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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정덕현 <테이블 라인>
기간| 2020.09.03 - 2020.09.26
시간| 화요일~토요일-10:00~18:00 수요일-10:00~21:00
장소| OCI 미술관/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휴관| 일, 월,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4-044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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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정물화 – 믿음과 의심 사이
 
 
정덕현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주로 그린다. 시사적인 주제를 풍자와 통찰을 통해 특정한 사물에 빗대어 표현해왔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실내에 있는 생명 없는 사물을 그린 그림’인 ‘정물화’의 형식에 집중한다.
 
전시 제목은 「테이블 라인」이다. 테이블 라인은 화가가 정물화를 그릴 때, 기물이 놓여있는 테이블의 경계를 지정함으로서 구도를 안정시키고 화면을 분할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거리감을 조정하고 구도를 결정하며 그림의 인상을 틀지운다. 정물화를 그려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라인은 색의 경계이기도 하고 시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보통 정물화를 그리거나 볼 때는 그 정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징과 효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덕현은 일부러 테이블 라인이라는 개념과 역할에 주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하게 되는 수없이 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타협과 결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작가는 그동안 “더 잘 보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했던 인터뷰에서는 “보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잘 본다는 것은 잘 그리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어떤 의심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 말에서 이전과는 다른 고민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그는 세간의 ‘무언가’에 대한 은유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림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전시 「테이블 라인」은 그동안 다양한 사물을 관찰하며 동시대의 크고 작은 문제를 비유해 그림의 이야기에 주목했던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회화를 이루는 기본적인 형식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면의 구도, 재료, 크기 등이 그림의 내용이 된 것이다. 모두 35점의 작업이 같은 크기의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 반은 기존과 같이 일상에서 발견한 작가의 시선과 동시대 사회문제에 대한 은유를 보여주는 작업들이고, 나머지 반은 같은 대상을 반복해서 그린 그림들이다. 작가는 전자를 그림이 여전히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작업군 ‘스틸 라이프’로, 후자는 회화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OO이 있는 정물’ 연작으로 크게 분류했다.
 
우선 그림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린 ‘스틸 라이프’ 연작을 살펴보자. , 은 그동안 정덕현의 주요 관심사였던 개인의 노동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다룬다. , 등은 현 정부의 정책과 대응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비판을 담고 있다. 또 , 과 같은 작업을 통해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그에 대한 연민을 언어유희를 통해 풍자하기도 한다. 특히 평소에는 무관심하다가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갑자기 관심이 몰리며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없어지고 중요하지 않거나 현란한 쪽으로 여론이 몰리는 상황을 빗댄 나 와 같은 작업은 대중매체와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내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또 는 세상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우기고 맹신하는 태도에 질문을 던진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개념을 쉽게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상황을 그린 , 물이 고갈된 독 속에서 말라죽은 생명을 그린 등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여러 작업들에서 재치가 더해진 어떤 깊이를 느끼게 된다. 그림에 대한 어떤 ‘믿음’을 유지하는 이 연작 대부분은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없이 스스로를, 지금의 세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은 그림과 언어를 통해 일종의 ‘중간지대’를 만든다. 빠른 결단과 누구의 편인지를 강요받는 현실에서 어떤 결정 이전에 사유할 것을, 무턱대고 믿기 이전에 의심해볼 것을 당부하는 것만 같이 말이다. 이 연작의 마지막인 표제작 은 그림에 대한 ‘믿음’이 ‘의심’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며 새로운 작업들로 안내한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같은 사물을 똑같은 조건에서 반복해 그린 17점의 ‘OO이 있는 정물’들이다. 정덕현의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플라스틱 의자는 일상생활에서, 전시 공간에서, 작가들의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다. 작가는 테이블 위에 무심히 놓인 의자와 송곳, 종이 테이프 자국 등을 같은 재료로 반복해 그렸다. 간결해 보이는 이 정물화 안에는 빛이나 시간, 공간이나 상황 등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한지를 여러 번 압축한 종이인 장지 위에서 먹과 호분, 겔 미디엄, 연필 등의 재료가 만들어내는 회색 톤의 섬세한 색감의 변화, 여러 종류의 붓이 지나간 자리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나 기름의 그을음을 이용해 만든 먹은 번짐과 농도조절이 용이하다는 특성이 있다. 조개껍질 등에서 채취한 흰색 안료인 호분은 채색화의 바탕칠이나 색의 명암을 조절하는데 쓰이는데 전통 동양화에서 이들을 혼합해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작가는 유성의 먹물과 수용성 안료인 호분의 성질 차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아크릴용 미디엄과 연필 같은 현대의 재료를 혼용해 섬유질의 종이 위에 스미거나 서로 밀어내게 한다.
 
이 연작에서는 특히 독특한 붓 자국과 질감, 미묘한 광택의 변화 등 재료가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물성의 효과가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같은 대상을 같은 재료로 묘사한 것이면서도, 각자의 톤과 질감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회화 특유의 복제 불가능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 각각의 그림을 그릴 때 작가가 처한 물리적 조건이나 상황이 어떻게 달랐을지 상상하게도 한다. 엇비슷해 보이는 작업들은 , , 등의 제목으로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기존의 작업과 달리 사물이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비유하고 있지 않기에, 제목과 그림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심을 품게도 만든다. 이러한 의심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연작들의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그림에 붙어있는 서로 다른 제목을 비교하기 위해 그림 앞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또 오래 머물게 한다. 이런 의심을 통한 작가의 기획은 결국 그림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림이 그림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의 욕망일 수도 있다.
 
정덕현이 말한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생기는 어떤 의심’에 관련된 작업들에서 나는 그림이 보여주는 일종의 머뭇거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림에 대한 믿음이 의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와 겹쳐본다면, 이것은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한국 미술의 망설임 같은 것으로 확장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덕현의 정물 연작은 은연중에 한국의 회화가 처한 어떤 곤란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똑같은 대상을 그리면서도 거기에 No1, No2 같은 번호나 ‘무제’라는 제목을 붙이는 대신에 굳이 서로 다른 제목을 붙여 어떤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의심은 작가의 것이기도 하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며, 그림 자체의 것이기도 하다. 정물화라는 장르도 그렇고 모더니즘도 그렇고 모두 한국 회화사가 스스로 이루어낸 자연스러운 성과가 아니라 서구에서 ‘빌려온’ 개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모더니즘 회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엔 망설이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특히 정덕현이 동양화 재료인 지필묵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만의 고민이 아닌 한국 회화의 망설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덕현의 이번 작업을 모더니즘에 대한 갈망과 믿음,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엔 머뭇거리게 되는 한국 회화의 특수성으로 읽을 때 우리는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차원에 눈을 뜨게 된다.
 
정덕현은 내가 동양화의 문제를 다루는 화가로서의 관점에서 이 글을 쓰기를 바랐다. 그는 이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란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다른 화가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넘어섰을까 궁금해 한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작가로서 생활과 작업을 함께 일구어야 한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난망함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큰 질문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덕현의 고민과 변화는 그림의 내용과 형식, 재료 등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림에 대한 의심과 반성적인 사고 위에서 이루어진 이번 작업은 오히려 회화의 힘을 더욱더 ‘믿게’ 만든다. 이것은 작가가 그리기와 세상살이 사이에 한층 더 밀착했기에 뒤따라올 수밖에 없는 성실함과 솔직함의 결과이다. 차곡차곡 쌓아온 작가의 노력과 재능의 산물인 최근작은, 지금 회화를 어떻게 ‘다시’ 볼 것인지, 특히 동양화를 보고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역사가 있어왔는지에 대한 폭넓은 문제까지 건드리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는 한, 믿음과 의심은 진자의 추처럼 반복된다는 것만이 사실인 것 같다. 화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어떤 소정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느낄 때 그림의 무한한 힘을 믿어버린다. 냉소적으로 말해 자신을 속이고 그림에 속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림은 때때로 화가 스스로의 능력과 믿음을 배반하면서 의심을 품게 만든다. 게다가 한국 동시대 회화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심의 토대 위에 있다면 의심 없이 우리가 어떻게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쉽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니까. 믿음이 맹신이 될까 봐, 의심이 불신이 될까 봐 아찔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그림과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계속되는 한 그림 그리기가 계속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김지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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