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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기간| 2021.02.25 - 2021.04.11
시간| 화-일 11:00-18:00
장소| 원앤제이갤러리(ONE AND J. GALLERY)/서울
주소| 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
휴관| 월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745-1644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박경률
최하늘
홍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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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전시 전경, 원앤제이 갤러리, 2021.


  • 박경률 〈그림 3〉
    2020 캔버스에 유채 280 x 230 cm

  • 최하늘 <아빠>
    2020 희생된 육신은 액자에 프린트된, C-프린트 200 x 110 cm

  • 홍승혜 〈Digital Carpet〉
    2021 Adhesive vinyl sheet on floor 가변크기
  • 			전시 소개
    
    원앤제이 갤러리에서는 오는 2월 25일부터 4월 11일까지 그룹전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를 개최한다. 박경률, 최하늘, 홍승혜 세 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회화 (박경률), 조각(최하늘), 사진(최하늘), 영상(홍승혜), 설치(홍승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는 작가들이 탐구해오고 있는 각 매체의 전통성과 현대성, 매체특성성과 매체 불완전성 사이에 작품들을 위치시키고, ‘농담’과 ‘희극성’의 맥락 안에서 소개한다. 
    
    전시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는 예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작가들의 취하는 전략으로서의 유머와 희극성을 단순히 즐거운 관람, 또는 온순하고 일시적인 통합을 위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또한 희극이 규범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세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유머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매체 규범 바깥에서 읽힐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들에 의해 놀이처럼 다뤄지고 있는 극대화되고 비틀어진 매체의 역사, 또는 매체의 견고한 성격들은 유희로 읽히는 것을 너머, 예술의 의미 전환 시기에 그 좌표와 방향을 모색하는 제스쳐로 읽혀야 한다. 또한 작가들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유머는 실효성을 상실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위치, 또는 한세기 반 동안 ‘전복'이라는 거창한 믿음으로 지속되어 온 예술의 힘의 쇠락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전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이 전략이 유효한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예술 정의의 전환을 모색해 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 서문
    
    1990년대, 예술의 아방가르드 전략의 실패와 팝아트의 고급화를 목격한 비평가들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위기’로 진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브 미쇼(Yves Michaud, 1944~)는 이러한 진단에 대해 현대 예술의 위기는 예술 그 자체의 위기가 아니며, 현대 예술 관념의 위기, 그것에 기대어진 믿음의 위기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한 세기 반 동안 나타난, ‘독특한’ 믿음이었던 아방가르드 계보의 시대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기존의 페러다임을 벗어난 예술이 등장을 기다린다. (그것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현대 예술을 관통하던 페러다임은 완전히 뒤바뀌지도, 온전히 남아 있지도 않은 듯 보인다. 예술이 사회, 정치 변화의 주동자였던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가 예술계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때때로 그 시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면서 동시에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단일한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아래 지속되어 왔던 현대미술은 자신이 비판하던 권위와 제도로 포섭되어 시장의 환호를 받는 예술상품으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고, 그에 대한 비평은 담론을 형성해내기도 전에 그 다음의 비평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더이상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유의미한 비평의 전략을 세울 수 없게 된 예술은 유토피아의 환각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위치 - 또는 역사 -를 위태하게 만드는 조소와 익살을 전략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전략 역시 다시 거대하고 방대한 제도 안에 슬며시 녹아버리고 만다. 예술가는 더이상 사회변화를 이끄는 변혁가가 아닌 ‘노동자'라는 일원이 되고, 작품은 예술가의 삶이 바쳐진 지성의 결정체가 아닌 대중들의 지적 취향에 맞춰진 예술상품으로 조정된다.
    
    전시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는 이러한 시대에 작가들의 취하는 전략으로서의 유머와 희극성을 단순히 즐거운 관람, 또는 온순하고 일시적인 통합을 위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또한 희극이 규범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세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유머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매체 규범 바깥에서 읽힐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들에 의해 놀이처럼 다뤄지고 있는 극대화되고 비틀어진 매체의 역사, 또는 매체의 견고한 성격들은 유희로 읽히는 것을 너머, 예술의 의미 전환의 시기에 그 좌표와 방향을 모색하는 제스쳐로 읽혀야 한다. 또한 작가들의 전략으로 사용되는 유머는 실효성을 상실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위치, 또는 한세기 반 동안 ‘전복'이라는 거창한 믿음으로 지속되어 온 예술의 힘의 쇠락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전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이 전략이 유효한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예술 정의의 전환을 모색해 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박경률;
    박경률은 회화탐구의 무거움을 플레이풀한 놀이로 전복시킨다. 그가 그려내는 여러 오브제들을 살펴보면, 여러 근대 회화사조들의 특성이 빈번하게 한 화면에 뒤섞여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현실주의, 구축주의적 형상과 형태들, 그리고 인상주의적 색채 표현과 입제주의적 구성이 한 화면에 등장하고, 때때로 그래피티와 팝아트적 요소들까지 등장한다. 그는 이전의 회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기호와 상징, 추상과 구상의 특성들을 한번에 다 드러내면서 그것에 어떤 서사도 담지 않는다. 서사가 삭제된 회화 양식의 혼합물, 또는 혼합체는 하나의 아이디얼한 양식을 추구했던 역사에 대한 스터디이자 그것들을 소재로 한 작가의 위트, 또는 놀이이다. 
    작가의 이러한 놀이는 이전 양식들이 가지고 있던 위대함과 진지함을 물러나게 하고 그것을 가볍고 오락적으로 만든다. 작가는 그 사이를 과감한 붓질로 지나거나, 그것들을 덮어버리면서 회화의 역사라는 무겁고 오래된 짐을 덜어낸다. 동시에 작가는 최근 작품들을 통해 회화가 설치에서 조건적으로 입체를 두드러지게 하거나, 그 제작에서 물리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회화의 매체적 특성으로 여겨지는) 평면성을 그 자체로도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동안 회화의 조건으로 여겨진 바가 없으나 회화의 제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퍼포먼스, 공간성, 시간성을 회화적 3차원성 (또는 4차원성)으로 제시하며, ‘평면’이라는 허구에 기대어진 믿음 역시 간단하게 뒤엎는다. 좌측으로 한걸음 옮겨진 회화에 대한 그의 관점은 기존 회화에 대한 인식을 가볍게 전복하고 농담처럼 던져진다. 
    
    최하늘;
    전통적인 조각이 그 매체적 특성으로 ‘남성성’을 지니고 있음은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으로 다뤄졌다. 조각사에서 거의 마지막 사조로 보여지는 미니멀리즘 역시 ‘설치’ 또는 ‘장소특정적 조각’으로 확장되면서 그 남성성을 더욱 공고히 과시할 뿐이었고, 그에 대한 비판은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나타났으며, 종래에 미술시장에서 높은 수준의 가치를 획득하며 최하늘은 이러한 모더니즘 조각의 특성들을 이용하고 비트는 데에 퀴어적 특성과 유머를 전략으로 삼는다. 그는 김종영의 조각을 희화하하여 ‘단단함/단일함’이라는 특성을 시각/촉각적으로 배신하는 장치들을 만들어 혼종의 조각 – 그러나 같은 뿌리를 가진 – 들을 만들어내거나, 아예 공간 안에서의 가구나 인테리어의 부분으로 자신의 조각을 밀어 넣어 버린다. 그것은 조각의 역사에 대한 희극이자 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희극이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희극성을 강조하듯 값싼 재료들 - 가볍고 내구성이 떨어지는 산업적 재료들을 사용하고 정제되어 보이는 매끈함을 지양하며 퀴어적 감성을 그의 미학으로 들여온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만든 조각들은 조각적 엄숙함을 흉내내는 – 또는 흉내내는 체 하는 - 비체(abject) 들의 군상이다. 두 대디(Daddy)조각은 스폰지나 스티로폼과 같은 조각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가벼운 산업재료지만, 자신의 속성을 숨긴 채, 돌이나 철과 같은 고전적인 조각의 재료의 모습을 하고 사진 속에서 자태를 뽐낸다. 그 두 조각의 해체와 혼합, 재조합으로 만들어진 자식조각들은 딸,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기형적이며, 또는 적당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규범에서 벗어난다. 이 군상의 형태적인 면 역시 퀴어적인데, 특히 자식조각들은 방향성과 중심을 상실하고 갈지자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마치 곱사춤이 불편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전달하듯, 이 조각들은 규범 밖의 감각을 이끌어내면서 기이하면서도 희극적인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농담은 규범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최하늘의 잘리고 다시 붙여진 모던 조각의 자식들은 아버지들을 자르고 해체한 후 우스꽝스러운 동세를 취함으로써 자조적인 농담이 된다. 
    
    홍승혜;
    추상이 기하학이라는 정신성의 너머로 읽혀지는 것과 상반되게 디지털 코드들은 이면의 어떤 것도 없는, 일대일 상응으로 단순히 어떤 것을 상징하는 기호다. 홍승혜는 그러한 기호들을 주요 요소로 삼아 추상 작품들을 제작하며 추상의 정신성을 희화화한다. 
    그는 실재와 본질의 추구에 있어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며,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궤도를 그려갔던 추상에 디지털 기호의 특성들을 덧입힌다. 원과 사각, 검정이라는, 추상화에 있어 절대적 차원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은 작가의 의해 하나의 픽셀이 되어, 화장실 표지판에서 볼 것 같은 기호로 전락한다. 작가는 이에 유머를 더하여 어린아이들과도 소통이 가능할 법한 원초적 언어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움직임과 음악을 곁들여 아예 춤을 추도록 만든다. 추상에 덧씌워진 무거운 정신성을 탈피하고 가볍게 춤을 추는 홍승혜의 디지털 추상 작업들은 그렇게 현대적 감각의 해학으로 읽힌다. 디지털이 더 이상 일상과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우리에게 그것이 가진 추상성은 본능적일 지언정, 고매한 정신활동의 결과물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비웃고 장난스러운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원초적인 어떤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은, 해학과 유머가 자신의 농담으로 삼는 대상과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기호와 의미가 어떤 상관성도 없으며, 그것이 사회 패러다임 안의 소통을 위한 약속이라는 점에서도 홍승혜의 유머가 우리의 상징체계의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러한 작가의 유머가 단지 농담으로만 읽힐 수 없는 이유는, 작가가 취하고 있는 기하학적 형태들이 그것이 놓인 공간 안에서 강렬하고 기이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하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형태들은 부분이 이탈되더라도 보는 이의 시감각을 훔쳐 자신의 형태를 완결시키거나, 주변이 번잡하고 어지럽더라도 은밀하도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고야 만다. 이는 남성적이고 정신적인 추상의 역사에 농담과 해학으로 틈을 벌리고, 그 안에 다시 깊숙이 자신의 관점을 침투시키는, 즐거운 운동(movement)이자 게임이 된다. 
    
    한편 홍승혜의 조각은 바닥에 납작하게 드러눕거나 디지털로 평면화되는 대신 음악과 운동이라는 다른 요소들로 인해 다시 구축적 성격을 드러내며 조각스러운 것, ‘디지털 조각’, ‘디지털 구축’이라는 개념을 조각의 성질로 들여온다. 홍승혜의 조각은 견고하게 발을 딛고 서있는 성격에서 벗어나 공기 안에서 리듬에 맞춰 움직이며, 디지털 시공간에서의 구축적 성격으로 그만의 조각성을 드러낸다.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라는 전시 타이틀은 불필요한 문장부호들을 음절 사이에 넣어, 읽는 이가 마음 편히 웃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조된 부정어법은 오히려 상황을 비극적으로 환기 시킨다. 그럼에도 전시는 ‘농담'과 ‘희극성'이 이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틈을 내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아감벤이 말했듯이 권력에 의해 주조된 장치들은 다만 제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를 포함한 나를 나로 구성하게 하는 모든 것이 권력에 의한 장치다. 또한 그 장치는 완벽하게 구별될 수 없는 타자와 나의 사이, 서로 상보관계인 나의 안과 밖에, 인식하기도 어려울 만큼 엮여있을 것이다. “희극성이란 즉각적인 교정을 요하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웃음은 바로 이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웃음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장치를 일시적으로 깨고 나오는 파열음이다. 무엇인가를 대항하기 위한 결연함에는 숨을 쉴 겨를이 없다. 그러나 농담과 유머에는 대안과 여력을 만드는 숨의 틈이 있다.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무겁고 길게 내쉬게 하면서도, 전시는 당신이 이 농담에 맞장구 치며 웃어주기를 바란다.
    
    참여 작가 소개
    
    박경률 작가(b. 1979, 한국)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런던 첼시예술대학교에서 순수예술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두산갤러리 뉴욕 (2020, 뉴욕), 두산갤러리 서울 (2020, 서울), 백아트 서울 (2019, 서울), Lungley Gallery (2018, 런던), Madame Lillie Gallery (2017, 런던), SIDE ROOM Gallery (2017,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외 경기도미술관 (2020, 안산), 문화역서울 284 (2020, 서울), 일민미술관 (2019, 서울), Mine Project (2019, 홍콩), Beijing Commune (2019, 베이징), 송은아트스페이스(2018, 서울)등에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으며, 2018년에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두산 레지던시 뉴욕 입주 작가로 참여하였다.
    
    최하늘 작가(b. 1991, 한국)는 서울에서 조각과 퀴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P21(2020, 서울), Commonwealth and Council(2018, 로스 앤젤레스), 산수문화(2018, 서울), 합정지구(2017,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아시아문화전당(2020, 광주), 일민미술관(2020, 서울), 국립현대미술관(2019, 서울), 서울시립미술관(2018, 서울)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홍승혜 작가(b. 1959, 한국)는 198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회과를 졸업하고, 1986년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86년부터 현재까지 20여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국내외 기획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7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유기적 기하학》을 시작으로 컴퓨터 픽셀의 구축을 기반으로 한 실재 공간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기하학적 도형에 움직임과 사운드를 도입한 영상작업 및 음표의 구축을 통한 음악 작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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