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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낙관주의자들
기간| 2021.07.08 - 2021.09.04
시간| 월-금 10:00 - 18:00 토 12:00 - 19:00
장소| 아트센터 예술의시간/서울
주소| 서울 금천구 범안로9길 23 (독산동)/예술의 시간
휴관| 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2-6952-0005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김영글, 김유정, 문서진, 송지혜, 장성은, 장입규, 조희수
정보수정요청

전시정보


  • 전시 전경_2F
    ⓒThe Artists & Art Centre Art Moment

  • 전시 전경_4F
    ⓒThe Artists & Art Centre Art Moment

  • 김유정, Floating Island
    2021 ⓒThe Artists & Art Centre Art Moment 인조식물, 틸란드시아, 철사, 가변설치

  • 문서진, 살아 있는 섬(Living Island)
    2020 ⓒThe Artists & Art Centre Art Moment 사진, 디지털 프레임, 책, 일지 등 혼합매체, 가변설치
  • 			낙관주의자들 : 전망은 불길하면서도 희망적이다.
    글 · 주시영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 테드 창(Ted Chiang),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는 미래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와 개인의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들이다. 이들은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미래와 현재를 잇고, 작품을 통해 세대와 세기를 넘나들며 꾸준히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네 명의 소설가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래를 전망했다. 미래를 예견한다는 것은 현재와 맞닿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가 과거로부터 기인한다는 역사의 상호연결성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가들의 전망은 허구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현실성을 확보한 미래 사회 전망으로 이 소설가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낙관주의자들》은 귀 기울이고자 한다.
    
    ‘낙관주의자’는 밝은 미래를 전망하는 희망의 힘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만 가득한 방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 낙관주의자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에 따라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자세가 결정될 것이며, 그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의 네트워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그리고 타인과 맺는 관계의 연결망은 다시, 시대의 양상(Zeitgeist)을 결정지을 것이다.
    
    《낙관주의자들》은 개개인과 현시대의 상태가 만들어낸 복잡한 그리드의 한가운데서 고민한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지형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초연결사회5)의 촘촘한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무엇에 희망을 걸고 무엇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다가올 21세기를 ‘와우! 멋진 미래!’ 라고 기대했을 20세기의 현대인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시시한 21세기를 맞이하자 먼 미래까지는 전망할 의지를 잃어버린 채, 차라리 가까운 미래만을 막연히 낙관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낙관주의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오늘, 우리의 태도를 관찰하고, 현 시대의 상태와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돌아볼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낙관주의자들》의 참여 작가-김영글, 김유정, 문서진, 송지혜, 장성은, 장입규, 조희수-와 네 명의 SF 작가-올더스 헉슬리, 윌리엄 깁스, 테드 창,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것을 위해 복잡한 그리드 위에서 만나고 있다.
    
    아래의 인터뷰들은 ‘만약 이 작가들이 미래 사회에 관한 그들의 관점과 전망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함께 출연하게 된다면?’이라는 상상으로 구성하고 편집한 것이다.6) SF 작가들의 인터뷰는 그들의 책을 기반으로 하였고, 전시 참여 작가들과의 인터뷰는 직접 대면하여 나눈 대화내용을 재구성하고 편집한 것이다. 인터뷰를 전제로 그들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형식면에 있어서는 가상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삶과 작품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와 생각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실제적이다. 다만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재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밝혀 둔다.
    
    《낙관주의자들》이 불길하지만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는지, 희망적이지만 불길한 미래를 말하는지는 해석의 핵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래에 이어질 인터뷰 마지막에, 당신의 인터뷰가 연결되는 상상을 해 본다. (작가와 나눈 대화와 작가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을 기반으로 구성하였다.)
    
    
    
    올더스 헉슬리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야만인의 눈에는 기술 문명국의 인간들보다 더한 바보들은 없었겠죠. 비극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기계문명의 발달이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까지 상실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요? 인생의 모든 기회에서 질의되고 답변되는 제1의 문제는 “이 생각, 혹은 이 행동이 자신이나 최대다수의 타인들의 인간적 ‘궁극적 목적’의 성취에 어떠한 공헌을 하며 어떠한 방해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이덕형 역, 문예출판사, 1988, p.337『멋진 신세계』 발표 후 10여년이 지난 후, 작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여 게재한 소설의 서문 내용 중 일부) 인간은 무엇이든 대가 없이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라는 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죠.
    
    
    윌리엄 깁슨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미래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 같은 것들은 아마 모두들 한 번쯤은 가져보았던 느낌일거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멋진 미래인가!’ 감탄하는 이 순간에도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열망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죠. 멋진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일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게임에 집중하는 어린 아이들의 눈동자를 본 적 있나요? 화면에서 나온 빛은 아이들의 눈으로 들어가고, 신경세포들을 통해 몸을 타고 흐르면서 전자들이 게임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말하자면 마치 피드백 폐쇄회로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 애들은 분명히 게임이 투영되는 공간의 사실성을 믿고 있었던 거겠죠. 실재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고 믿어지는 세계를 말입니다. (윌리엄 깁스의 인터뷰 내용 중 발췌)
    사이버스페이스(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는 그의 데뷔작 『뉴로맨서Neuromancer』, 1984 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어로 사용자가 컴퓨터 네트워크를 사용할 때 ‘존재’하는 ‘장소’를 나타내며, 깁슨이 처음 사용한 이후 비슷한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그가 명명한 이 가상의 세계에 네트워크, 웹, 클라우드, 메타버스, 테이타스피어 등의 이름이 무한대로 붙여지고 있다.)는 컴퓨터 연결 체계 안에서 인터넷 상에 연결된 수백만의 컴퓨터를 모아들이죠. 제가 처음 상상했던 사이버스페이스가 지금 우리를 연결해 주는 실제적 장소가 된 것이 놀라울 뿐이에요. 저는 오히려 기계, 기술 자체의 윤리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도덕성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테드 창
    
    “미래는 이미 이곳에 와 있다. 단지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윌리엄 깁슨의 말이 기억나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는 설령, 컴퓨터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다만 어딘가 다른 장소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난 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 어떤 놀랄 만한 과학기술적 혁명이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단편 『인류 과학의 진화』에 관한 창작노트 중 일부 p.434)
    
    
    가즈오 이시구로
    
    저는 인공 지능과 유전자 편집의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사실 이제는 이런 이슈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논의될 만한 이야기가 아닐 정도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은 아주 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게 될까요? 과학은 팬데믹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냈습니다. 과학은 늘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 가며 인류의 리더로 자리를 굳히고 있어요.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느라 바쁩니다. 혼란한 전망들 속에서 제가 믿고 싶은 건 단순합니다. 세상에는 선함(goodness)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가 곧 우리의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누구를 신뢰하기로 선택할 건가요? 당신 가까이에서 삶을 나누는 ‘AI’를 신뢰할 건가요?‘AI’를 프로그래밍한 ‘인간’을 신뢰할 건가요? 조금은 헷갈리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저는 무엇이 됐건 AI와 인간 모두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김영글
    
    다들 SNS에 글을 올려본 경험은 있으시잖아요. <LIKE>의 경우, 우리가 실상 타인의 ‘좋아요’와 같은 시선에 얼마나 매여 있는지,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한마디로부터 얼마나 끊임없는 영향을 받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디지털 시대의 소통으로 훨씬 자유로운 의견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되는 상황에 처한 것 같아 보입니다. ‘아무말대잔치’가 벌어지거나 더 솔직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죠. 온라인상에서 돌아다니는 말 한마디가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지는지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대로예요. 텍스트로 주고받는 소통은 편집 기능을 탑재했지만, 덕분에 오히려 핵심으로 다가가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WORST ANSWER>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귀여운 점 세 개를 놓고, 문자에 답하고 있는 상대와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나 사이의 관계가 무한 루프의 함정에 빠져서 한없이 제자리를 돌고 있는 끔찍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단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누군가와 문자로 대화하고 있는 중인 일상의 한 장면일 뿐인데도 우리는 매시간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관계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LIKE | 2019, 단채널 비디오, FHD, 컬러, 사운드, 22분11초, ed.1/4(4+A.P.1)
    WORST ANSWER | 2019,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사운드, 4분25초, ed.1/4(4+A.P.1)
    
    
    김유정
    
    커다랗고 생명이 없는 인조 식물 위를 뒤덮은 건 여려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틸란드시아(Tillandsia)입니다. 아시겠지만, 틸란드시아는 뿌리가 없는 식물이에요. 뿌리 대신 이 식물이 살아가는 방법은 최소한의 습기나 먼지만을 잎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영양분을 공급하는 근원과 만나지 않은 채 가느다란 숨을 이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작은 잎들이 감싼 거대한 형체는 생명의 근원이 움트는 원시림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페이크 식물 위에 틸란드시아를 덮었습니다. 죽어 있는 가짜
    식물을 감싼 살아 있는 진짜 식물 앞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이것, 이 식물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있나요? 만약 당신이 이 풍경을 SNS에 올린다면, 당신의 피드(feed)를 본 사람들은 이 풍경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좋아요’를 누를까요. 당신과 피드 너머에 존재하는 거리는 어쩌면 페이크 식물 모형과 그것을 덮은 살아 있는 생명만큼의 크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뿌리 없이 부유하는 현대인들이 피상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양상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Floating Island | 2021, 인조화분, 틸란드시아 식물, 철사, 가변설치
    재생_숨(Recycle_Breath) | 2020, 책장, 라이트박스, 인조식물, 86×195×28.3cm(×2개)
    
    
    문서진
    
    <살아있는 섬>은 미국 메인주의 Monson에 위치한 Lake Hebron에서 겨울 중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매일 꾸준히 한 작업이에요. 매일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걸어서 눈을 쌓아 올려 섬을 만들었습니다. 한 삽 한 삽 쌓아 올리는 과정에는 개인적으로 느껴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자연에 대한 경외심,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반추가 담겼습니다. 또한 타지에서 기꺼이 이방인의 친구가 되어준 누군가의 위로도 섬을 쌓을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낯설고 두려운 곳을 여행하거나 그런 곳에서 잠시라도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누구나 공
    감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 타인과의 관계를 향한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죠. 나는 나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무엇을, 녹아서 사라질 섬을 매일 꾸준히 쌓아 올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가올 봄이면 ‘필멸할 섬’이 섬을 쌓는 과정만으로도 온전히 ‘불멸할 섬’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녹아 없어질 것을 쌓아 올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깊숙한 곳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섬(Living Island) | 2020, 사진, 디지털 프레임, 책, 일지 등 혼합매체, 가변설치
    
    
    송지혜
    
    저는 우리가 느끼는 ‘불안’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회와 환경에 기인한 불안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으로 연결됩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결국 ‘잘 모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 답답하고도 두려운, 정체 없는 감정과 느낌에 휘둘리게 되죠. 불확실성만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건 없으니까요. 저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갖는 이 고질적인 불안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잘 모름’을 뚫어지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 그리고 무엇이 됐든 숨어 있는 각자의 ‘불안감’을 인지했으면 하는 생각이었어요. 사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숨겨진 내면을 들추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괜히 들추어 먼지를 일으키거나, 복잡한 상황이 될 수 있는 번거로움, 굳이 마주하지 않았으면 했던 슬픔 같은 감정들을 꺼내는 것이 더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죠. 불안한 개인의 집합인 현대 사회도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고 봐요.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살아간 오늘의 개인과 사회가 겪는 모순이 우리 모두에게 쌓여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잠시 덮어두자 | 2018, 캔버스에 유채, 193.9cm×260.6cm
    대롱대롱 | 2017-2018, 캔버스에 유채, 193.9cm×390.9cm
    
    
    장성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고독은 있습니다. 고독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 고독은 존재합니다. 저는 고독을 느끼는 이유와 상황보다는 고독 그 자체를 들여다 봅니다. 형체가 없는 고독이지만 고독은 사람에게 스며들어 있다가 어떤 모습이나 표정, 색깔이나 분위기 같은 것으로 드러나죠. 저는 이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고독은 혼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관계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고독하기도 하지만, 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고독하기 때문이죠. 인간에게 있는 헛헛함과 공허함, 까닭 없는 슬픔 같은 감정들은 인간 내면과 관계 안에 얽힌 유무형의 다이내믹 안에서
    폭발하거나 더 깊숙이 침잠합니다. 연결되어 있음에도 더 넓고 깊은 연결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개인은, 여전히 혼자이며 고독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타인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공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좌절하지만, 또 끊임없이 자신을 응원하는 이 반복을 멈추지 못한다는 어느 글귀에서처럼, 고독 가운데 길을 찾아 자신과 타인 앞에 다시 서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 듯 말 듯 |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54×75cm, ed.1/5
    Disposition | 2016, 라이트젯 프린트, 80×60cm, ed.1/5
    Idea of Summer Evening | 2016, 라이트젯 프린트, 90×60cm, ed.1/5
    Monstrous | 2016, 라이트젯 프린트, 30×45cm, ed.1/5
    underwater swimming | 2013, 라이트젯 프린트, 180×120cm, ed.1/5
    lunatic dance | 201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66.79cm, ed.2/5
    
    
    장입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네요. 균형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기는 하지만요. 저는 디지털 세계의 이미지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재생산하거나 재조합하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을 무겁거나 심각하게 다루기보다는 조금은 위트 있게,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가 생산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편집자의 의도 또는 편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재생산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가공된 이미지를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이미 우리 삶에 익숙한 일이죠.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욕망은, 눈이 대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보기도 전에 스마트폰에 담은 후 곧바로 가상의 세계로 가져갑니다. 그러니까 어디에서든 눈에 담고 싶은 것을 먼저 사진으로 촬영한 후 가상의 소통 공간에 올리는 방식, 즉 가상의 공간에서 재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가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죠. 의자에 앉아 있는 ‘실재하는 나’와 화면에 보이는 ‘편집된 나’ 사이에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는지, 실험해 보실 분 계신가요? 화면 속 당신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린 후 저를 태그해 주세요. 당신이 그곳에서 어떤 소통을 이어갈지 궁금합니다. @artmoment.doksan
    
    Social Network Service(SNS) | 2021, 컴퓨터, TV모니터, 카메라, 삼각대, 의자, 가변설치
    
    
    조희수
    
    다이버(diver)의 퍼포먼스(performance)를 본 적 있을 거예요. 높은 곳에서 뛰어오르는 다이버가 잔잔한 물의 표면을 가르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 다이버가 뛰어든 곳은 수영장이나 바다가 아닌, 강남역 한복판입니다. 도시 한가운데에 난데없이 나타난 퍼포머(performer)는 규율과 규칙이 약속된 장소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무심코 길을 걷던 이들은 퍼포머의 달리기를 목격하고,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사이 육상 경기의 관람자가 되어 버리죠. 표면을 뚫고 그 안으로 곧바로 뛰어든 선수는 타깃을 향해서 달립니다. 물살을 헤치듯 도시의 흐름을 깨고, 거리의 분위기를 전환합니다. 물결의 파동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전달되는데요. 그 파동이 스크린을 뚫고 관람자인 당신에게까지 다다르기를 바라봅니다. 공간의 분위기를 전복시키는 것은 능동적인 바통 터치에서 일어나는 관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강남역의 수많은 인파와 신호등, 횡단보도와 늘어선 차들의 이동 속에서 오로지 다음 주자를 향해 달려가는 목적은 ‘연결’이에요. 이로써 수많은 점들 가운데 힘겹게 하나의 선이 연결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The Divers | 2021,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4분7초
    
    
    (제공=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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