster
기간| 2025.10.24 - 2025.11.29
시간| 10:30~18:00
주소|
휴관| 월요일
관람료| 무료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안종대 An Zong-de 이진우 Lee Jin-woo 최상철 Choi Sang-chul 데비한 Debbie Han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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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아트스페이스3
  • 			마음의 이치
    
    I. 마음
    
    “마음(heart)에는 이성이 모르는 이치가 있다”
    -파스칼(Pascal)-
    
    1. 마음
    
    예술가의 마음이 담긴 작품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혜의 출처가 된다. 색의 조화, 형태적 균형과 불균형은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고, 고양된 정신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크리스트교 신학에서 heart는 믿음, 소망, 사랑,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영적 중심, 진선미의 출처다. 상재적으로 교리적 이해나 신학적 사유를 가리키는 mind와 구분된다. “신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에서 ‘마음’이 존재의 핵심으로서 'heart'에 해당한다. “마음(heart)에는 이성이 모르는 이치가 있다”는 파스칼(Pascal)이 이러한 맥락이다. Le cœur a ses raisons que la raison ne connaît point.
    파스칼에게 ‘heart’는 진리 직관과 초월적 이해의 자리다. 유교의 ‘심(心)’은 이성과 감정을, 서양의 heart와 mind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배어 나오는 마음으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 본다.
    
    2. 오류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 근대 이성주의에 이르는 동안 감정, 곧 마음은 사적이고 비합리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폄훼되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질병으로 여겼다. 하지만 감정을 ‘두뇌의 오류’로 보는 인식이야말로 철학이 범해온 고약한 오류일 뿐이다. 감정은 인간의 ‘취약성(vulnerability)’에 깊이 촉수를 대고 있는 인격의 요소로, “자신이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에 민감하다. 감정에는 ‘섬세한 가치판단’이 동반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태롭다”는 두려움의 감정은 그 사람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이 감정을 인간 존재의 핵심부에서 나오는 ‘평가적 반응’으로 보았던 맥락이다. 그 핵심부를 지칭하는 개념이 바로 ‘heart’, 곧 마음이다.
        이성에 근간을 두는 근대의 계몽철학은 이 존재의 핵심부에 대한 왜곡에서 기인하는, 관념과 상상에 의해 뒤틀린 사변이다. 사랑, 연민 등 모든 감정이 존재의 취약함에 대한 인식의 지평인 ‘heart’에서 온다. 존재의 취약함에 대한 인식이 결핍된 사상을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누스바움의 윤리적 판단, 파스칼의 초월적 인식, 유교의 측은지심이 한결 마음의 이치에 가깝다.
    
    
    II. 마음과 진공상태
    
    “어떤 경우에든 특별한 어떤 것을 바라지 말고, 텅 빈 상태를 바랄 것, 진공을 바랄 것. 그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선(善)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충만함보다 더 가득한 상태다.”
    -시몬느 베유(Simone Weil)-
    
    
    3. 마음의 상태
    
    마음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선험적인 무언가로, 정신적 지향과 성향으로 가득 차 있다. 재화에 대한 욕망, 명성, 대중의 인정에 대한 집착 등, 온갖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집착이라는, 우리를 가득 채운 것들에서 오는 사슬에 매여 있다. 이로 인해 저급함이 고귀함보다 더 수월하게 마음을 잠식한다. “자신의 배고픔을 달랠 달걀 한 알을 얻기 위해서는 밤새 서서 기다릴 수 있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심지어 생명을 구하는 일조차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힘 있고 강한 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만, 힘없는 약한 것을 위해서는 죽지 않는다.
        집착을 끊어내기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마음을 채우고 있는 그 집착으로 마음에 새로운 것을 들이기가 쉽지 않다. 지식이나 정보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아는 것도 어렵다. 세계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가 두 걸음 후퇴하면서 제 자리를 맴돌거나 퇴행을 거듭한다. 고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다.” 솔로몬이 쓴 시(詩)의 한 구절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마저 속이는 기만과 겉으로 도덕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본연을 감추는 협잡(挾雜)의 성향이 역력하다. 자신을 스스로 나락으로 내모는 선험적인 마음의 성향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느 베유(Simone Weil)에 의하면 존재를 밑으로 한껏 잡아당기는 힘의 법칙인 중력 때문이다. 중력은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를 밑으로 끌어내리는 하방 에너지로, 인간을 모든 형태의 저급함, 인간의 정신의 힘을 쇠약하게 하고 타락시키는 모든 현상의 배후다.
        중력의 작용에서 정신과 생활의 저급함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것이 나온다. 저급함은 정신의 상위 에너지가 손실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고통의 전가, 보복 욕망, 선행 후에 느끼는 자기만족, 원한 등의 저급한 감정, 피상성, 주의력 결핍, 의심, 저급한 지성인 피상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지적 저급함 뿐 아니라, 감정의 저급함도 있다.
    
    4. 진공
    
    본래적 의미에서 예술은 재료와 대상에, 만들어진 물건의 용도와 사용자에게, 예술가 자신에게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신의 창조물들에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욕망, 집착, 공상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길로 나아가려면, 몸과 정신을 다해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마음의 빈자리, 곧 지고의 충만의 자리, 보상 없는 노력의 자리, 순수에 근접하는 자리로 옮겨야 한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야 한다. 베유의 표현을 빌자면 마음을 진공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자아의 확장 욕망, 집착, 상상력으로, 곧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으로는 사물과 현상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기에 그렇다. 주체의 완전한 포기, 노예 수준으로까지의 포기여야 한다.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밝아져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다.
    
    
    
    III. 마음의 이치를 담은 네 개의 예술론
    
    최상철: 마음을 비워야 세계가 들어온다!
    
    튀빙겐 대학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에 의하면, 인간도 그 안에 인격을 지닌 자연이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사는 것, 곧 인격의 심화와 과 자연을 닮아가는 것 사이에는 긴밀한 함수관계가 있다. 최상철 회화의 궁극은 도전과 실험이 아니라, 세계의 수용과 화해에 있다.
        이 회화는 중력에 순응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것들의 일부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던져진 것은 떨어지고, 돌은 아래로 구른다. 숲이나 나무의 삶이 그렇듯이, 나무에게 많은 나무들에게 존경받는 나무가 되는 것만큼 낯선 것이 또 있을까. 나무는 그저 나무일 때, 나무로 남아있음으로써만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에 이른다. 이것이 최상철의 회화가 시작의 부재에서 시작하고, 완성의 부정형으로 완성에 이르는 이치이다. 표현은 표현의 부재를 지향한다. 도구는 원시적이다. ‘표현의지’, ‘구성’, ‘장식’은 종내 불필요하다. 잉크를 머금은 돌은 자기를 비우고 그저 중력의 인도를 따른다. 처음 굴리기에서 마지막 굴리기까지, 첫 비상에서 마지막 착륙까지 먼저 표현을 비우는 훈련이다. 자신의 비우기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마음을 비워야 그 빈 곳으로 세계가 들어올 수 있다.
    
    안종대: “1.3 kg짜리 두뇌에서 쥐어 짜낸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아름다움은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한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한다. 서구의 근대는 창작(creation) 개념을 오해했다. 부수고, 찢고, 태우고, 변형시키거나 장식하는 것은 안종대에게는 창작과 무관하다. 아름다움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 예술의 일인 이유다. 1.3 kg 정도 나가는 두뇌에서 설익은 개념가설을 쥐어 짜내는 일은 잃어버린 길을 찾는 예술과 무관한 일이다. 모순과 부조리를 예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고독이라는 짐을 진 채 인생의 뒷전으로 물러난들 무슨 큰 소용이 있겠는가.
        예술은 세계에 숨겨진 채 흩어져 있는 조화와 균형, 정의와 평화와의 조우다. 아름다움은 만남이고 복종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말했듯, “세계 자체가 이미 줄과 활의 상태처럼 경직과 이완의 두 긴장이 교차로 이루어진 조화요 균형이다.” 예술가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다. 조화와 균형이 예술가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예술가의 일은 겸손으로 호흡을 고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이야말로 예술의 일이다. ‘어두운 밤’과 ‘절망’을 통과하는 인내로 필사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생명이, 삶이, 빛과 그림자가, 환희가. 푸른 지구의 아름다움이 깃들 때까지 기다리는 일, 그 고통을 감내하기, 그것이 안종대의 예술이다. 이 시대가 잃어버린 선(善)에, 모든 정의와 평화의 출처다.
    
    이진우: 예술은 반드시 몸과 땅의 유산을 경유한다.
    
    이진우의 회화는 여전히 우리를 자승자박하는 하나의 질문에서 추동된다. 아름다움과 자신이 발을 디딘 땅의 분열을 스스로 재촉하는 자기 소외가 그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예술이 수공업 노동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로부터 노동의 최소한의 개입 없이도 성취되는 미술을 발명(?)했다. 이내 개념주의가 주류미학이자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시대정신으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이진우는 이 연대기에서 덧없는 회의주의의 막다른 길을 보았다. 그래서 그 헤게모니적인 것을 수혈받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정선의 〈박연폭포〉가 말을 걸어왔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생동감과 진실함이 느껴졌다. “왜 그런 걸까? 나도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세계는 “그냥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은 예술을 전적으로 정신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진우에겐 몸 없이는 예술도 없다. 노동이 곧 기도요 예술이다. 땅의 돌봄과 배려 없는 삶이 가능하지 않듯, 땅을 경유하지 않은 미학 또한 공허할 뿐이다. 땅에서의 모든 경험이 몸의 차원을 넘어 정신에 깊이 각인된다. 정신이 몸과 땅의 유산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사유는 생기를 잃고 차츰 시들어 죽음과 유사한 상태가 되고 만다.
    
    데비한: 이토록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정화(淨化)
    
    데비 한의 고개 숙인 인간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스마트폰에 매몰된 현대인의 실루엣이자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는 성찰하는 인간이다. 이 이중성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적인 균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존재적인 아름다움이다. 격정과 혼란에 휩싸인 채 살도록 하고, 무가치한 쪽으로 쉽게 치우치도록 재촉하며, 일순간에 추락하도록 존재를 내모는 균열이다. 그 균열을 수용하고, 견디고, 때론 아파하기의 이름이 다름아닌 예술이다. 균열에서 ‘사회적 자아와 영적 자아, 외면과 내면의 섬세하고 복잡한 균형’을 지향하는 그것이 데비 한의 미학의 지평이다. 이 지향성의 이름은 정화다.
         데비 한의 〈그림자 사람들(Shadow People)〉에서 고개 숙인 사람의 굽은 등과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정화의 흐름이다. 세계의 간교한 술수와 온갖 풍조에 요동하는 존재, 그 마음에 쌓인 응어리를 씻어내는 형형색색의 정화다. 흘러내리는 것은 단순한 안료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이되 가장 비물질적 강도가 강한 물질이고, 영혼과 육체 사이의 막이 가장 얇아지는 순간 같은 것이다. 정화가, 모던 아트의 해독제가 조각을 타고 내려와 대지로 번진다. 조각과 세계는 다시 화해한다. 예술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여기에는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화의 표현이다. 
    
    심상용(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
    
    *출처 :아트스페이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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