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망망대해 위 끝없이 드리워진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보면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가 어느 순간 짙은 블루가 휘발되고 아득한 화이트만 남는 색의 변화를 경험할 때가 있다. 블루가 더 이상 블루가 아니게 되는 순간, 그 지점에 남겨진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김태중은 작가가 삶에서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릴 순 없다고 강조하며 삶과 작품이 하나가 되는 일종의 물아일체 경지를 종종 언급하는데 이런 그에게 있어 관심사가 옮겨가고 취미가 생겨나는 것은 삶의 장르가 변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인지 그의 작업은 장르의 이동에서 떨어져 나오는 마음의 부스러기를 뭉쳐 잘 반죽한 후 환상적이고 화려한 스타일로 양념하는, 고집 있는 요리사의 개성 있는 요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캔버스 위 화려하고 다양한 색의 작업들보다 블루와 화이트로 작업된, 절제된 시리즈를 모아 그의 내면적 세계를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김태중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컬러풀하며 원시적이다. 사랑에 대한 묘사나 짙은 선의 초상들, 직접적인 구상 표현들 등 원초적인 낙서와 무질서한 표상들은 설핏 의미 있는 내러티브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쉴 틈 없고 현란한 작업들은 작가 무의식의 발현이자 아주 친근하고 사적인 철학적 세계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간의 <Moving plants>나 <Talking figures> 시리즈 등에서 보여준 다색의 물감 사용과 다르게 블루 컬러 원 라인 드로잉의 작업은 매우 투명하고 절제되어 있다. 선의 굵기는 변주를 주되 하늘색의 밝은 빛과 어두운 빛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조합된 청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청색은 고대부터 존재하지 않는 미개한 색으로 취급받다가 12세기 이후 에서야 낭만이나 신성함, 우아함의 상징으로 다뤄졌으니 자유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어딘가 처연함을 자아내게 하는, 양면적인 감정을 선사하는 수수께끼 같은 색이다.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블루는 이 같은 이유로 화려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업 스타일과 결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매우 정제되고 가라앉은 존재감을 드러내 온 것이다. 김태중의 블루 시리즈는 무상, 무아, 열반을 체득해 괴로움을 벗어나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일종의 불교적 수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터사이클을 타거나 소울풀한 음악에 빠져 디제잉을 하는 등 작가에게 있어 부피감이 큰 삶의 단편들이 무게감을 더해갈 때, 그 절정에서 이루어지는 카타르시스, 즉 사념의 휘발이 구태여 외면해온 감정의 승화로 읽히는 까닭이다. 또한 그의 작업의 주요한 특징으로 끊기지 않고 막힘없이 그려지는 무한한 선(endless drawing)을 들 수 있다. 이는 오랜 시간 그의 작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대표적으로 ‘우림지심’ 시리즈를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비가 내리면 땅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숲을 이루고 그들의 숲이 구름을 만들어 다시 비가 내려 자연의 순환이 반복되는 것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과정을 일컫는 이 단어는 무한히 순환되는 김태중의 라인 드로잉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중심부, 혹은 주체를 중심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 크고 작은 ‘어떤 일’들은 소재가 되어 캔버스 위를 채워 나간다. 마치 우리의 평범한 삶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예측불가한 사건들이 덧입혀진다. 게다가 해골과 광배, 동물과 사람이 결합된 형식의 이미지나 마음 심(心)자, 그리고 부릅뜬 눈에서 눈물인 듯한 형상이 뚝뚝 떨어지는 표현 혹은 등에는 작가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의 종교를 두루 거치면서 이끌어낸 불교의 윤회적 사상으로 근원에 회귀하는 과정을 담아낸 듯하다. 이처럼 단절되지 않는 연속성은 소재에 대한 작가의 순환적 접근을 나타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의식의 자동완성 기법으로 배열된 상징과 기호, 단어는 삶의 우연성을 상징한다. 김태중 작품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하듯 본인 역시 의도와 즉흥 사이에서 작업의 동기를 찾는다. 즉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김태중의 시각의 기록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즐겁고 유쾌하며 늘 예측 불가능한 행보의 그에게도 잠시 멈춰서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듯이, 그의 형형색색의 작품 가운데 위치한 잘 정제된 블루는 아마도 그 순간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블루일 것이다. 다 덜어냄을 통해 매우 괴로운 시기(사점)을 극복하고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평형 상태)에 느끼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카타르시스처럼. 마치 거대한 바다가 하나의 하얀 하늘처럼 보이듯 - 외면하려 해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삶의 정념이 일순간 휘발하고 아주 순수한 블루만 남아 우리와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임지선, 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