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의미가 된 태도, '그리기' 현대에서 미술이란 무엇이고 어떠한 기능일까? 인류는 언어 이전에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기라는 방법을 통해 미술을 탄생시켰다. 이 후, 미술은 현재까지 이전의 개념과 형식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이즘과 형식이 생성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 역사의 가장 끝부분에 위치한 오늘날 현대미술은, 기존 형식과 차별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을 수용하면서 실행 가능한 온갖 태도를 실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은 별다르지 않고 특별한 의미도 없는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순환논증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과잉된 개념과 결과 없는 과정 반복의 피로감을 해소 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필자는 까닭 있게 검토되어야 할 개념으로서 순수한 '그리기' 태도를 제시한다. 개념과 충격요법이 강조되는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그리기라는 태도에 주목한다는 것은 무모해보일지 모르지만, 미술에 대한 신뢰 상실이 만든 다시 순수하게 그리는 태도의 회화로 회귀현상은 무시하기 어려운 뚜렷한 흐름이다. 작가 죠셉 초이는 본 전시 '욕망의 시작(starting to seek)'에서 회화의 정의를 확인하듯 그리기의 태도와 과정을 잘 나타난 작업들을 보여준다. 화면 가득 거침없이 자유롭게 그려진 다양한 층위의 공간과 이미지는 즉흥적 연상에 따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거대 담론에 기대지 않고, 본래 회화로 존재하게 하는 순수한 표현의 태도와 행위적 과정에 중심을 둔 그의 작업은 현대 미술이 망각한 감각의 만족을 소환하기에 충분하다. 죠셉 초이의 작업을 읽어 나감에 있어, '그리기'라는 태도의 의미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작업은 캔버스에 즉흥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를 던지듯이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 그려진 이미지를 수습하기 위해 연상되는 또 다른 이미지를 배치하고 화면을 구성하고 지워내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한다. 꼬리 잇기 놀이처럼 던져진 이미지를 화두로 순간순간 즉흥성에 의존하여 연상되는 이미지로 화면을 채워나가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애초에 완성된 결과라 할 수 있는 밑그림은 없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작업은 그리기란 태도가 만드는 과정의 연속이고, 이것이 멈춰지는 시점이 결과가 된다. 즉, 무엇을 그리려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쌓이고 구체화되는 오토마티즘 특성을 보여준다. 작업의 이미지들은 조각상을 포함한 인물이나 다양한 정물들이 거꾸로 서있기도 하고, 책의 일부가 찢겨져 다음 페이지의 이미지가 드러나 보이듯 전후의 이미지나 상이한 공간의 층위가 겹쳐지고 연계되며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즉흥적 이미지 채집에 따라 배치되고 겹쳐진 결과의 작업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시공간과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치밀한 계산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마주하는 관람자는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추론하고 반응하는 점은 흥미롭다. 결국 현대미술이 절대화하고 있는 개념은 일종의 해석이 만드는 허상의 신화임을 증명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개념이 전부인 현대미술에서 개념을 배제한 결과도 동일한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다시 개념놀이에 함몰된 현대미술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작가가 신화화된 현대미술의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 작업의 동기이자 의미로 삼은 것은 상상하고 표현하는 순수한 '그리기' 태도의 소환이었고, 이 선택은 과연 미술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고 본다. "조각상이 공간에 녹아들고 최종 이미지 밑면의 대상과 배경을 투영하도록 표현한 건, 영원한 정의나 신화화된 질서는 지속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순수하게 그리고 표현하는 행위와 과정이 더 큰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현대미술이라는 명제의 그늘에서 우리가 망실한 것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거울은 또 다른 공간을 비춰내고 있다. 거울로 비쳐진 공간은 표현된 제한 공간이 아니라 비상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또 다른 세계로의 모색을 암시한다. 순수하게 '그리기'라는 태도를 의미화 하며. 이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