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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無 名 : 나점수
기간| 2020.08.27 - 2020.10.10
시간|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 10:30~18:00 금요일, 토요일 - 10:30~19:00
장소| 아트스페이스3/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7-33/지하1층
휴관|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30-5322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나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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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無名
    2020 [출처] 아트스페이스3 홈페이지 조각설치 가변크기

  • 無名
    2020 [출처] 아트스페이스3 홈페이지 조각설치 가변크기

  • 無名, 아트스페이스3, 설치전경, 서울, 2020
    [출처] 아트스페이스3 홈페이지

  • 無名, 아트스페이스3, 설치전경, 서울, 2020
    [출처] 아트스페이스3 홈페이지
  • 			식물적 사유로 물을 주어 길러낸 조각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나점수 세계의 독창성은 고유하고 독특한 형태와 표면에 있다. 첫 인상은 절제되고 정제된 불확정적 구조와 그것에서 돋아난 파생 구조 간의 상관성과 거친 듯 정연한 마티에르로부터 온다. 형태는 식물이나 식물성에서 원형을 취한다. 하지만 형태는 부차적인 문제다. 형태는 인식을 제한하고 상상력을 붙들어 매는 속성이 있기에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 형태적 사유만으로는 이미지와 대상의 생명성이 확장되고 상징성과 관계성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볼 수 없다. 지나치게 형태의존적인 시선은 장식과 기교에 미혹되어, 이미지와 대상을 “관계의 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우(愚)를 범하기 마련이다. 형태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모든 대상을 제각각 경이로운 사건이요 고유한 생명현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나점수는 형태적 사유를 넘어 식물(植物)적 사유로 나아간다. 식물(植物)적 사유는 대상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상관적 맥락 안에서 다르게 보는 사유다. 나점수의 오브제들은 심겨지거나 돋아나고 접목된다. 벽에서 자라고 마른 목재 위에서도 싹을 띠운다. 예외 없이 더 큰 질서서계와 연결되어 있고, 단절되어 그 자체인 대신 전체의 일부분이다. 이 조각들은 그것들이 심겨지거나 접목된 장소의 맥락과 관계맺고 지속적으로 자라는 조각이다. 이로 인해 그것들이 놓이는 장소는 어디든 생명의 텃밭이 된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식물적 사유는 관계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으로, 연기(緣起)의 이치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연기(緣起)란 불가(佛家)에서 도래한 개념으로, 모든 현상이 생기(生起) 소멸하는 법칙을 뜻한다. 모든 현상은 원인인 인(因)과 연(緣), 곧 원인과 조건의 상호관계로 잉태되며, 인연이 없는 결과란 없다. 그렇기에 연기론(緣起論)의 시선은 성(聖)과 속(俗), 아름다움과 추함, 중심과 변두리. 사물의 내면과 표면, 노동과 사념의 신비로운 연결과 그 풍요로운 미의 지평을 이내 포착해낸다. 
    
    나점수의 식물적 사유와 연기의 시선이 보다 완연하게 구현된 것은 형태 측면보다 그것들의 표면이다. 도구의 사용이 남긴 흔적이나 균질하지 않은 미세한 돌기들이 주는 시각적인 인상이 특별히 연상시키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전혀 재현적이지 않다. 효과를 오롯한 목표로 삼는 마티에르는 분명 아니다. 반짝거림, 자극, 볼거리 같은 것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이 표면은 교양이나 교육에 의해 습득된 어떤 것에도 노출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인상은 인간이 비 성찰적일 때 지배당하는 ‘손쉬운 연상’, 상상력이 결핍된 작가의 나쁜 교과서적 습관의 결과들에서 받곤 하는 그것과 다르다. 가슈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의 표현을 빌자면, 문화 콤플렉스로부터 오는 ’어두운 영혼의 투사‘에서 한결 자유롭다. 
    이 표면은 외부로부터 형성된 자국이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나점수가 자신의 성찰로 포착한, 물질성 자체로부터 발현되어 나오는 긴장감, 에너지의 파동의 잠정적인 모양이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두 종류의 이미지가 있다. 형태적 이미지(image formelle)와 물질적 이미지(image materielle)다. 형태적 이미지는 대상의 외적 형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이미지다. 물질적 이미지는 대상의 물질성에 주목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물질성에 기반해 발전해나가는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형태가 아니라 물질성에 주목할 때,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물질성은 형태와 달리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형태적 이미지가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물질적 이미지는 느릿하고 느슨하게 하지만 더 깊고 무겁게 다가온다.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고 만들어지는 사진 이미지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마치 오래 숙성된 포도주와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추억을 떠올리거나 몽상에 빠져들게 하는데 있어 형태적 상상력보다 더 강력하다. 
    
    나점수의 조각 오브제들은 물질성 자체에서 오는 긴장, 떨림이 증폭되면서 만들어지는 파동으로 덮여 있다. 파동은 물질성의 고착을 깨고 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점수가 말했듯, “물질을 긴장 시키면 정신이 되고, 정신이 움직이면 생명 (生命)이 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상상력의 기원이 되는, 무한히 길어내는 것이 가능한 신비로 채워진 비객관적인 공간이다. 
    파리-세르지 국립고등미술학교의 미학 교수 베르나르 마르카데(Bernard Marcade)는 “예술은 비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술은 모든 비밀들이 드러나고 궐기하는 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담론은 더 넓게 보는 시선에 의해 교정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비밀을 드러내 궐기시키는 장이 아니라, 주체를 신비로 가득한 세계 앞에 세워,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바 있는 ‘겸허한 주체’로 나아가도록 하는 장이었다. 17세기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21세기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2007)에 이르는 과정을 보라. 예술은 늘 삶과 죽음의 신비를 다뤘지만, 정작 그 비밀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만을 알 뿐이다. 게다가 현대로 올수록 더 무지해지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문명의 형성과 소멸의 역사적 주기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주는 불가해한 신비로 가득하다. 근본적으로 잘못 착상된 근대적 지식으로는 자신이 이제껏 파괴해온 자연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점입가경으로 오늘날엔 이성의 대행자인 기계가 그 일을 하려고 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대해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미소짓는 기계, 배우자나 음악에 대한 취향을 예측하는 프로그램,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로봇 등 인공지능의 발전상“에 크게 고무된다. 기계가 더 똑똑하고 자율적인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 될 것이며, 따라서 기계를 도구 이상의 동료 피조물로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에 선동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이제껏 이성이 저질러온 모든 오류를 더한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이 될 개연성이 크다. 컴퓨터 과학자 재론 러니어(Jaron Lanier)에 의하면, 변화는 컴퓨터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 가정을 오도된, 궁극적으로 해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오류의 씨앗이 이미 과거에 뿌려졌다.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인권변호사였던 리처드 헨리 다나(Richard Henry Dana. 1815-1882)는 근대체제에 각인된 근원적인 왜곡에 대해 밝히면서, 그 본래의 성향을 그대로 따르는 한, 인류가 지금껏 지구상에 유례없는 깊고 넓은 비참에 처하는 것을 면할 길은 없다고 단언한다. 예술이 모든 비밀을 드러나고 궐기하는 장이어야 한다는 담론도 드러나거나 폭로되지 않는 것은 존재해선 안 된다는 근대체제의 폭력적 담론을 예술에 투영한 결과일 것이다. 
    근대체제가 남겨놓은 문화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미래를 위한 상상력은 발전할 수 없다. 나점수가 말한 “앎으로부터의 자유가 없는 한, 살아 있음의 ‘경이’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조각의 문제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현대조각이 진정으로 봉착해 있는 문제의 한 핵심이기도 하다. 나점수의 오브제들은 연기론에 기반한 식물적 사유로 바슐라르가 말한 물질적 상상력에 물을 주어 길러낸 식물들이다. 그것들은 근대체제가 고안해낸 폭력적이고 분열적인 조각담론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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