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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나를 잃어버린 내가 좋아
기간| 2021.06.07 - 2021.07.03
시간| 10:00 ~ 18:00
장소| 어울아트센터(행복북구문화재단)/대구
주소| 대구 북구 관음동 1372
휴관| 일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3-320-512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박규석
김상덕
최윤경
진서용,원선금,나동석,권효민,현수하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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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실로 많은 것들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집 밖을 나서기 전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하루의 시작부터, 내가 속한 집단의 주어진 역할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평소보다 밝은 표정, 점잖은 말투를 유지하기도 한다. 면접이나 발표 같은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자!’라는 다짐과 함께 나의 의식을 다시금 일깨운다. 복수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의식된 태도는 필연적이다. 다양한 상황과 역할에는 그것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평준화된 사회적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무의식과 마주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무의식은 의식의 기저에 위치한다. 우리의 의식과 행동의 근간에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 온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을 정립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무의식을 억압된 관념 및 본능으로 보았으며 특히 성적 본능에 치중하여 그것을 특정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는데, 무의식에는 개인적인 것 외에 어느 종족집단이 오랜 세월을 통해 체험한 것이 누적되어 종족의 성원이 공유하게 된 무의식도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페르소나’를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가면으로 정의하여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취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했다. 이는 프로이트의 견해와 대조를 이루며 의식과 무의식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다.
    
     페르소나의 어원은 가면이다. 영화계에서 이 용어는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감독이 배우를 통해 자신의 분신을 투영하여 일종의 역할극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융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배우가 아님에도 일상 속에서 의식하여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며 그 기저에는 그림자라고 불리는 숨겨진 성향들, 즉 무의식이 있다. 
     가면이라는 말은 자칫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속내를 감춘 채 거짓을 꾸미는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쓰고 살아가는 이 가면들을 그저 가식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써,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꾸며내고 또한 매 순간 각성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바쁜 나날들에 경의를 표한다. 그래서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고 싶다. 타인을 위한 선의의 가면이 당신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라면, 진정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말로 소개를 시작해왔던가? 대부분 내가 가진 직업, 나이 등으로 나를 설명하려 애쓴다. 이것들이 사회 공동체 속에서 부여받은 이름표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나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마찬가지로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도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 직무에 필요한 기능에 맞추어 늘어놓는 자격증의 이름들이 나를 모두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회 공동체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 
    
     2021년도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초대전 <나를 잃어버린 내가 좋아>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on&off를 통해 창작을 이어가는 작가들의 태도에 주목한 전시이다. 무심히 바라보았던 풍경, 머릿속을 스쳐지나 이내 사라지는 상상의 장면, 동시대의 상황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모습으로 찰나의 순간에 개인의 무의식적 반영을 담아낸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의식 속 고정된 장면을 탈피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타인의 무의식과 마주하게 한다. 작품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떠한 장면에 기인하여 출발하지만 그것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담아내지 않는데, 그것은 개인의 무의식적 특성이 투과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결과물은 페르소나로 일컬어지는 가면 이면의 무의식을 향해 탐구하며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창조적 태도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관람객에게 물 위로 드러나는 수면에 불과한 의식 아래 존재하는 무의식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내며, 내가 감추고 침묵한 것들은 어떠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
    
    
     화려함과 절제됨. 병립될 수 없을 것 같은 양가적인 두 의미는 권효민 작가의 작업에서 공존한다. 레진, 비즈, 글리터 등의 재료로 이루어진 작가의 작업은 초소형의 크기임에도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만큼 화려하다. 가지각색의 빛깔과 모양으로 자유롭게 뒤엉켜있는 세부의 모습은 하나의 또 다른 판타지적 세계를 연출하고 있지만, 전체로 바라보았을 때 반듯한 정사각형 모형으로 절단되어 있어 확장 가능한 세계를 억제하듯 단절시켜 놓았다. 이 작업의 절제된 요소들은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더욱 돋보인다. 반듯하고 매끈하게 잘린 정돈된 원의 단면들은, 자유자재로 해방된듯한 조각 중앙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더욱 반듯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분출하지 못하여 억압된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들을 작업의 매개체로 이용한다. 초소형 조각의 세부는 이토록 화려하고 다양하지만 이 형태들은 마음껏 자리를 펼치지 못한 채 사회의 기준에 의해 제어되며, 마침내 반듯이 잘려나가고 만다. 
    
     빨강과 노랑, 그리고 초록, 또 파랑. 흐르는 캔버스 위를 형형색색 뛰어노는 형상들은 작가 김상덕의 ‘기호’이다. 여기서 기호는 상징(symbol)이기도 하고, 취향(taste)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좋아하지만, 일상 속에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잠재된 취향을 작품에 투영하여 억압된 무의식적 욕구들을 해소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해방된 각각의 기호들은 관람객으로 인해 어떠한 것을 연상하도록 유인하면서도, 말미에서는 다시금 자취를 감추듯 해체되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이 기호(symbol)들을 통해 관람객에게 수수께끼를 함께 하기를 제안한다. 김상덕 작가의 작품은 그의 기호(taste)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서사이다. 작가가 운을 떼 시작하지만, 관람객이 완성하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집’은 나만의 공간, 사회관계에서 Off 할 수 있는 철저한 개인의 장소, 편안함을 느끼는 곳 등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 나동석의 이번 작업에서 ‘집’의 의미는 그가 공장으로 대변하는 사회 시스템의 연장선으로 작용한다. 이번 영상작업 <koreanization>은 한국 청년의 주된 주거공간인 ‘원룸’의 다양한 형태들을 드로잉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도면화된 원룸의 공간을 통해 집의 아늑함 따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의 ‘공장’과도 같은 시스템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인 우리들의 단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사회 제반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며 작업을 이어왔으며 그 관심사를 토대로 명확한 주제를 관람객에게 전달함으로써 소통하길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업의 원룸들은 구조화된 사회의 은유이다. 그리하여 기하학적 도면으로 드러나는 이 주거공간들에 역시 수직적 시스템이 잠재해 있음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곳들에서 속속들이 우리는 사회의 질서정연한 체계 속에 속해있음을 상기시킨다.
    
     작가 박규석은 무의식에서 수집된 파편들의 집합으로 하나의 서사를 창조한다. 디스토피아적 성향을 담은 이 세계관은 인간의 욕망으로 소모되는 동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인간과 동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우리는 일방적으로 동물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이전보다 커지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여전히 인간이 배출하는 욕망의 산물들이 동물의 희생을 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혼란스럽게 중첩되는 많은 형상들은 이처럼 동물과 인간 간의 복잡한 관계를 대변한다. 캔버스의 경계에서 과감히 잘려나간 동물의 몸은 사정없이 희생을 강요받는 그들의 처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수많은 메타포로 가득하여 구석구석 눈을 뗄 수 없는 작가의 회화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허망한 표정으로 갈망하듯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동물들이 바라보는 곳은 어디쯤일까. 우리는 어떻게, 올바르게 공존할 수 있을까.
    
     작가 원선금은 소비문화를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대량생산된 일회용품을 매체로 작업을 이어오며 소비사회의 과함을 여러 방식의 설치작업으로 표현했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포장재의 화려한 이미지에 주목한다. 브랜드의 ‘이미지’는 이제 대중을 이끄는 가장 매혹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이미지는 표면적인 모습 그 자체를 넘어서 브랜드의 느낌,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 대중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에 이끌려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의 가치를 구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질문한다. 본래 싸개의 의미로, 결국 버려지기 위해 만들어진 이 포장재들은 쓰레기인지, 혹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인지. 실로 다채로운 포장재가 가득한 작가의 작품 앞에 서서, 이러한 질문을 받은 우리는 이제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던 것들에 대해 의식할 수 있다.
    
     작가 진서용은 그리고, 지우고, 문지르고, 또 다시 그리고, 허물어가는 창작의 과정으로 작품의 실체를 시각화한다. 그곳에는 흔적이 가득하다. 어두웠다가 곧이어 밝아지는 시간의 흐름, 으스름한 자취들,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는 무언가 모호한 것들은 마치 영원할 것처럼 표면 위를 유유자적 떠다니지만, 캔버스의 경계에서 이내 연기처럼 사라진다. 
    작가는 눈을 감으면 남는 어렴풋한 장면을 통해 내면의 자아와 마주한다. 그는 ‘경계’에 위치하는 새벽의 어렴풋한 풍경을 드러낸다. 새벽은 밤과 아침의 틈이다. 틈은 지시적인 명백한 정의로 존재하지 않으며 상반되는 것들을 공존하게 한다. 작가의 작업이 그러하다. ‘경계를 흐림으로써 경계를 보게 한다’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여기에 없다. 눈을 감고 보자. 눈을 감았음에도 어리는 모습들을 마주해보자. 다시 눈을 뜨고 보자. 이것은 작가 개인의 서사시이다.
    
     확대. ‘모양이나 규모 따위를 더 크게 함’으로 정의되는 이것은 대상을 세밀히 바라보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작가 최윤경은 인체의 부분을 확대하여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가 확대해온 신체의 대상은 사타구니, 남성의 음경과 같이 일반적으로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좀처럼 세밀히 바라볼 일이 없는 은밀한 부위들이었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얼굴의 코와 입 부위를 확대하여 캔버스 전체에 담아낸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에게 일상이 된 마스크의 영향으로 타인의 하관을 바라볼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적 요소에 동시대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작업의 주된 요소가 되어온 확대, ‘zoom in’의 기능이 점차 발전하고 있는 휴대폰의 매체를 이용하여 회화와 매체의 관계와 간극에 대해 실험한다.
    
     배경으로 치부되기 쉬운 ‘장소’는 때로 우리에게 되려 영향력을 발휘하곤 한다. 장소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은 집단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작용하며 우리에게 여운을 남긴다. 현수하 작가는 현실에서 마주한 장면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나가는데, 실재하는 이 장소들은 작가의 손을 거쳐 그녀의 관념이 작용하는 장소로 변모한다. 
    실제로 명확했을 장소의 모습 위로 중첩되어 있는 다수의 선들은 그림 위를 부유하고 있다. 선을 긋는 행위는 대개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활용되지만 작가의 작품에서 부유하는 선들은 다른 의미로 기능한다. 선들의 율동감으로 비롯된 파동은 풍경의 동세를 만들어내는데, ‘흔들리다’라는 동사는 물리적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마음의 동요를 뜻하기도 하듯 여기서 흔들리는 것은 사실 장소의 물리적 동세라기보다 작가의 정서적 동세로 볼 수 있겠다. 요동치고, 흔들리는 것들은 늘 불안하다. 하지만 늘 꼿꼿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만도 없지 않나. 흔들림은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현수하의 풍경은 계속해서 부유한다. 계속해서 흔들리지만, 또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우리들에게, 진정 나를 움직이게 하는 수면 아래의 무의식에 대한 고찰의 시간을 제안한다.
    나를 잃어버려보세요. 타인으로 인해 명명되는 나를 잃어버려보세요. 
    어떤 생각들을 주로 하며 사세요? 터무니없을지라도 즐거운 상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진정,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심심찮게 나누며 살아가는 나날이기를. 좇아야 하는 원대한 목표에 밀려 나를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기를.
    
    태병은(Tae Byungeun)
    
    출처 : 행복북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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