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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ㅅㅜㅍ - 장준석展
기간| 2017.05.15 - 2017.06.10
시간| 10:00 ~ 18:00
장소| 분도갤러리/대구
주소| 대구 중구 대봉동 40-62
휴관| 일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3-426-5615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장준석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17년생 뉴송
    2017 종이 300(h)x90x100cm

  • 며느리배꼽
    2017 종이 설치전경

  • 며느리배꼽
    2017 종이 설치전경

  • 투명한 숲
    2017 부분캔버스 위 폴리에틸렌 93x120cm
  • 			윤규홍(Art Director, 예술사회학)
    
    
    만약 누가 나더러 장준석 작가에 관하여 알기 쉽게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난 이렇게 말머리를 시작할 것이다. “숲을 그리지 않고 숲을 표현하는 미술가” 실제로 나는 지난 약 10년간에 걸친 ‘꽃’ 연작을 그렇게 설명해 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린 아이가 되었거나 아니면 미술에 정통한 사람이 되었거나 간에 꽃을 그려라, 혹은 숲을 그려보라고 말한다면 각자 나름대로 대상을 표현하고자 애쓸 것이다. 그게 어떤 그림이 될지 한 번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그건 아마도 좋게 말하면 상식적인 묘사가 되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지루한 구성체일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숲은 그림 속에 그것들이 빠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나무 여러 그루가 서있을 것이다. 화가가 그 그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한다면 사람이나 동물 같은 캐릭터를 집어넣을 법하다. 반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그냥 숲 그 자체를 관찰자의 정제되어 고상한 정신의 매개로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장준석 작가는 이도 저도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는 숲이라는 글꼴 하나를 빚어두고 끝을 내어 버린다.
    
    이렇듯 작가가 고안한 틀 속에서 찍혀 나온 낱개의 형상은 그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다. 스테인리스 금속으로 완성되어 좌대 위에 올린 환조 작업은 그것만으로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며, 플라스틱으로 된 글자 알갱이들은 줄과 칸을 꼼꼼히 지키며 평면회화 작업과 부조 작업의 경계 어딘가에 자리매김한다. 크든 작든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정확한 배열 방식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꽃> 연작이 그러했으며, 펀칭된 철판에 색색의 전구가 불을 밝힌 <볕>도 인상적인 착안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숲>을 포함한 이 전부는 같은 원리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다. 그러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꽃은 아름다움의 표상인 하나의 개체다. 이에 비해 볕은 총량을 헤아리기 어려운 매개체에 가깝다. 여기, 숲은 나무와 풀과 꽃과 열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여러 동물과 물과 공기와 바람과 지리적 특성을 모두 품은 일종의 집합체 개념이다. 이런 복잡한 덩어리(complexity)를 글자 하나의 틀에 꽁꽁 싸매어 단 번에 정리하는 건 예술가의 특권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려는 의지는 종교와 과학과 법과 경제와 정치와 같은 사회 제도들이 존재하는 근거 중 하나다.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장준석이 관찰하는 그 세계는 예술보다 차라리 기술이나 법처럼 빈틈없어 보인다. 그 체계 속에 여러 인과관계가 걸쳐 있으며, 각종 위계와 절차가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또 다른 전략적 지식 영역이긴 한데, 예전에 공부했던 국어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숲이라는 글자는 파열음ㅅ, 원순모음ㅜ, 파열음ㅍ으로 이루어진 음운문자다. 하지만 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를 상징처럼 그린 상형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기호(sign)로 쓰이는 문자는 그것이 가지는 저마다의 조형미를 품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분야는 서예와 시각디자인이겠지만, 장준석이 시도하는 현대미술은 캘리그래프와 모노크롬 회화, 팝아트, 대지미술, 퍼포먼스, 공공조각, 미디어아트에 영역을 드리운 전방위 예술이다. 그 융합의 중심에 작가가 이미지 스크럽처(Image Sculpture)라고 부르는 글자의 입체 조형이 놓여 있다. 
    
    작가는 <숲> 연작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독백으로 가정한다. 그에게 숲은 이곳으로부터 탈출하여 닿는 이상향에 가깝다. 숲은 작가 개인을 떠나 우리 모두가 함께 가지는 좋은 의미, 그러니까 휴식과 생명과 치유를 상징한다. 예술 또한 그와 같은 순기능을 가지는데, 숲과 예술을 잇는 장준석 작가만의 고리가 있다. 호흡이다. 직접적으로는 전시공간에 걸린 목탄 드로잉이 실은 손으로 그린 게 아닌 숨을 불어 드러낸 결과로 확인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장르의 진영 가운데 작가가 터한 추상회화 집단은 예컨대 호흡, 스트로크, 물성 등을 즐겨 언급한다. 이 글을 호흡, 생명의 유한성, 그리고 그리움이 이끌어낸 예술의 무한성으로 실마리를 잡아가도 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 단색화를 기술하는 숱한 평론이 그런 조(tone)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내가 굳이 안하더라도 다른 텍스트가 생산적인 관점을 내 줄 것으로 기대한다. 한 편으로,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미술 담론은 원론적인 기호학을 그것도 상당 부분 잘못 짚은 허세로 드러난다. 그러지 말고 숲을 중심으로 하는 장준석의 이미지 스크럽처를 기왕 낱말과 음소의 시각화로 풀어내려면 작가 개인이 품은 사연을 블라디미르 프로프 식의 이야기 형태분석으로 끊어내어 제시하는 것도 해볼 만하겠다. 이를테면 주인공 남자와 하인과 악한, 나쁜 용이 숲의 정령의 관찰 아래에서 등장과 방랑과 결투와 귀환을 거치는 일련의 이야기를 기호로 바꾸어 시각화하는 작업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보다 예술가들을 조합하여 맥락을 뭉쳐내는 큐레이팅의 영역이다. 또한 이는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기호의 조합이 아닌 한 가지 형태의 무수한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장준석의 현 작업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장준석의 작품은 매혹적인 모순에 쌓여있다. 각각의 숲 글자들은 그것을 따로 떨어져 두게 함으로 굉장히 생경한 느낌-아마도 숲이라는 기호 속에 기표를 강조함으로서 미끄러져 물러나는 기의-와 함께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군집으로 드러난다. 설치된 낱낱의 글자들은 집합을 이루지만 사방의 다른 글자들과 아무런 유대나 소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글자의 단순한 조합이 문장으로 읽힐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암호로 분절된 독백처럼 전지적인 차원의 귀를 가짐과 동시에 이 숲들의 전체를 조망하는 전지적인 시점을 얻는다. 이것은 고독하고 동시에 은밀하다. 모든 것을 표준화시켜서 기호로 바꾸고 축소시켜 놓은 결과로 얻은 명료성은 작업 전체에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작품은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모순 또한 그가 기획한 세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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