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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진술 하는 회화_회화적 스펙트럼에 관한- _시간이 개입하는 회화의 '헛헛함' 그 무엇에 관하여 '사소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통해 발현되는 생각들에 관하여 풀어내다'
기간| 2019.12.14 - 2019.12.31
시간| 11:00 - 17:00
장소| 세컨드 에비뉴 갤러리/서울
주소| 서울 중구 필동2가 128-22
휴관| 월요일,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593-114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사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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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회화적 스펙트럼에 관한-'헛헛함'
    2019 종이에 유채 72.7×60.6cm

  • 회화적 스펙트럼에 관한-'헛헛함'
    2019 종이에 유채 72.7×60.6cm

  • 사윤택_회화적 스펙트럼에 관한-'헛헛함'
    2019 종이에 유채 72.7×60.6cm

  • 회화적 스펙트럼에 관한-'헛헛함'

  • 			회화의 임무: 시간의 공재면에서, 사윤택 
    
     #1. "만약 빅뱅으로 시작해 현재 앞으로 나아가는 우주 팽창이 더 많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다면, 새로운 시간 역시 만들어져야 한다. 새롭게 탄생한 시간을 우리는 '지금'이라고 부른다. 지금, 새로운 시간이 탄생되었다." (리처드 뮬러) 
    #2. "만약 우리, 근대적 인간이 개념은 가지고 있되, 내재성의 평면을 시야에서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라면..." (가타리) 
    
    사윤택 작가의 회화에는 무엇인가 두 가지 시간적 선후의 사건들이 겹쳐져 있거나 그 선후관계가 동시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그럼 그 사람의 뒤편으로 추격하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가만히 보면 그 추격자는 다름아닌 그 달아나는 사람으로 밝혀진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추격자가 문을 여니까, 도망자가 건너편 문을 열고 도망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그 도망자가 추격자 자신이더라는 것이다. 사윤택 작가의 캔버스에는 이처럼 분열적인 자아들의 형상이 마치 데이빗 린치의 영화 모티브처럼 등장한다. 자아는 시간축선 위에서 분열하고 그 분열이 일어나는 시간은 흐름이 아니라 마치 여기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인다. 
    
    사윤택 작가는 이 정지한 시간처럼 보이는 '지금'이라는 순간, 그 일순정지의 순간 안에 시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 그것도 매우 구체적이며 작가 특유의 취향적 사건을 들여보내고 싶어한다. 그의 회화는 이러한 무모한 의지가 관철되고 있는 현상이며 그 현상은 가히 평면을 찢고 나올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달아나는 사람이 추격하는 사람과 일치되지만, 마치 인류학의 쌍둥이처럼 "하나이자 둘"로서 표상될 때는 '시간 없는 시간'에 무한소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사윤택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시간의 문제들을 난해하게 따져야 하는 개념주의적 척도가 있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한없이 작아지는 시간의 틈, 그 '시간 없는 시간'이 기이다랗게 늘어지고 있는 구체적 풍경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시인 김수영은 "시간의 끝에 매달린 기이다란 시간"이란 표현을 썼는데, 다름아닌 사윤택 작가의 회화 속에 즐비하게 표현된 풍경의 구체성이 그렇게 기이다랗게 늘어지는 시간, 실은 무한히 작아지고 있는 먼지 같은 시간 속에 드러난다. 이는 대단히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고, 동시에 매번 회화의 평면적 구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마치 세잔이 저 멀리 보이는 빅뚜아르 산을 자신이 본질적인 물[物]의 기호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늘 그리고 그리고 하지만, 작가 스스로 절망에 빠지는 것과 유사하다. 절망에 의한 새로운 탄생.. 이것이 세잔의 작업이라면, 사윤택 작가의 작업은? 거의 동일한 것이다. 
    
    순간에 일궈진 흔적, 솟구친 공은 해를 가린다, 새우깡 휙!, (매)트릭(스), 사실 졸고 있었다, 그림자 춤; 풍경놀이 등등 사윤택 작가의 작업 속에 나타난 시간의 문제는 작가 자신이 그 그림 속의 디제시스적 현실을 직접 체험하는 자전적 과정을 '지금 있는 과거'와 '지나간 현재'의 시간계열적 스펙트럼으로 한꺼번에 보여주고자 할 때, 쉽게 시간의 니힐리즘에 빠져든다. 비치발리볼의 스파이크를 때리는 선수의 멋진 점프가 저기 오른쪽 끝에 잘린 부분에 같은 선수의 잔영처럼 어떤 존재론적 흔적이 묻어난다는 것, 이는 불가능하지만 마치 「환상특급 Twilight Zone」과 같이 "빛과 그림자의 중간지대이며 과학과 미신의 경계이자(...) 지식의 꼭대기 그 중간에 위치한" 영역으로 생각할 때 얼마든지 잠재적으로 작동한다. 이는 작가 자신이 가진 원체험의 트라우마로부터 유출되어 나오는 마르지 않은 샘의 용솟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3. "호피족에게 시간은 이전에 이루어진 모든 일의 '뒤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똑같아 보이는 것이 되풀이되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축적이다. 그것은 뒤의 사건으로까지 이월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축적하는 것이다." (벤자민 워프) 
    
    호피족에게 시간의 기본 단위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단지 "이미 일어난 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분명 일어날 것 같은 일"로 성립한다. 그 중 일어난 일이 우선이며, 일어나지 않은 것과 곧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은 '비시간'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시간관 속에서 시간은 긴 '과거'와 '현재'를 가진 2차원적인 현상이고 사실상 '미래'를 갖지 않는다. 
    
    반면, 서구 근대의 시간관념은 미래에 투사하는 기대 가치로부터 직선적인 화살이 날아가는 은유로서 시간이 상상되었다. 그러나 이 호피족에게 미래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시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시간의 끝에 매달린 물방울 같이 기이다란 시간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늘어지는 것이다. '현대의 호피족'격인 사윤택 작가는 거의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하며, 그럼으로써 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미들 그라운드를 어떻게 하든 표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번 실패하며, 그 실패의 강렬한 연대기로서 한국미술계에 특이한 현상으로 출몰하고 있다. 
    
    새우깡을 휙 날아올렸을 때, 갈매기가 신비롭게 상응한다거나 테니스 공이 그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날아와 코트의 공간적 매트릭스를 찢어버린다거나 하는 현상은 작가의 주관적 체험으로서는 신비주의에 해당하지만, 그는 이 체험의 결과 감각을 회화로써 그대로 관객에게 전이시키고자 한다. 마치 꿈 속에서 시간의 5분 전과 5분 후의 '나'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증식하여 안마당 가득히 수많은 '나'들로 꽉 차듯 아우성치는 악몽의 세계를 리얼리즘의 미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윤택 작가는 '차가운 예술' 즉 "주어진 회화적 틀 내부에서 정해진 게임의 규칙을 따라 웰메이드를 추구하는 예술"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적 시간, 그 정지한 시간을 추체험하고 나누는 체험을 하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관람객들에게 단순히 풍경처럼 보이는 캔버스의 내적 현실이 사실은 형이상학적 구체이자 구체적인 형이상학의 '지금'이다. 작가의 형이상학에서는 자신과 결속되어 있는 자연이며, 이 자연은 공시적 체험이 일어난 중요한 현장이다. 
    
    가령, 갑자기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울울창창한 숲처럼 군림하는 애니미즘적 공간 속에 몇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느닷없이 야구공 캐치볼을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 짙푸른 나무는 범상하지 않게 꾸불텅거리면서 마치 동물적인 기질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러한 비현실적인 과장은 나무 아래의 공간이 우리가 아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간의 공재면[共在面]을 생각하면, 회화 속의 시간은 "나아간다"기보다는 오히려 "후퇴한다"에 가까우며, 사람들은 미래의 일이나 바깥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들에 집중한다. 
    
    사윤택 작가는 '갑자기'와 '느닷없이' 같은 부사어에서 풍기는 순간성을 날카롭게 포획하고 싶어한다. 사실 이 순간성이란 돌연히 모종의 사건이 출현하는 이질적인 시간이라기보다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이며, 미래의 시간이 계속 현재 속으로 들어와 끊임없이 과거화된다는 의미에서 '지금'이다 -- 에 가까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윤택 작가는 '지금'이라는 매트릭스를 드러내고 나누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윤택 작가의 회화적 시도는 매체특정성이 사라진 현재의 포스트미디엄 조건 속에서 재평가될 여지가 있으며, 그 무모한 의지만큼이나 개념적 소구 및 그 변이가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최근 동시대 전시는 대체로 2차원 평면보다는 5차원의 시간편집술이 우세하다. 그러나 2차원이 더욱 더 고차원이라면, 어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윤택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는 마치 블랙홀의 사건의 가장자리에 드리워지는 평면이라든가 우리가 사는 세계가 홀로그램처럼 비쳐진 평면이라든가 하는 발상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일정한 유의미함을 띤다. 즉 평면이 갖는 '지금'이라는 시간성은 다른 매체와는 다르게 확산한다. 사윤택 작가는 '지금'이 분열시키는 공재면의 창안자로서 "남이야 뭐라건 제 갈 길을 간다"(마르크스)는 고집불통의 문어선장으로서 시간의 니힐리즘이 만연한 우리시대를 거침없이 항해하고 있다. 
    
    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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