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MINUS HOURS : '+'보다는 '-', '혁신'과 '혁명'적 발전의 반대편에서 김성우(큐레이팅/MINIUS HOURS 협력기획자) 오늘날 우리는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와 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삶과 노동의 방식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목도한 이 기술 혁명의 시대, 사물인터넷, 로봇공학, 가상현실, 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을 골자로 하는 지금의 시대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의 핵심은 ‘생산’에 있으며, 생산은 기계화에서 대량화, 그리고 정보화를 거쳐 고도화되었고, 이제는 속도의 가속화와 범위의 초연결적 확장을 통해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혁신적 변혁을 앞세워 유토피아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끊임없는 핵심 과제로 언급하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 근미래의 실체는 차세대, 미래, 풍요와 같은 단어를 통해 대체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이러한 열병은 최근의 문화예술계에서도 종종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우려보단 기대를 대변하는(혹은 종용하는) 언어적 수사는 다시 또 미술의 방식으로 재편되어 시각적 언어를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여러 문화예술기관은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추어 이것이 제시하는 (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의 청사진을 예술의 방식으로 조금은 더 근사하게 그려보고자 하는 식이다. 이렇게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만들어내는 지금의 현실 이미지는 생각, 감정과 견해와 같은 것을 가공하고, 조장하며, 포장하여 우리의 감각을 전염시킨다. 하지만 유토피아라는 것이 현실에 안착할 수 없는 시공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이러한 산업의 혁명적 도약이 약속하는 더 나은 세상의 반대편에는 심리적인 불편과 불안뿐만이 아닌 현실적 차원의 결핍과 소외의 자리가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산업의 발전에 따른 가난의 현대화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말하는 ‘현대화된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겪게 되는 풍요 속의 가난이다. 이 가난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는다고 그는 역설한다. 본 전시 <MINUS HOURS>는 이러한 생산성과 풍요의 환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시대의 새로운 무력함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것은 예술 그 자체의 속성에서 시작하여 노동으로서의 예술과 문화예술산업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가시화하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에서 벗어난 예술의 유용함에 대해 고민하고, 생산성의 극대화와 시간과 노동 비용의 최소화에 역행하는 실천들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회의 좌표를 찬란한 미래의 시점에서 설정하기보다는 여기에서 떨어져 나온 누락된 시간과 가치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산업과 경제에 맹목적인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혁신’이나 ‘혁명’과 같은 수사를 지양하고, 경제 지표 아래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기대하는 강박적 태도의 반대에 서서 부산물처럼 쌓여가는 시간과 노동, 무력화된 기능, 비생산성의 입장을 견지하며 이 사회에 팽배한 가공할 속도에 저항하는 행위라 할 수도 있겠다. 전시의 초입부터 마주하게 되는 로와정의 작업은 경쟁과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를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Framed Play>는 컵 쌓기 대회의 기록 영상을 짜깁기하여 재구성한 작업으로, 선수들은 경쟁자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미션을 수행함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란 컵을 쌓고 다시 무너트리는 성취 없는 행위일 뿐이다. 이는 애써 쌓아 올린 탑-목표가 다시 무너짐으로 종결된다는 점에서 경쟁의 허무함을 상기하고, 결과 중심으로 서열을 세우는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Framed Play>는 곧 안쪽의 <176개의 손>으로 이어진다. 삼각형 구도로 흩어져 플레이되는 각 영상의 화면에는 가위, 바위, 보, 세 개의 손짓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총 176개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 영상은 인터넷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소스로부터 발췌한 것이며, 이들은 서로 충돌하고 대치하며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게임을 지속하고 있다. 이는 다시 사운드 설치 작업인 <losing game>을 통해 조금 더 극대화된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Love Is a Losing Game’을 편곡하여 ‘losing game’이라는 가사만 되풀이되도록 한 이 작업은 동시대의 승자 독식 구도를 은유적으로 되풀이하고, 사회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소외된 것과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나무판 위에 못을 박아놓은 <N>이 있다. 못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음각(십자, 또는 일자)으로 ‘3 + 1 X 2 / 2 ? 4’라는 수식을 볼 수 있다. 이 수식의 숫자와 계산 기호를 순서대로 따라가 보면 결론은 ‘0’이 된다. 결국 로와정의 작업들을 가로지르는 이 수수께끼 같은 게임들은 <N>이 내린 답과 같이 0으로 귀결되고 마는데, 이는 하나의 발전이 만들어내는 성과 뒤편에 무수히 남겨진 시간과 노동, 개인과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미디어에서 혁신이나 혁명과 같은 극적인 언어로 약속하는 사회의 진일보란 그만큼의 대가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결국 거대한 성취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 당연히 생겨난 것이 아닌, 다수의 희생과 탈락, 낙오를 수반하며, 그것의 균형이 만들어내는 ‘0’이라는 상태는 사회의 발전상 이면으로부터 새롭게 지금, 여기를 마주하게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최병석의 <Pest control>은 너무나도 하찮은 목표를 위해 작동하는 과장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미술관이라는 ‘표백’된 공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해충 박멸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작품’이라는 고상한 지위의 것을 위해 기꺼이 ‘중립적’인 ‘순백’의 공간을 표방한다.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인증된 것, 또는 미술이 아닌 것조차 미술적인 맥락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권위를 갖게 된 이곳에서는 작품과 미술을 둘러싼 존재들 외에 그것의 외형에 흠집을 가하는 것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전시라는 이름 아래 예술로 인증되어 가시화된 표면의 것 이외에 그에 수반되었던 이면의 시간과 노동 등은 그렇게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최병석의 작업은 이곳에 있을 리 만무한 해충의 존재 여부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박멸하기 위해 채집(Pest control-step 1. 채집) - 수거 (Pest control-step 2. 수거) - 소각(Pest control-step 3. 소각) - 소독(Pest control-step 4. 소독)의 메커니즘을 거치는 시스템을 설치한다. 사실 이 시스템의 네 단계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것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나 그것에 따른 실질적 기대에 비해 이 모든 처리 과정은 이상하리만치 거대하게 부풀려져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시장에서 서비스를 제공 받기 위해 지불하는 명시적 비용에 포함된 것 외에 시장 활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어떤 추가 비용들, 공장의 환경오염, 상품 폐기 비용 등 시장 가격에 반영되지 않은 비용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최병석의 <Pest control>은 결국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은 시스템 설계를 통해 목표를 위해 투입되는 노동과 과정의 시간을 가시화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비용과 같은 외부효과(externality)까지도 상기시키는 것이다.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이 시스템은 한계를 넘어선 과도한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를 극대화한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권용주는 그가 발 딛고선 현실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작업을 선보인다. 그는 작가이자 전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는 작가로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전시의 공간을 조성하는 전시 디자이너라는 일을 택하였을 것이다. 회전하는 벽과 단채널 영상으로 이루어진 <만능벽>에서 전시 디자인 공사 현장을 비추며, ‘무엇이 본업이고 무엇이 부업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읊조리던 작가는 생활과 예술의 분리, 예술 행위와 노동의 차이 등을 가로지르며 ‘노동’을 둘러싼 가치 생성에 질문하고 틀지어진 의미의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그리고 곧 그는 그가 해오던 특정 ‘일’이 현실적 차원에서 어떤 효력을 남김으로 가치 있는 행위로 승화되길 기대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차원에 ‘전시 디자이너’라는 공식적 직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사유를 초월하여 조금 더 윤리적인 관점에서 노동과 일이라는 형식의 실천이 낳을 수 있는 실질적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능 X>에서 말하듯 ‘우리의 가치와 필요성을 증명한다면’ 그것이 사회 구조 안 특정 직업의 생성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곧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미술 기관 내에 전시 기술자,디자이너의 자리가 새로 생긴 곳은 없다’로 이어지며, 결국 ‘계약직’이라는 고용 관계로 남을 수밖에 없음에 반문한다. 기업은 융통성 있고 신속하게 시장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구축하고 효율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경영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아웃소싱(outsourcing)을 한다. 아웃소싱의 도입은 곧 비용 절감, 시간 단축, 품질 향상 등을 목적으로 하나, 동시에 이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며 불안정한 직업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결국 권용주는 현장 노동의 시점(만능벽)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한 전시 디자인 시점(될 수 있으면 지루하게), 그리고 가상과 현실, 유희와 일이 교차하는 시점(만능 X)을 이어내며 예술 산업이 보장하는 현실이란 이렇듯 불안정한 노동의 자리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권용주의 작업 건너편으로 이의성의 <노동의 무게>가 위치한다. 본 작업에서 작가는 생산 활동을 위해 동원되는 ‘도구’를 바탕으로 노동에 수반되는 시간, 단위, 금전적 가치 등을 가늠하고자 한다. 여기서 도구란 육체적 행위와 과정의 대리이자, 사회가 용인하는 ‘생산’의 가치를 구현하는 물질이며, 노동의 가치와 목적을 가시화하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일반적 경제활동에서 노동은 곧 금전으로 환수되지만, 작가는 이것을 무게로 치환한다. 다른 작가가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목재를 사용하여 도구를 깎아내는 본 행위에서 이의성은 각 도구를 만들기 위해 소요된 시간을 기록하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무게를 재며, 처음과 나중의 무게 차이를 기록한다. 이는 노동이라는 행위가 담보하는 생산성과 그로부터 유실되는 가치를 재고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또 다른 작업인 <생식 드로잉>은 생산과 소비 차원에서 재산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의 생식 활동을 다루고 있다. 인간 중심적 시선에서 재산 증식 활동과 같은 가축의 번식은 생명의 통제와 규율로 노동력과 생산력을 확보, 증가시키고자 하는 이 사회의 욕망을 상기시킨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의 작업인 <원심분리포장지>는 ‘포장지’라는 특수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포장지는 그것이 밀봉하는 내부 존재의 가치를 암시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추가적 비용에 해당할 뿐이다. 그저 내부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것을 둘러싼 포장의 외형은 확대되고 더 화려하게 꾸며진다. 그리고 봉해져서 보이지 않던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 포장(지)의 얇고 미세한 가치는 구겨져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본 작업에서 일종의 버려진 노동력에 해당하는 포장지는 사회적 차원에서 즉각적인 이윤을 낳는 노동의 중심에서 벗어난 행위를 암시하는 매개가 된다. 또한 구겨진 포장지의 이미지는 패턴이 되어 다시 포장을 위한 종이 위에 입혀지게 되는데, 작가는 이렇게 재구성된 포장(지)을 원형의 형태로 오려내어 앞서 말한 중심에서 벗어난 노동, 그 자체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을 은유하고자 한다. 결국 본 작업은 포장지라는 것을 통해 예술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생산성 중심에서 벗어난 다양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흩어져 놓인 납작하거나 거대하고, 혹은 볼륨을 갖추고 있는 둥근 것들은 박지혜의 작업 <둥근 덩어리들>이다. 이는 어쩌면 그 모습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헬스장이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피트니스 용품에서 그 형태를 빌려온 것들이다. 하지만 과장된 스케일과 기성품에서 찾을 수 없는 재질감은 그것이 곧 기능을 상실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산업화된 제품의 형태와 크기, 재질의 문제는 언제나 기능과 목적에 부합하는 선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의 것으로 채택, 적용된다. 대다수의 기성품이 그러하듯 제품의 표면에 해당하는 하드웨어는 해당 제품의 기능과 목적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형태로 구조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둥근 덩어리들>을 구성하는 훌라후프, 바벨, 짐볼, 트레이닝 콘, 사등분으로 나뉜 조각 바벨은 이미 원래의 기능과 목적은 덮어둔 채 나름의 조형적 형태 안에서 그저 공간을 장식하는 ‘예술적’ 오브제로 우두커니 있을 뿐이다. 그리고 쇳덩이와 같이 단단해 보이는 피부로 육중한 존재감을 뽐내며 놓인 두 개의 공(짐볼), 변형된 사이즈로 그 의도가 모호해진 바닥에 놓인 컵(트레이닝 콘)은 곧 거대한 구멍(훌라후프)이 만들어 놓은 시점의 변주에 의해 신체를 비유하는 또 다른 상징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건강’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산업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미디어가 주문처럼 종용하는 아름다운 신체에 도달하기 위해 산업의 형태로 양산되는 ‘건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이와 함께 놓인 영상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예술) 생산의 의미, 존재하는 것의 정당성, 가치 부여의 주체에 관한 것을 가장 무의미한 것들(또는 의미를 전혀 찾을 길 없는 존재들)로 풀어내고자 한다. 영상 전반을 아우르는 멜랑콜리하고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서사는 가장 쓸모없는 존재, 또는 가장 쉽게 잊히는 존재에 대해 그 가치와 결론을 유보하고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MINUS HOURS>는 산업의 주기에 발맞춰 주문처럼 양산되는 풍요로운 내일의 약속 이면에 실재하는 현실의 시간에 눈 돌리길 요구한다. 이는 생산과 소외의 균형이 만들어내는 이 세계에 대한 거시적 관점(로와정)에서 시작하여, 목표에 비해 비약적으로 비대해진 시스템이 구축한 아이러니와 외부 효과의 문제로 나아가거나(최병석), 경영 효율성 차원에서 만들어진 불안정한 노동시장의 생태에 주목한다(권용주). 그리고 효율성 중심에서 벗어난 예술 노동과 그것의 생산성을 고찰하며(이의성), 산업 생산물로 대상화된 신체의 문제(박지혜) 등을 고민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종종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 아래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눈앞의 이익과 효력에 더 큰 가치를 매기곤 한다. 도래하지 않은 미래는 각종 이미지와 슬로건 아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마치 그날에 대한 열병처럼 앞을 향해 숨 가쁘게 나아가기 바쁘다. 다행히도 예술의 시간이란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얘기한 깊은 심심함과 같이 깊은 사색적 주의를 요구하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이는 물리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이윤에 따른 가치를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순간이기보다는, 현재의 속도로부터 벗어나 가치의 척도를 달리하여 보이지 않던 것을 마주할 수 있는 시점을 가능케 하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본 전시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가속화되어가는 흐름에 발맞추기보다는 그 ‘반대’로 걸음을 내딛길 제안하며, 산업적 차원의 생산성이 추구하는 이익과 효율에 반反하는 태도로 ‘삶’의 차원에서 비롯된 노동이 자리하는 곳을 가늠해보길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