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갤러리JJ는 2018년 이후 일년 만에 다시 작가 서용선의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서용선 작업의 모든 시각적 형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함축될 수 있으며 이는 곧 현대인, 인간의 삶을 조건 짓는 ‘사회’와 관계 지으면서 지금까지 도시 인물과 역사화 그리고 신화, 자화상, 풍경 등으로 나타났다. 작년 <서용선의 자화상: Reflection> 전시에 이어 올해 <서용선의 머리_갈등> 전시는 이렇게 작업의 핵심에 놓여지는 ‘사람’, 그 실체에 좀더 직접적으로 들어가서 질문하고자 하며,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서용선의 전시가 주로 평면작품 중심이었던 것에 비하여 이번에는 거기서 조금 벗어나서 콜라주 작업 및 입체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그 의미를 더한다. 여기서 작가는 일루전적 평면보다 사물 속으로 더 들어가서 질문을 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몸이라는 물질성을 가진 ‘사람’과 ‘사물’과의 경계에 맞닥뜨린다. 전시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자 몸이 가지는 물질적 조건을 들여다보게 하는 한편, 형식과 매체의 경계를 확장함으로써 공간 속에서 다양한 재료의 물성과 감각을 느끼면서 서용선의 작품세계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회화와 더불어 이전에도 나무를 재료로 한 형상 조각과 발견된 사물(Found Object)을 이용한 조조각 및 콜라주 작업은 꾸준히 서용선의 작업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현재 서용선의 야외 조각 작품들은 여러 건축물들에 설치되어있다. 신작을 중심으로 하는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청동조각 <머리 Head>는 이전의 목조각 머리를 청동으로 치환하였고 철 구조물인 추상조각 <갈등 Conflict>은 건축폐기물을 이용하였다. 그 외 다양한 일상 재료들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한 콜라주 형식의 회화작업 등 신작 15점을 포함하여 총 32점이 전시된다. 콜라주나 채색된 나무판넬 입체작업은 회화의 물질적 기반 자체를 보여준다. 발견된 재료를 사용하는 콜라주는 회화의 재료인 물감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현실에 관계하며, 3차원의 공간을 차지하는 조각은 물론 현대미술은 설치 형식으로 나아가며 현실 속에 실제로 참여한다. 창고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철근 트러스트를 변형하여 만든 작품 <갈등>은 전쟁 혹은 사회적 사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뒤엉킨 감정들의 표현이겠지만, 또한 공간을 팽팽히 가로지르며 보이지 않게 건물을 떠받치고 있던 트러스트 본연의 힘을 생각하면 왠지 하나의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얽히고 설킨 보이지 않는 힘의 구조로도 읽혀진다. 작품들의 재료로 쓰여진 포장재나 은박지, 녹슨 철 조각 등은 대부분 중고 혹은 버려질 산업폐기물, 일상의 흔한 재료들로써 그것의 물질성과 재료에 내재된 리얼리티로 인도한다. /몸, 사물 <가족>, <남자> 그리고 <콜라주> 시리즈 등의 작품에는 우유와 빵, 견과류 등의 텍스트가 쓰여진 포장재 등 실제 현실의 사물들이 직접 화면 속으로 들어와 있다. 강렬한 색채, 표현적인 터치와 함께 압축적이고 간결한 구조와 질서로 이루어지는 화면이 특징적인 서용선의 회화에서 먹거리 기호가 몸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자신이 속하고 경험하는 도시사회나 처해진 상황들을 늘 관찰하며, 부엌에서는 ‘먹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유하기도 하는 작가가 지난 겨울, 뉴욕에 머무는 몇 개월의 기간 동안 자신이 섭취하였던 기호식품의 패키지들을 콜라주한 작품들이다. 이는 지금까지 서용선의 작품 속 ‘사람들’이 늘 어떠한 상황과 얽혀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서, 다만 이번 전시에서 그의 사람에 대한 시선은 더욱 세계 속 사물과의 관계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콜라주는 대상 자체를 시각적인 요소보다는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감각의 자극을 통해 파악함으로써 사물 그 자체의 사용에 관심을 갖게 한다. “나는 그 시점에 이런 것들을 먹어서 지금 이러한 내 형상을 유지하고 있구나.” 라고 작가는 의식한다. 그를 일정기간 생존하게 하였던 먹거리들은 이제 작가의 몸의 실체가 되었다. 작업에 있어서 매체로서의 물질에 작가의 감각(sensation)이 부여되면서 작품 속 표현의 대상은 동시에 행위 하는 주체를 언급(refer)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몸, 몸의 현전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돌아보게 된 것이 서구미술에서는 1960년대로 실존적 사유나 현상학적 몸 철학과 함께 퍼져나갔다. 퍼포먼스나 이벤트, 개념미술, 신체미술 등으로 나아가며 줄곧 표현하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의 구분과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회화에서는 매체의 물질성과 순수한 물질로서의 몸을 향한 관심사가 앵포르멜이나 액션페인팅 경향으로 나타났다. 창조하는 예술가 신체의 ‘감각’이 재료라는 물질을 매개체로 자신이 대상과 하나가 되었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물질 그 자체가 형태를 산출할 가능성을 내재한 적극적인 힘이라고 보았다. 서용선의 작업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주체의 행위에 주목하거나 물질적 성격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형상을 취하는 가운데 작품의 주제 표현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모색으로서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그만의 양식을 구사한다. 작품 재료에서 건강을 강조하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건강기호식품의 정보 및 ‘유기농’이라는 텍스트가 쉽게 발견된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소비재로써 흔한 상업용 포장재와 일상용품, 건축재료 등 동시대의 기호는 현대인의 삶을 대변한다. 우리는 매 순간 특정한 상황과 더불어 존재하고 그때마다 모습이 같을 수는 없다. “먹거리도 변하고 있고 그것을 먹는 내 신체도 변한다. 실제물로서 자연의 사물, 양식들이 공급되어 내 몸에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다.”(서용선) 일상의 느낌은 어느새 육신과 정신의 일부로 배어들게 된다. 경험된 세계는 항상 몸과 함께 온다.(윌리엄 제임스) 우리의 몸은 항상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려 하며,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세계가 몸을 구조화한다. 계속 새롭게 변화하는 복합적인 이 세상에 맞춰 새롭게 적응하는 몸의 '가소성(plasticity)'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는데, 생산공정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체화된 기계적이고도 반복적 행위가 보이는 익살스러운 모습은 신랄하면서도 자조적이다. 이들은 전체를 통찰하고 짜맞출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새 잃어버린 산업사회의 희생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구조화된 몸은 다시 세계를 재구성하게 된다. 한편 미셸 푸코는 몸 바깥의 권력 작용이 몸의 안과 밖을 특정하게 변화시킨다는 주장을 한다. 이렇듯 몸은 모든 사회적 관념을 내재하며 존재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몸은 하나의 집약된 사회이며, 세계와 분리할 수 없다. 먹고 마시는 것 같은 행위조차 단지 육체적인 것뿐 것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인식적, 미적 목적들로 침투된다. 작가는 “사회 속의 인간은 늘 변화하기 때문에 한가지 모습으로 고정될 수 없다. 끊임없이 갈등하며 고민하는 인간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미술평론가 치바 시게오의 견해로는, “‘사람’ 인체와 마음의 ‘내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 그러나 그 어딘가를 결정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갈 때-서용선의 시도」) 캔버스 평면이지만 <조각>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은 그가 파리의 박물관과 피카소미술관에서 본 원시부족의 예술, 아프리카 나무조각의 원시적 형상에 영감을 받아 그렸다. 서용선 작품에서 보이는 얼굴 모습들은 마치 원시 부족의 마스크 같으며 형태 묘사는 대부분 이처럼 지극히 단순하고 투박하며 때로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한다. “생명의 원동력을 생생히 느끼는 것, 거기에 생명의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단순해 보이는 형태 속에서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있으며 선과 색, 그리고 실제 물질이 보여주는 표현의 가능성이 강조된다 대도시에서의 현재 삶을 중심으로 작업하면서, 때로는 역사가 된 전쟁의 상황과 기억의 작품 <콜라주12>와 <콜라주14> 그리고 <갈등>, 고구려벽화에서 본 별의 기호 <북두칠성>, 세월호 사건의 <아이들>까지 여전히 그는 낭만적 이상과 향수가 아닌 철저한 역사의식과 비판의식을 갖고 작품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삶이라는 것의 본질과 가까워지려 한다. 공간에 줄지어 선 익명의 초상조각 <머리>들을 생각해보면, 작가가 늘 이벤트로 해오던 군상 사진 <직립 연출사진> 시리즈가 연상된다. 모두가 일정하게 그리드를 형성한 채 말없이 어딘가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말이다. 이 <머리>들은 타인들과 늘 조우하지만 낯선 어색함과 소통부재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대도시의 고립된 모나드(Monad)로서의 개개인, 낯선 익명의 현대인의 초상에 다름 아니다. 글│강주연 GalleryJJ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