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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김하나 개인전: Beau Travail
기간| 2019.12.27 - 2020.02.05
시간| 월 - 금 9:00 - 18:30 토요일 11:00 - 18:00
장소| 송은아트큐브/서울
주소|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3/1층
휴관| 토요일,일요일, 공휴일 휴관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3448-010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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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Beau Travail 3
    2019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Oil on Canvas 193.9 x 112.1 cm

  • Beau Travail 4
    2019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Oil on Canvas 90.9 x 72.7 cm

  • Beau Travail 7
    2019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Oil on Canvas 193.9 x 130.3 cm

  • Beau Travail 8
    2019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Oil on Canvas 193.9 x 130.3 cm
  • 			물질 표면 호흡 
    “하늘은 땅의 표면에서 시작합니다.”1 
    1 장-뤽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41쪽 
    2 김하나 작업노트 중에서 발췌. 
    “회화는 몸의 언어이다.”2 
    캔버스는 하나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대개 비어있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이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치 한 화가가 빈 화면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고백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도 비슷한 증상은 자주 목격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일까? 만약 화면이, 그것이 종이이든 캔버스든, 공백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세계라면 어떨까? 김하나는 대상을 전제하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주어진 회화의 조건에서 출발한다. 주어진 물리적 조건은 바로 최초의 물질이자 탐구해야 할 (가려진) 세계와 같다. 간혹 식별 가능한 형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떤 단서일 뿐이지 특정 대상을 재현한 것으로 간주하긴 어렵다. 
    20세기 초 이른바 현대미술의 씨앗이 싹트면서 회화는 늘 공격의 대상이었다. 재현을 향하여, 물질과 정신을 향하여, 심지어 그 형식과 조건 자체를 비난하는 일도 흔하다. 그럼에도 한 세기를 지나서도 회화를 향한 공격은 여전하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데 백여 년 동안의 위태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회화의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줄 만한 시도가 중단된 적은 없었고 최근에는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는 듯하다. 예컨대 독일 화가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는 동시대 화가 중 가장 전위적으로 회화의 틀을 과감하게 열어젖힌 인물이다. 그는 붓 대신 압축 분무기를 사용하고 실내외 공간에 안료를 도포하여 거대한 색채 풍경을 완성한다. 마치 세잔의 회화가 현실로 현현한 것만 같은 강렬한 충격을 준다. 하지만 웅장한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방식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한편 김하나는 작업 초기부터 억지스럽게 회화를 구성하거나 특정한 장면을 형상화하지 않는 비재현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한다. 그는 그로세와 달리 주어진 회화의 조건을 해체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되레 그의 작업 안에서 낡은 물리적 조건들은 더욱 섬세하게 다뤄지고 형식의 한계는 흥미롭게 변주된다. 어떤 캔버스엔 아예 프레임이 부재한다. 캔버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공산품의 정체성을 지우고 자연스레 변형이 일어나면서 감춰진 자신만의 물성을 서서히 드러낸다. 작가는 이 흥미로운 변형의 과정을 처음부터 함께 한다. 
    이처럼 작가의 관심은 회화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질료들에 천착해 있다. 캔버스, 프레임, 안료, 기름 등과 같은 질료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조심스레 다뤄진다. 이를테면 한 겹을 칠한 뒤 그 위에 오일을 붓거나 검정색을 칠한 후 건조되는 과정을 관찰한다. 이 과정은 곧 회화가 생성되는 시간으로 질료들이 서로 혼합된 후 숙성되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 작업과정은 색채, 질감, 시간에 따라 매번 차이가 발생한다.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흰색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초벌(프라이머 칠)을 한 뒤 사포로 갈아내는 작업이 진행된다. 작가는 흰색을 통하여 캔버스 화면의 흰색, 흰색 물감으로 채색된 흰색, 초벌 질료의 흰색의 차이를 발견한다. 김하나는 흰색을 통하여 회화의 관습과 회화를 보여주는 관습 그리고 흰색을 인식하는 관습의 차이를 질문한다. 조금 더 과정을 살펴보면, 사포질을 마친 뒤 검정 색을 칠한 뒤 헝겊으로 닦아내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초벌의 상태에 따라 표면의 발색과 질감이 결정된다. 또한 안료를 칠하고 붓질을 하고 오일을 화면 위에 부어 의도치 않은 형태를 생성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예기치 않은 질감을 가진 표면성으로 환원된다. 표면의 질감은 작업을 이끄는 단서이자 동기가 된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빛의 개입도 일어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빛이란 외부의 빛을 의미하는데, 빛의 질감, 조도, 위치에 따라 회화가 조응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캔버스의 표면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회화에 부여된 전통적 관습에 혼란을 주는 주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에게 2차원의 회화성은 단순히 요즘 언급되는 ‘납작함’, ‘빈곤함’의 미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회화가 물질에서 시작된 세계이기에 작업을 통하여 본연의 성질을 길어 올리는 생성의 과정으로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완결된 세계를 재현한 ‘닫힌 회화’가 아닌 스스로 공간에 열려 있는 ‘몸-물질’을 가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캔버스 위에 다른 질감의 캔버스 조각이 덧붙여지기도 하는데, 이는 2차원의 평면성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넘어서는 방법처럼 보인다. (작품 6) 금속적인 은색의 캔버스 화면 하단에 반투명한 탁한 보랏빛 은회색의 직사각형 평면이 덧붙여지면서 이 비재현적인 회화는 물질과 색채, 질감과 색조의 겹에 의한 의외의 내러티브가 생성된다. 이러한 캔버스 콜라주 작업은 프레임을 제거한 채 공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설치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벽이 아닌 공간 내부를 점유함으로써 조각이나 설치물처럼 적극적인 관람을 유도하는 효과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회화적 조건을 흩트리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김하나는 회화를 보여주는 물리적 조건, 그러니까 건축적 구조, 공간의 빛과 색채 등과 같은 환경과의 관계를 미세 조정한다고 해석하는 게 보다 적확하다. 따라서 작가는 벽에서 5cm~2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작품을 설치하는 걸 선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실험이 회화성의 반역이라거나 단순히 확장된 회화성이란 의미로 고정하기보다는 관습에 의하여 가려졌던 회화의 본질을 되찾는 과정이란 열린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셸 푸코의 사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회화는 하나의 기획물이었다. 회화는 분명히 물질로 제작된 매체 위에 재현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은 회화를 비물질적인 이미지로만 소비했다는 것이다. 즉 그림의 착시효과가 매체의 본질을 모두 망각하도록 기획되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푸코는 “회화가 2차원의 표면에 기초하면서도 3차원을 재현”함으로써 그림이 곧 직사각형의 물질이란 사실을 지워버렸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마네의 회화는 달랐다. 마네의 회화는 완성된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물질로 그린 그림이란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는 회화를 주변의 놓이는 공간,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빛에 반응하는 물질로 다뤘다. 푸코는 재현 회화를 닫힌 내부 세계로 보았고, 물질성을 드러낸 회화를 열린 ‘외부’로 규정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이후 모더니즘 미학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하나의 회화를 형식적 측면으로 보면 모더니즘 미학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차이는 그가 자신의 주변과 끊임없이 반응하고 이 과정을 회화적으로 번역하려는 태도에 있다. 끝으로 김하나의 회화를 비구상 또는 추상과 같은 용어로 굳이 가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개인적 견해를 남긴다. 어차피 그는 이미 오랜 회화의 관습 바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정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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