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XHIBITION
전기 장판 MANIA
기간| 2020.01.08 - 2020.02.16
시간| 10:30-18:00
장소| 갤러리밈/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인사동 178-2
휴관| 연중무휴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3-8877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박지혜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전시전경


  • 전기장판 마니아
    2019 Acrylic and oil on canvas 150.0x150.0cm

  • 전시전경


  • 전시전경

  • 			작가노트
    
    전기장판에 대한 강한 기억은 내가 부모와 떨어져 혼자 자기 시작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추위에 둔감했던 몸은 심리적 불안 때문인지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예민해져 극심한 비염과 알레르기를 얻게 되었고 손발은 항상 차가웠다.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감기에 걸리고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겨울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따뜻함과 변하지 않는 온도를 갈구하게 됐다. 조금의 과장을 섞어 나는 7, 8월의 무더위를 제외하면 전기장판 위에서 잠을 잤으며, 그 작은 공간 안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자리싸움을 하며 대다수의 생활을 했다.
    
    이 생활은 작업실까지 이어져 보일러가 없는 차가운 바닥과 의자 곳곳에 전기방석 및 전기장판을 깔아두고 난로들을 켰다. 실내지만 바깥과 같은 공기를 가진 이 공간에서의 작업은 마치 숲속에서 혼자 야외스케치를 하는 것 같았다. 털모자에 담요를 두르고 전기장판과 난로의 미약한 열에 의지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추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손은 굳어 딱딱해지며 몸은 떨렸다. 결국, 외풍이 들어오던 3개의 커다란 창문을 두꺼운 포장지로 막았고 그렇게 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게 된 공간은 낮이나 밤이나 어두웠다. 그곳에서는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곳은 현실의 세계에서 벗어난 그림만을 위한 세계였으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혼재된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상상의 시선은 특히 화장실에 붙어 있는 작은 나방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작업실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생명체로 마치 내 그림을 구경하러 온 관객, 혹은 비판의 눈길로 바라보는 평가의 시선 같았다. 그것들은 죽여도 다음 날이면 또 태어났고 우리는 서로를 관찰했다. 하나 진화한 듯 꿋꿋이 버텨냈던 나방들도 추위를 이기지 못했는지 하나둘씩 사라졌고, 영하의 온도가 모든 생명체를 잠식했을 때 나도 이 전시의 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신체적, 정서적 추위로 전기장판 마니아가 되어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오고 가는 지금의 시기를 남겨보며 언젠가 마음껏 온도를 컨트롤 할 수 날이 오길 바라본다. (박지혜)
    
    ​
    
    ​
    
    작품평론
    
    참조물들의 회화와 창작의 알레고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 프랑스의 자유구상, 독일의 신표현주의와 통독 이후 라이프치히화파, 영미권의 뉴페인팅, 그리고 일본의 재팬팝(혹은 마이크로팝)은 형상미술의 다른 차원을 열었고, 그렇게 열린 차원은 현재진행형이다. 저마다 지향하는 이념이며 형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예술의 정의는 물론 형식과 방법론마저 특정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패러다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제기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관념과 실천논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대개 회화적 사실 혹은 현실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회화에 의해 열린 사실, 회화에 의해 제안된 현실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내통하면서 여전히 현실에 근거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지도 현실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여전히 현실을 참조하지만(그러므로 어쩜 현대회화는 이런 참조물들의 회화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그럼에도 현실은 더 이상 회화적 현실의 준거가 되지 못한다. 그 관계는 역전되는데, 회화적 현실이 오히려 혹 간과했을지도 모를 현실, 억압적인 현실,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쩜 겉보기와는 다른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거울이 된다. 그 화법은 리얼리즘적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적이다. 참조하고 덧붙이면서, 우회적이고 에두르면서 실체를 파고든다. 그렇게 현대미술 특히 회화는 사적언어들의 각축장이 된다.
    
    국내에도 이런 작가들이 더러 있는 편이고, 박지혜 역시 그 경향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작가는 만화 세대고, 지금도 만화를 즐겨본다)와 같은 대중매체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그렇게 흡수한 자양분(어쩜 참조물들)을 회화적 형식으로 부려놓는다.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혼미한 기억과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믹서 시키면서 또 다른 현실, 어쩜 다중 복합적이고 중층화된 현실, 느슨한 현실에 가려진 긴박한 현실인식의 장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 아스팔트 위에 현장보존과 사태수습을 위해 경찰이 스프레이로 그려놓은 그림이 선명한 걸로 보아 아마도 자동차에 사람이 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얼굴을 바닥을 향한 채 엎어져 있다. 그 곁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가는 커플이 있고, 그 와중에 키스하는 연인이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무슨 일인가를 목격한 것 같은,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노랑머리 남자의 놀란 표정. 교통표지판과 경고등. 무의미한 패턴과 장식. 그리고 여기에 번쩍, 쿵, 슈욱 하는, 사건과 반응을 대신한 만화의 전형적인 표식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상황들.
    
    작가가 <출근길>에 목격한 장면들이다. 흔한 일이고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 일 중 몇 장면은 실제로 저녁 뉴스 시간에 TV에 나올 것이다. 혹 누군가가 전송해온 SNS로 접한 정보일 수도 있겠고, 아님 그저 잡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 중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저 우연한 장면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제 유무를 따지는 것이나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마치 영화 스크린에서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실제 현실이 되는 현실, 흡사 가상현실과도 같은 현실이 엄연한 현실로서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작가는 상황적으로 실제와 가상, 시간적으로 현재와 기억이 어떠한 경계도 없이 하나의 화면 속에 짜깁기되고 재구성되는 장면을 통해 현실의 축도를, 일상의 신풍속도를 그려 보인다.
    
    그렇게 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닮았다. 의식은 결코 순차적으로 흐르지도, 인과성을 따라 전개되지도 않는다. 의식은 다만 우연과 필연, 실제와 가상(아님 상상), 의식과 무의식이 끊임없이 상호 간섭하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각들의 다발이며 무의미한(사실은 다만 무의미해 보일 뿐인)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부르고, 하나의 의식이 다른 의식을 불러들인다. 자동기술법이고 자유연상기법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그 생각과 생각, 의식과 의식 사이엔 어떤 논리적 개연성도 인과성도 없다. 그럼에도 현실이 간과하고 억압하고 은폐한 현실, 가히 집단체면 수준으로 부를 만큼 사람들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정치학에 가려진 현실을 암시하고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치열한 현실을 뚫고 작업실에 왔다. 작가에게 현실은 전쟁이고, 작업(워크그라운드)도 전쟁(배틀그라운드)이다. 마치 하나 달랑 남은 담배를 피울 것인가 아님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돛대). 그 순간에선 살 것인가 아님 죽을 것인가를 번민하는 햄릿의 비장감마저 감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창작의 포기>를 생각한다. 손을 잘라내고 싶고 발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다(내 슬픔을 봐). 그 와중에서도 작가에겐 연민을 나눌 친구가 있다. 그는 미술학원에서 조소수업을 위한 알바모델 일을 한다(조소 아르바이트). 그가 모델을 서고 있으면, 무슨 둥지로 착각을 했는지 비둘기가 머리에 날아와 앉는다. 혹 머리에 똥을 쌀지도 모를 일이라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전전긍긍해 한다.
    
    작가에게 비둘기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를 감시하는 불행의 사신 같다(스쿼드). 술 취해 널브러져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와 구구 거리는데, 작가를 보호하려는 건지 아님 토한 걸 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구토의 숲). 그렇게 작가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포기와 재기를 오락가락하는데, 비둘기는 재기했을 때보다 포기했을 때면 어김없이 확인이라도 하는 양 곁을 지킨다. 이를테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대비를 뚫고 그림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보이지도 않는 길을 무작정 갈 때면 비둘기가 짐 위에 앉아 작가를 지켜본다(그림수거). 사실 새 눈은 얼핏 봐서 어디를 쳐다보는지, 뭘 보기나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희한하게도 몸을 앞으로 쑥 내민 것이 영락없이 작가를 쳐다보는 것 같다. 작가를 향한 비둘기의 연민이 엿보이고, 비둘기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읽힌다. 개인적으로 연민이 예술가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이런 연민이 상호교감을 자아내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비둘기는 사실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의 불행을 감시하는 비둘기도 작가를 연민하는 비둘기도 모두 알고 보면 작가의 내면에서 불러낸 자신의 화신이다. 근육잉어(마치 근육을 키워야 해! 씩씩해 져야 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은)도, 고양이 레오도 그렇다. 이런 분신이며 화신도 그렇지만, 작가의 모든 그림은 알레고리다. 혹은 알레고리적이다. 현실 속에서라면 비둘기가 머리 위에 내려 앉아 똥을 싸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가 않는다. 창작을 포기한다고 해서 손이나 발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다. 더욱이 폭풍우를 뚫고 무슨 행상인처럼 그림을 리어카로 실어 나를 일도 없다. 창작의 알레고리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와 재기를 반복하고 번복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한 알레고리고, 번민의 알레고리다. 그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예술이 뭔지, 예술의 죽음이 공공연한 현실로 운운되는(그리고 예술이 자본에 잠식당한) 시대에 새삼 창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자기강박의 알레고리다.
    
    연민이 창작주체의 덕목이라면, 강박은 예술을 움직이는 힘이다. 작가는 그 덕목과 동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의 회화적 성과를 자기화하면서, 그리고 여기에 현란한 원색 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는 현저하게 현대적인 색채감정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얻고 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특히 창작현실에 연유한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기억과 생각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하면서 자기만의 서사를 짓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현실에 가려진 현실, 때로 웃기지도 않은 현실(그러므로 해학적인 현실), 어쩜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의 비전을 열어놓는다.
    			
    ※ 아트맵에 등록된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팸플릿 신청
    *신청 내역은 마이페이지 - 팸플릿 신청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6부 이상 신청시 상단의 고객센터로 문의 바랍니다.
    확인
    공유하기
    Naver Facebook Kakao story URL 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