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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이재훈 개인전 《이상한 정원 □ 희한한 동네》
기간| 2020.08.03 - 2020.08.30
시간| 11:00 - 18:00
장소| 아트센터 화이트블럭/경기
주소|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238
휴관| 연중무휴
관람료| 3,000원 카페 이용시 무료 관람
전화번호| 031-992-440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이재훈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아저씨가 만든 무지개
    벽화기법(장지, 석회, 먹, 목탄, 목탄가루, 아교, 수간채색) 182×227cm 2020

  • 이웃사촌
    벽화기법(장지, 석회, 먹, 목탄, 목탄가루, 아교, 수간채색) 546×227cm 2020

  • 조원술(造園術) 연습
    벽화기법(장지, 석회, 먹, 목탄, 목탄가루, 아교, 수간채색) 89×91cm 2019

  • 조원술(造園術) 연습(Gardening practice)
    벽화기법(장지, 석회, 먹, 목탄, 목탄가루, 아교, 수간채색) 78×118cm 2020
  • 			정원-□-동네 : 사건의 생동과 복수의 시공
    
    모종의 장소 ‘□’가 있다. 이곳에는 동과 서의 문화나 이념의 기준이 굳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특별한 위계도 없으며, 그로 인한 대립과 대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는 하나의 틀 안에 수용되어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체계라는 개념을 떠올렸을 때 쉽게는 각각의 구성 요소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방향을 설정하고 규율과 규범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란 특정 체계에서는 조금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특별한 지대 위에 존재하는 개별의 요소는 일사불란하게 조직되어 하나의 목적과 가치를 위해 종사하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서로 기대어 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위치의 설정은 인접한 요소와의 관계 안에서 당위를 획득하는 듯 보인다. 여기 이 모든 요소는 스스로 말을 아끼며,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장소는 그저 혼동과 충돌이 만들어낸 교착상태에 머물러있는 듯, 가까스로 그 규칙과 형질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혼돈, 혹은 혼종 사이의 질서가 표면으로 가시화된 이 세계, 장소는 그렇기에 한편으로 매우 현실적인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의 인상은 내가 이재훈과 만나 그의 작업을 눈앞에 놓고 얘기하는 중에 느꼈던 인상이다. 동양적 화법을 기반으로 꽤 오랫동안 사회와 제도에 대해 선명한 어조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오던 그의 과거 작업을 떠올려 보았다. 수직으로 솟은 (반)기념비의 형식을 차용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되던 교육과 그것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를 비틀고, ‘참 잘했어요’와 같은 표어를 통해 집단적 가치와 그 실현이 가져온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며,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근대의 망령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던 것이 그의 작업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회를 향한 시선의 거리를 조율하며 자신의 창작론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새로운 형식과 실험을 탐구해왔다. 과거의 직설적인 화법은 보다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선회하였고, 화면 위 이미지는 직접적인 발언의 형태에서 관객과의 만남으로부터 촉발하는 중층의 질문을 담지한 구조로 진화해왔다. 그리고 여기 이<이상한 정원□희한한 동네>에 이르러서는 보다 추상적인 화면에 도달했다. 과거의 직설 어법에서 점차 거리를 두었다 할지라도 눈이나 얼굴을 가린 인물 군상이나 핏기 없는 대리석 조각과 같은 두상들의 반복적 등장, 그리고 연극적 무대와 장치를 오가는 화면의 구성 논리를 유지하던 전작에 비한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로운 제스처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에 작가는 ‘정원’과 ‘동네’라는 두 가지의 공간적 개념을 포섭한다. 먼저 동네라는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경계를 가시적 규칙을 적용하여 체계를 갖춘 정원에 대입한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렇게 구축한 가시적 사각의 공간을 자신에게 주어진 사각의 틀-화면으로 환원, ‘□’의 기호로 수렴하고, 다시 사건으로 충동하는 장소로 확장하고자 한다. 근작에서 작가 작업의 해석적 기틀로 삼은 이푸 투안(Yi-Fu Tuan)의 공간과 장소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자면 특정화되지 않은 ‘공간’은 인간의 가치와 경험이 더해짐으로 ‘장소’로 변환하고 현실성(actuality)을 획득한다. 이는 동네와 정원을 가로지르며 일상의 추상적 영역을 회화의 틀에 시각적으로 고착시키는 이재훈의 방법론을 적절하게 뒷받침하다. 하지만, 그의 그림, 혹은 이 정원을 가꾸는 행위(gardening)1)가 단순히 동네-공간이라는 일상의 관념적 영역을 물리적으로 시각화, 장소화 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장소의 현실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이다. 여기 이재훈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 사각의 작품을 눈앞에 두고 복수의 사건이 계속해서, 그리고 동시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그의 정원은 하나의 고정된 장소적 개념에 머무르기에는 어딘가 더 복잡하고, 쉬이 고정된 의미에 정착하지 않는 듯하다.
    
    작가가 구축한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들은 주어진 사각의 프레임을 거스르지 않는다. 오히려 백과 흑 사이에서 시각을 자극하지 않는 모노톤의 이미지로, 과장되지 않은 제스처로 사각의 틀에 안착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합리적인 규칙에 따라 조직된 양상을 띠지는 않으며, 이성적인 논리나 조건 아래 개별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둡고 밝은 면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채움과 비움의 사이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얇지만 풍성한 질감으로 깊이를 더해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에서 상징성을 지닌 도상과 해석적 기호를 위한 자리는 사라지고, 단서라 하기도 어려운 흔적의 자리들을 이어낸 몸짓-선과 건식 벽화기법에서 기인한 얇은 발림에도 두드러지는 물질성이 불러일으키는 촉지적 시각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의 추상성은 유사한 표현의 반복적인 등장과 그 과정에서 가시화되는 차이를 통해 심화된다. 예를 들어 ‘이웃사촌’에 등장하는 원의 형상이 주는 인상은 다양하다. 지워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되는 원형의 운동성, 선명함에서 흐려짐으로 나아가는 같은 크기의 원이 주는 방향성, 그리고 방사형으로 퍼지는 원과 도식화한 태양의 원이 밝히는 자연의 생동감 등은 하나의 화면 위에 분절된 시간성과 함께 독특한 리듬을 선사한다. 심지어 이러한 도상은 작품들을 넘나들며 출몰을 계속한다. 이미지의 배치를 규정하는 것은 인접한 요소들끼리 만들어내는 관계에 있다. 이들은 그저 연약한 연결고리만을 유지한 채 해석을 유보하고, 지연하며, 사각의 틀 위를 맴돌 뿐이다. 거기에 더해 자유로운 궤도를 그리며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선들의 강도가 주는 차이, 회색조 배경 위로 배어 나온 듯, 혹은 무언가 흩뿌려지고 흘러내린 듯한 자국은 시적 표현에 가깝다. 그저 눈앞의 이미지들은 언어가 사라진 뒤 의미에 도달하는 길목만을 어렴풋이 건네는 듯하다. 이제 관객은 말 없는 이미지들이 사각의 장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 위를 가차 없이 지나가는 자유로운 선의 궤적, 그리고 미세하게 다른 톤이 만들어내는 면적으로부터 여분의 공간을 창출하며, 그렇게 각자의 지대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재훈의 회화는 언어로 명료하게 해석하려 할수록 멀어지기 일쑤이고, 한쪽에 매듭을 지으면 다른 쪽이 풀어지며 엇나가거나 미끄러짐을 부추긴다. 이는 앞뒤의 원인과 결과가 소거된, 오히려 사건을 기다리는 상태로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이미지-장소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설정한 작품의 제목에서 더 가중된다. 우리가 사는 삶의 반경 안에 언제든 존재하는 ‘이웃사촌’이라든가, 눈앞의 이미지와 쉽게 연관 짓기 어려운 ‘아저씨가 만든 무지개’, 심지어 ‘구르는, 나는, 마주치는’이라는 형용사적 타이틀은 이재훈의 정원-□-동네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장소에 정주할 수 없음을 얘기하는 듯하니 말이다. 이 미끄러짐으로부터 균형을 되찾으려는 인식과 사유의 본능적 작동 방식은 방향을 잃는 만큼 더 역동적인 경로를 그리며 개별의 사건을 촉발한다. 서사구조가 불분명한 만큼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은 주어진 화면을 새로운 사건으로 생동하게 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된다. 그리고 관객의 수만큼,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의 프레임은 서로 다른 깊이를 지닌 복수의 시공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언어로 명징하게 고정되지 않는 눈앞의 이미지는 새로운 서사를 위한 무대로 작동하며, 불현듯 솟아오르는 사건으로 충만한 배경이 되고, 우리는 그 위에 새로운 사건을 상상하고 덧입힘으로 장소를 새롭게 재생하는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푸코가 정원을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다루며 서로 양립 불가능한 공간을 실제의 장소에 겹쳐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고 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재훈의 정원-□-동네를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란 규범화된 형식과 양식을 지니는, 하지만 곧 그것으로부터 미끄러지며, 오히려 모든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복시킨다. 마찬가지로 이재훈의 작업 역시 회화라는 체계 안에서 기존의 규범으로 속박할 수 없는 이미지의 관계망이 구축한 화면-장소이지만, 언어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새로운 사건으로 갱신되는, 이전의 장소를 끊임없이 전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결국 선명한 이성적 질서 안에 가두기 어려운 이재훈의 작업은 현실의 장소를 담아내지만,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장소와의 유사성을 거부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으로 깊이와 넓이가 새롭게 가늠되는 현실성을 지닌 장소, 즉 면과 면, 선과 선, 도상과 도상 사이에서 계속해서 시공이 생성되고 정착하길 거듭하는 사각의 틀이며, 동시에 눈앞의 프레임에 고정되는 순간 다시 또 탈구되어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그래서 이후 생성되는 모든 장소 어디에도 정박하려 하지 않는 ‘장소 바깥의, 혹은 너머의 장소’이다. 지난 작업이 여러 상징적 이미지 아래 완결로 치닫는 서사구조를 지녔었다면, 이번에는 느슨한 연결 고리 안에서 열린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식과 경험은 눈앞의 이미지를 학습된 방식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역부족이며, 계속해서 사고와 인식을 갱신하고 확장해야만 화면 위에 서사를 추동할 수 있게 된다. 기껏 만든 모종의 서사는 금세 그다음의 서사를 위한 재료가 되기도 하며, 계속해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수많은 질문에 대답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화면이 담아내는 이야기의 수는 무한히 늘어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는 반대로 이재훈의 회화는 장소라는 체계를 해체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생성해냄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재훈의 회화가 관객과의 조우 안에서 끊임없이 개인의 사건을 발생시킴으로 가능해지는 장소라면, 그래서 하나의 장소에서 복수로 발생하는 이 모든 공간을 ‘실천된 장소’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2) 여기에는 물론 관객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작품을 마주하고, 그 사각의 장소 안 개별 부분을 새롭게 엮어내며, 전시라는 시공을 자율적으로 거니는 주체로서 말이다. 이는 마치 프랑스의 역사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공간 실천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삶을 주체화하는 방법으로 ‘걷기’를 제안하며 이를 통해 추상적 지도로 환원된 장소를 개별적 여정으로 체화하고, 사회와 현실의 규율에 저항이 가능하다고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여기 이재훈의 <이상한 정원□희한한 동네>는 이미 구축된 규칙이 아닌 관객의 주체적 시선과 행위로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스스로 장소를 다시 써 내려가길 요구한다.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가로지르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을 꾀하며, 언어와 감각의 경계를 초월하고, 그렇게 내부와 외부의 영역이 허물어지는 공간과 장소, 일상과 사건을 넘나들며 말이다. 
    
    
    글 ㅣ 김성우 (독립큐레이터)
    
    
    1) 이재훈은 지난 전시 <아, 禽獸강산> (스페이스 캔, 2018)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구축된 질서와 관리의 방식, 그리고 인간의 통제에 대한 욕망을 다루고자 ‘정원’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작품과 전시의 창작론을 원예(gardening)에 비유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 출품한 몇 개의 작업에도 ‘조원술(造園術) 연습’이란 이름을 부여하였다.
    2) 미셸 드 세르토는 장소에 관해 똑같은 곳에 서로 다른 둘 이상의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배제된 곳이라 하였다. 그리고 장소라는 물리적 영역에 사람들의 ‘실천’이 더해져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이 경합하는 곳을 공간이라 규정하며, 이 공간을 신천된 장소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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