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XHIBITION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
기간| 2019.09.06 - 2019.09.29
시간| 12:00 - 19:00
장소| 아마도예술공간/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31
휴관|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90-1178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양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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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이 전시에서 작가는 전작이 지닌 각 파편들의 고유성은 유지시킨 채로 지금까지의 순환과는 다른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한편, 의식적인 권태를 통해 자신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려 한다.
불분명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불안과 두려움, 감각들에 대한 심의의 공허함에서 기인한 어두움의 정서를 그려왔던 양유연은 본 전시에서 어둠을 밝히는 존재를 그림으로써 어둠이란 존재를 의식하는 시간을 진동시킨다. 어둠을 밝히는 존재에 머무르는 작가의 시선 너머에는 단순한 시각적 관조가 아닌 촉각과 시각 사이의 긴장된 공간이 형성된다.

인간을 그리는 법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양유연의 작업은 <기도하는 사람>(2018)이라는 그림이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의 상반신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벽을 덮을 만큼 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을 내리깔고 묵상에 잠긴 얼굴은 반쯤 어둠에 잠겨 뒤로 물러나고, 기도하는 두 손이 서로를 떠받치며 빛을 받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의 묘사나 시각적 구성, 한 점의 회화 또는 이미지이기 이전에,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인간의 초상으로 제출되었다. 여자 같지만 남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성별이나 인종을 특정할 수 없도록 아무 기호도 두르지 않은 인간의 형상은, 오로지 인간의 눈앞에 인간을 보이기 위해 거기 있었다.
회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회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또는 그려진 평면, 다시 말해 회화라는 사실에 천착하는 것은 전통적인 회화와 구별되는 현대 회화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자신이 회화로 성립한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런 심술궂은 회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최초의 추상 회화로 근래에 재조명되는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작업 역시 신비적으로 전달되는 신성한 지식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시도였지 회화에서 내용을 삭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설령 화가 스스로 무엇을 그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매번 화면에 그려지는 것이 선택되고, 그 선택이 누적되면서 드러나 보이는 세계가 있다.
돌이켜 보면 양유연은 언제나 인간을 그리는 법을 연구해 왔다. 이는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는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관념에 기대어, 회화를 가치 있게 하는 유의미한 주제로 인간을 택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회화는 인간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불가해함과 비결정성에 의해 견인되었다. 인간을 묘사하거나 인간성을 설명하는 관습적인 말과 이미지들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적어도 그런 것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작가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초기 양유연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자화상 또는 자기의 풍경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얼굴을 중심으로 인간의 외면을 그 내면의 상징적 표현으로 승화시킨다는 초상화의 전형적 접근을 따르지 않았다. 내면과 외면을 구별하고 매개해야 할 피부는 짓무르거나 딱딱하게 굳어서 부서졌고, 그 틈새로 정체불명의 공간이 새어 나왔다. 얼굴은 가려지거나 훼손되어 초현실적인 풍경을 이루었고, 그 속에서 신체는 다시 절단되고 물화되기를 반복했다. 화면은 나를 무대화하는 가상의 극장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절개되어 하나의 극장처럼 펼쳐졌다. 작가는 그 극장을 구성하고 관조하는 외부자의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얼마간 분리되어 자기 안의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거나 자기 아닌 것을 자기 안에 담아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이러한 자기의 풍경은 사진을 참조하면서 점차 자기 바깥의 풍경으로 확장되었으며, 그와 함께 외부 세계에 대한 투쟁이나 타인들과의 관계가 화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복잡한 문제로 만들었다. 내가 나를 그리는 것과 남을 그리는 것은 똑같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수도 없다. 애초에 양유연은 자기에 동화되어 자기를 그렸던 것이 아니라 타자화된 자기를 더욱 바깥으로 밀어내듯이 그려 왔는데, 그와 같은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은 연대의 생산이 될 수도 있지만 소외의 재생산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자기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타인을 긍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인간을 그리고 보여준다는 기획은 자기 안팎의 것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모르는 세계를 향해 열린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기를 요구했다. 이에 작가는 인체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되 그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잘라내거나 어둠 속에 묻어서 의도적으로 불확실하게 그리기를 시도했다. 누구의 것인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식별하기 어려운 얼굴들, 선명하게 보이지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손들이 홀연히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어둠으로 일부 지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나마 어둠에 의지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한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어쩌면 작가는 너와 나의 구별 자체가 어둠 속에서 녹아내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려지는 사람인 동시에 그리는 사람이다. 적어도 화면 안에서는 어둠을 드리워 대상을 숨기는 것도, 빛을 휘둘러 대상을 색출하는 것도 작가 마음이다. 이것을 미약하나마 하나의 힘으로 의식하게 되면서, 작가는 보고 그리는 행위의 근간이 되는 빛을 탐구하는 일련의 작업을 전개했다.
양유연의 화면에서 빛은 오랫동안 어둠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화면을 지배하는 어둠 사이로, 그것은 연기를 내뿜으며 주변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힘으로 등장하거나, 또는 흐린 달빛처럼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는 미약한 얼룩으로 남았다. 하지만 빛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불투명한 안료를 칠하거나 또는 칠하지 않음으로써 화면에 빛을 형성한다는 것은 공간감을 유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회화적 환영이지만, 아무리 즉물적인 접근으로도 화면에서 제거할 수 없는 회화의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빛은 색채와 결합되어 모든 가시적인 것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은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 조용히 숨은 것들을 무관심하게 폭로하는 빛의 힘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이 힘을 어떻게 다스리고 활용할 수 있을지 지난 몇 년간 여러 가지로 모색해 왔다. 화면 내에서 명암의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도 하고, 투명도가 높은 순지를 강한 조명에 노출하여 스크린처럼 설치해 보기도 하면서, 시각적인 것을 매개하는 빛의 작용 자체를 가시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하지만 이는 화가로서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보여줘야 하는지 질문했던 것이지 단순한 형식 실험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자기 과시적으로 빛을 내뿜거나 수동적으로 빛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빛을 머금은 듯한 존재들이 화면 상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구의 결과이다. <빛나는 것>(2018)의 깨진 유리 조각에서 발견된 부드러운 빛은 앞서 언급한 <기도하는 사람>에서 잔잔하게 빛나는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얻는다. 이번 전시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연장선에서 다시 인간에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간다. 얼굴과 손, 마네킹과 창문처럼 작가가 이미 한번 그려본 것들이 새로운 빛으로 충전되어 그간의 작가의 변모를 증언한다. 그려지는 존재들은 모두 얼마간 작가를 닮았지만 그에 쉽사리 동화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존엄을 드러낸다. 빛이 들어오는 창밖은 문자 그대로 백지처럼 펼쳐져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커튼을 쳐서 그 빛을 가리기도 하고, 커튼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기기도 하고, 때로는 화면 바깥으로 나가 버리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무언가 두려워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빛과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동적 역량 속에서 자기를 출현시킨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그릴 것인가, 자기로부터 소외되거나 자기 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의 세계를 바깥으로 열어갈 것인가. 이것은 양유연이 계속 붙들고 있었던 주제였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것은 타고난 조건이나 보장된 지위가 아니라 애써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지향으로서 성립한다. 인간이 못 되는 것들을 경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비인간화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가는 계속 인간을 그리고 그에 적합한 빛을 찾는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선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를 닮은 이미지를 그려내고 또 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구하는 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붓은 그런 소망을 차곡차곡 종이에 담아 우리에게 전한다.

글. 윤원화			
※ 아트맵에 등록된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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