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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밤을 달여 놓아두었다
기간| 2019.10.05 - 2019.10.25
시간| 12:00 - 19:00
장소| 아마도예술공간/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31
휴관|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90-1178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이은영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밤을 달여 놓아 두었다>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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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을 달여 놓아 두었다> installation view


  • <밤을 달여 놓아 두었다> installation view

  • 			이은영은 이번 개인전에서 새로운 주제를 탐구하기보다 기존 작업의 조형을 다채롭게 하기 위한 형태를 발전시키고 재료적인 실험을 진전시킨다. 묘지공원의 산책 경험이 계기가 된 인사미술공간에서의 개인전《빛으로 세운 목소리》(2018)의 주제와 형식을 세밀하게 발전시키면서도 재개발로 사라진 외할머니의 집을 기억하면서 제작한 <오래된 구름들의 집>(2019)을 선보이는데, 이들은 “밤을 달여 놓아두었다”라는 전시의 전체 틀 안에 자리한다.
    작가가 여러 장소에 걸쳐 방문한 묘지공원은 근작의 작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작가에게 “오래된 묘지공원은 누군가의 생을 기억하고 그 추억으로 위안을 얻는 장소이지만, 이곳에서 이름을 잃어가는 묘비와 그것들 사이사이 자라나는 나무, 풀더미로 인해 기억을 잠식하는 망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양가적인 장소였다. 여러 작품을 통해 사회적 죽음을 애도하려 했던 마음이 묘지공원이라는 장소에서도 동하였지만,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과 연결된 죽음을 다루던 과거 작업과 달리 죽음이 자리한 공간 그 자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작가에게 묘지공원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 장소가 간직하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또한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여러 매개체에 관심을 두고 관찰할 수 있었다.
    우선 그 경험이 감상적이면서도 쓸쓸하게 표현된 작업이 묘비와 뒤엉킨 풀더미 드로잉들이다. 그것들은 가까이 있음에도 먼 곳의 풍경처럼 아득해 보이지만, 작가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전시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감상적 이미지가 기념비적 조형물로 드러날 때는 다른 형상을 보인다. 추모비, 봉헌물, 기념물, 유골함, 마른 풀, 시든 꽃, 빛바랜 조화(造花) 등도 작가가 묘지공원에서 본 것들인데, 이들은 큰 변형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연상되고 연쇄되는 조형물로 전환되며 죽음과 연결된 여러 상징물과 함께 배치된다. 이러한 방식은 할머니 집을 이루는 특정 요소나 물건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기념비로 만든 <오래된 구름들의 집>에도 적용된다. 이들 기념비적 조형물은 아름다운 것 같으면서도 또 달리 보면 그리 보이지 않기도 하고 이질적인 결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여러 재료의 결합과 부딪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전하고 통일된 기념비를 만들고자 하지 않았던 작가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념비적 조형물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작가가 수년간 다루어온 도자이다. 이은영의 도자 작업은 도자에서 쉽게 연상하게 되는 완벽한 결과물과는 다르다. 흙으로 형을 빚을 때부터 의식적으로 자유로운 조형을 표현하는 재료로 도자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자유로운 조형적 시도를 유지하지만 작은 성전(聖殿) 같은 건축적 구조물을 만들어 크기를 키워보거나 사발이나 항아리, 대접 같은 단일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그 표면의 질감이나 색감은 표현적이며, 또 여러 장식을 덧붙임으로써 원래 형태와 다르게 보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유물이나 비석의 부식된 표면이나 흘러내리는 촛대, 천사를 닮은 형상 등도 변형을 거쳐 도자로 표현된다.
    아마도예술공간의 분할된 공간을 따라 놓인 기념비적 조형물과 드로잉, 영상 설치는 작가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사라진 장소를 추억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이 특정한 대상이나 장소를 지시하기보다는 전시의 경험이라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삶과 죽음, 사라진 것의 의미가 드러나기를 의도한다. 작가는 “특정 시나 텍스트의 은유에서 발생되고 연쇄되는 이미지를 따라 과거나 현재의 사건들을 회상하고, 상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그 이미지들의 경계를 파괴하거나 또는 해체된 경계를 다시 유기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고자 드로잉, 도자, 입체,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재료를 이용하여 공간 속에서 실험한다.”고 말한다. 이 전시도 작가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서의 한 단계이자 그 요소를 만들어가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대상을 지극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재료를 고민했던 태도가 전시 명에는 녹아 있다. (신양희 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동덩굴로 뒤덮힌 아드로게 호텔과 거울의 환영적인 본질 속에는 남부 철도회사의 기사
    였던 허버트 애쉬에 대한 흐릿하고 몇 안 되는 기억이 남아 있다.
    보르헤스, 『허구들』 중에서
    
    나는 이 오랜 건물의 모든 사물을 알고 있지.
    흐릿한 거울에
    끊임없이 복제되는 
    회색빛 돌 위 운모 절편
    보르헤스, 「아드로게」 중에서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풍경이 있다. 이 풍경의 모든 것은 그것을 쓴 자와 독자 사이에 비밀스럽게 펼쳐진다. 우리는 현실의 세계와 더불어 언어가 만든 집에서 거주한다. 그 집이 시어(詩語)로 이루어졌을 때, 현실과 타자의 규범은 기화되고 무한한 자유의 풍경으로 들어갈 수 있다. 푸코는 언어의 심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의 수사적 공간은 어떤 유비와 형상에도 이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1) 언어가 통사와 규율의 질서 안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자유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이유이다. 언어는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계기이자 출발이 되어 끝을 알 수 없는 자율을 향해 나아간다.
    이은영의 작업은 요컨대, 시인의 언어를 통해 내딛은 무한의 풍경과 연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내밀한 유비들로 가득찬 이 공간에서 시는 펼쳐졌다 일그러지고, 언표는 기억과 투합하여 고유한 형태로 변이된다. 시 안에 있던 언표들은 그것을 읽는 순간 떠오른 표상과 결합하고, 기억 속에 부유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현실의 어떤 경험과 마주할 때, 완전히 다른 상태로 이전된다. 이은영의 작업에서 시의 계기가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그것은 시와 이미지가 맞닿은 어떤 지점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는 언어의 의미에 대한 관례적 해석과는 다르다.
    시인이 언어를 놓고 벌이는 행위들과 이은영이 이를 통해 낳은 이미지의 시학 간에는 텍스트를 사이에 둔 능동적 상호성이 있다. 시적 은유와 직관이 만나는 원초적 지점이 시각화된 이미지의 어휘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점차 고유한 공간의 상태로 독립해가는 과정이다. 이은영의 작업은 언어 안의 실재를 공간적 실재로 구현하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적극적인 독해로 행해진 텍스트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시적 관찰2)
    우선 어느 정원으로 들어가 본다. 이은영의 <숨겨진 이름들의 정원>(2018)의 안에는 검은 물 속에서 솟아오른 돌과 아치가 놓인 샘이 있고, 그것이 담긴 새하얀 도기는 마치 검은 물에 언제든 물들 준비를 하고 있으나 조금도 물들지 않는 종이처럼 외부를 감싼다. 산으로 된 펜촉의 끝은 하늘을 향하고, 마르지 않는 잉크처럼 샘 솟는 분수가 빛에 반사되어 천정에 어리기도 한다. 분수들은 아주 작은 소리로 어느 풍경의 기억에 소양감을 일으킨다.
    이것은 이은영의 이전 전시《아드로게의 정원》(2017)의 모티브가 된 보르헤스의 시「아드로게」중 “금지된 영역 속에 그들을 간직하고 있지.” 라는 구절처럼 과거, 기억, 그리고 상실과 맞닿아 있다. 모호한 형상들로 이루어진 이 정원에서 이름하여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곳은 어떠한 풍경과 강력하게 밀착하고 있으면서도, 확언의 기표들을 파기하며, 현실의 대상을 떠나 언표화 된 시가 독해를 통해 언어의 이전으로 되돌이 하는 텍스트의 속성을 보여준다. 즉 “숨겨진 이름”을 부르거나 쓸 수 없을 때만이 존재하는 풍경은 곧 시의 이후(以後)가 된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속성을 설명하면서, 텍스트를 지배하는 논리는 환유이며, 연상∙인접∙이월의 작업은 상징적 에너지의 분출과 일치한다고 설명한다.3) 어떠한 기표를 두고 무슨 의미로 독해할 것인가는 독자의 환유를 통해 결정된다. 그리고 무한한 환유의 순환 속에서 의미의 확장은 앞서 푸코의 말처럼, 자유로운 이행과 그를 통한 공간의 자리로 발견된다. 이은영은 “시적 관찰”을 통한 경험과 시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미지로의 환유를 공간 속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은유
    그러나 이은영의 시적 관찰은 시의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시각화하여 짝지어 놓는 것이 아니다. 시로부터 환유된 그의 이미지들은 각기 고유한 의미와 위치로 재배열된다. 이는 시어가 낱말로 이루어진 언어의 데페이즈망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를 또다시 이미지로 전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중의 전치는 이은영의 사물들이 이름을 떠나 수수께끼로 가득한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예컨대 <빛으로 세운 목소리>(2018) 연작은 일종의 직관의 기념물이다. 이 목소리의 탑은 사물의 전치를 통한 낯설게 하기와 같이, 초현실주의적 오브제를 반추상의 배치로 쌓아올린다. ‘목소리’, 즉 발화 행위는 기록되지 않는 한, 행함과 동시에 투명히 사라진다. 따라서 청각적 행위를 기호의 질서로 묶어 체계화하기 전의 순수한 연상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쌓았을 때, 비로소 <빛으로 세운 목소리>가 나타난다. “빛으로 세운”에서 잘 드러나듯이, 보이지 않는 것은 빛을 통해 세계에 나타나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빛과 함께 솟아난 형상의 탑들이 된다.
    특히 일련의 작품들을 아우르는 ‘빛’의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 빛은 밝음으로 존재를 밝히면서 그림자라는 어두운 존재의 지표를 만든다. 이은영의 공간 안에서 빛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미지의 언어 사이에 행간이 되고, 기억과 결합하여 부유하는 은유의 형상들은 빛을 매개로 운율의 리듬을 이룬다. 우리는 그 빛의 문맥 속을 걸으며, 사유의 건축물들이 늘어선 어느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은영이 시의 거주지로 들어가는 것은 시가 지시하는 사물들을 자유로이 연상하여 또다른 공간의 언어로 발화하려는 의지를 시원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pleasure of text)과 즐거움의 텍스트(text of plearue)를 구분한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라 비평의 대상이 된다면, 즐거움의 텍스트는 일종의 환희(bliss)로서 결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대신, 또다른 환희의 텍스트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4) 이은영이 시적 은유에 접근하는 태도는 비평의 상태가 아닌 텍스트의 유희에 대한 환희(bliss)로 도착한 이미지이다. 그의 사물들은 이미지로 진화하는 기쁨의 텍스트와 마주하면서, 텍스트를 떠나 만나게 되는 언어 너머로의 진행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적 은유를 통해 나타난 이은영의 이미지들은 텍스트의 즐거움과 결별한 또다른 환희의 텍스트로의 이행이 만들어낸 것이다.
    
    시적 공간
    마르셀 뒤샹의 묘비명은 “죽은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다.(D’ailleurs c’est toujours les autre qui meurent.)”이다. 죽음은 절대적 경험이지만,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일 수밖에 없다. 이은영이 몬트리올의 어느 공원 묘지를 걸으며 모르는 삶을 상상하고, 또 이브 본푸아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는 몸』을 연상한 것은 <빛은 돌들 사이에서 기다린다>(2018)의 모태가 되었다. 묘비 위에 단단히 세겨진 죽은 이름들 사이를 걸으며 연상된 시와 이미지는 현존 속에 내재하는 죽음의 모습들처럼 유한한 운명의 종속과 무한한 자유의 운동이 혼재하고 있다.
    또 이 작품에서 죽음의 기념비가 ‘머무는 몸’의 은유라면, 묘비와 전시공간을 비추는 무게 없는 이미지들은 자유로이 ‘움직이는 말’, 즉 작가의 상상과 기억의 영사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빛과 구별되지 않으며, 현실과 사유, 언어와 연상 사이에서 만들어진 틈을 얼마든지 유영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 삶을 기억하고 죽음을 기념하는 관례적 상징물은 현실을 초월한 공간적 자유에 닿고, 이은영의 “시적 공간”이 구현된다.
    이렇게 본푸아의 어느 시처럼 “검은 글쓰기”의 “불길”과 같은 이은영의 시적 은유와 사유의 빛은 끊임없이 이미지로 도치된다.5) 또한 그 공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시의 형상들은 언어를 떠난 시어이자, 의미를 떠난 음향과 같다. 이것은 또하나의 생성으로 볼 수 있으며, 시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환희의 표현, 즉 쉼없는 자유의 형태로 우리 앞에 도착한다.
    따라서 이은영이 만들어 놓은 공간은 물리적 장소를 뛰어넘는 기이한 극적 대기로 채워진다. “상상과 실재 이미지 사이에는 의식이 존재하는데 그 세 가지는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그의 말처럼, 작가의 경험과 기억의 영토는 언어와 이미지, 실재와 상상, 낱말과 사물이 혼재하는 진공 상태와 같다. 이는 사라졌을 때에 더욱 뚜렷해지는 과거에 관한 어느 그릇이며, 말하자면, “밤을 달여 놓아”6)두는 곳이자, 시간과 물질과 행위를 우리고 담아낸 경험의 향이 있는 공간이다.
    부재만이 가질 수 있는 묘비와 같은 표식은 사라진 할머니의 집에 남은 사물과 기억을 결합하여 쌓아올린 또다른 기념비로 나타난다. 하나의 삶이 지닌 수많은 시공과 간혹 매듭을 만들었던 작가와 공유된 기억은 내밀한 사물의 낱말들로 채워진다. 이것은 기억의 연상을 이미지로 도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복잡한 차원의 형태들이 얽히고 접합되는 타래를 사물로 풀어내는 것과 같다. 생각이, 또 기억이 언어로만 혹은 이미지로만 쌓이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뒤엉킨 기표의 파편이 말과 형상으로 마주치며 결국 하나의 공간적 시가 될 때, 어둠을 빛으로 달여 만들어 놓은 이은영의 시적 공간이 열리게 된다.
    명징을 버렸을 때에만 나타나는 규칙 없는 언표들은 창작적 행위의 특권이다. 하이데거가 솟아오름, 밖으로 끌어내어 놓음이라 칭한 포이에시스(poiesis)는 보이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개방 가능한 현현의 상태, 즉 시적 실천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은영의 이미지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시를 그 근원으로 두되, 결국 시를 떠나 확장된 또다른 실천의 맥락으로 이전한 결과이다. 그가 구현한 이 시적 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낯선 환희로 이어질 사유일 것이다. (구나연 미술비평가)
    
    1)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광래 역, 민음사, p. 154.
    2) 이 글의 소제목인 “시적 관찰”, “시적 은유”, “시적 공간”은 모두 이은영의 작업 노트, 「시적 은유의 시각화 가능성과 시적 이미지들의 경계」에서 따온 것이다.
    3) 롤랑 바르트, 「작품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p. 41.
    4) Roland Barthes, The Pleasure of Text, trans. Richard Miller, Hill & Wang, 1998, pp. 19-22.
    5)”검은 글쓰기”와 “불길”은 이브 본푸아의 시 「어떤 목소리」의 다음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나를 위해 어떤 집을 세우려는가 그대는
         불길이 다가올 때 어떤 검은 글쓰기를 작성하려는가?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는 몸 – 세계 시인선 18』, 이건수 옮김, 민음사)
    6) 2019년 10월 아마도예술공간의 이은영 개인전의 제목은 《밤을 달여 놓아두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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